[아무튼, 술 - 김혼비] 어쨌든, 술 (술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그들의 지식의 양을 늘리려는, 부모들의 술수라고 생각했다. 내가 뭔가를 많이 보고싶은가? 넓게 보고싶은가? 뭘 보고싶은가? 하는 고민도 없이 그것이 뭐든 보이는게 좋다는, 무언의 압박이랄까. 여전히 앎은 그 양보다 질과 깊이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변함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와, 아는만큼 보인다더니, 이 말이 진짜구나- 하고 실감하는 때도 많아지고 있다. 며칠전에는 이 깨달음을, 입으로 옮기기도 했다. 어디에 눈을 둬도 즐길거리가 가득한 서울에서도, 막상 햇살 좋은 날 집 밖으로 나서 누군가를 만나면 함께 갈 곳이 많지 않다. 먹은 밥을 또 먹을 수도 없고, 마신 커피를 또 마실 수도 없고, 한강에 가서 냅다 드러눕는 것도 적정한 의상, 온도와 습도, 담요, 돗자리 등 준비물이 필요하다. 적당히 소통 할 수 있고, 소통에 사용할 소재를 공간에 갖추고 있으며, 안전하고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즐거울 수 있는 곳. 그러면서도 식당, 카페, 낮술집, 한강처럼 일상의 일부보다는 더 새로운 곳. 이런 한마디로 축약하기 어려운 장소에 대한 갈망은 누구나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벌써 5년째 압구정로의 한 부분을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가 지키고 있다. 압구정에 있는 쿠킹 라이브러리와 이태원에 있는 뮤직라이브러리, 바이닐&플라스틱은 모두 적당한 데시벨로 동행과 이야기를 나누기도하면서, 특정 분야에 집중하여 세심하게 모으고 큐레이팅했을 방대하고 잘 정돈된 타인의 서가 내지는 컬렉션을 둘러보고, 거기에서 나의 취향을 확인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정독 도서관처럼 개방적이고 훌륭하지만 이용이 자유롭지만은 않은 전통 도서관과의 차이점 덕분에 새롭다는 감각도 강하다. 그리고 쿠킹 라이브러리. 이 음식을 주제로 하는 거대한 컬렉션에서, 미식에 관심은 있지만 조예가 깊지 않고, 요리는 전혀 못하기 때문에 심드렁하던 나는, <아무튼, 술>을 발견하고야 만다. 엄마의 얼굴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나 '내가 말했지, 아는만큼 보인다고 했잖아?' 한다. 개별 독자들을 상대로 북 큐레이팅, 작가님과 독자들이 만나 이야기하는 북토크, 독자들끼리 독서모임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로우북스에서 이 '아무튼' 시리즈로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아직 아무튼 독서모임에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아무튼 하루키>를 탐내며 틈틈히 이 독서모임 일정에 관심을 기울여서인지, 그러니까 이 시리즈의 존재에 대해서 알아서인지, 수만권의 요리와 음식 관련 책 더미 사이를 무색하게 돌아다니는데 <아무튼, 술>이 번쩍하고 보인 것이다.
바로 옆옆옆옆에 <아무튼, 비건>이 꽂혀 있었는데, 하필 <아무튼, 술>만 눈에 띈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면 대부분이 술을 잘 마실 것 같다는 첫인상 소감을 남긴다. 바이킹 같은 외모와 달리 나는 소맥 세잔이면 바로 흥이 오르고, 흥만큼이나 얼굴도 빨갛게 달아오르는 술약이다.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주류인 위스키에 있어서만은 꽤 잘 마시고, 그 경험에서 얻은 여러가지 에센스를 기억에 새길 수 있을 정도로 버티기도 잘 버틴다. 그래서인지 술을 왜 좋아하냐는 질문은 위스키를 왜 좋아하냐는 질문과 같은 의미를 띈다. 꼭 술자리에 가면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술을 왜 좋아하냐! 하는, 앞에 놓인 술병들이 서운해할만한 질문이다. 내 앞에서 이 질문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이 아니라 술 마시는 자리의 분위기를 좋아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나는 외향적인 성향에 술을 안 마셔도 술 마신 것처럼 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화력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거짓말 대답을 할 수 없다. 무난한 거짓말 대신, 술(위스키)을 마시는 것 자체가 경험이고, 농축된 역사를 들이키고 공부하는 그 경험을 통해서 세밀하게는 나의 취향, 광의적으로는 나 자신에 대해서 알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거창하게, 그러나 이런 고백과는 새빨개진 얼굴이 어울리지 않아 부끄러워서, 어쩔 수 없이 낄낄대며 대답한다. 이게 어이가 없는지 질문한 사람도 아니 그래서 너 같은 술찌(술약의 속된 말)가 술 자체를 좋아하는거네? 하면서 좌중과 함께 웃는다. 요컨대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하고, 술(위스키) 마시는 것, 술 자체를 좋아한다- 그렇게 비로소, 거짓말 아닌 대답으로 내가 대답할 차례를 기다리던 초조함에서 벗어나 웃는 모두와 함께 낄낄하고 웃는다.
김혼비 작가의 <아무튼, 술> 역시 장난스러운 외형과 웃긴 이야기의 힘을 빌어 술을 통해 들여다 본 삶에 대한 진지하고 본질적인 고민을 담아낸다. 작품은 기본적으로 술 먹고 노래방에서 들고 나온 리모콘을 운전대 삼아 택시 보조석에서 운전을 한다던지, 나는 배추야! 나는 커서 김치가 될거야! 하고 취해서 소리지른다던지, 술 취해서 땅바닥에 정수리를 박는다던지, 길을 가다가 느닷 없이 이 술집에 들어갈지 말지를 고민한다던지 하는 유쾌하고 재미 있는 일화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이 일화 끝에는 반드시, 그러나 유쾌한 어조는 그대로 유지하며, 자신의 실존과 실존 너머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잇따른다. 그는 택시기사님의 지갑은 리모콘과 함께 노래방에 맡겼으니 찾아가도록 하고 힘내라는 문자를 받고 문득 자신이 요즘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엉엉 울기도, 니가 왜 배추냐며 술에 취해 소리지르는 친구를 기억하며 나는 배추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생각하기도, 모든 땅바닥은 땅의 바닥이 아니고 지구의 정수리라는 이문재 시인의 <바닥>을 떠올리며 넘어짐의 순간을 지구의 정수리와 자신의 정수리가 만난 우주적 모먼트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목적지와 이에 맞는 경로, 그리고 그 길이 환희인지 고통인지를 고민하는 루이스의 자문을 떠올리며 자신의 존재 의미와 삶의 목적에 대하여 고민하기도 하면서, 술과 자신의 삶 사이의 이음새에 대하여 차근차근 고백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한 팀이 된 여자들, 피치에서다)>에서 축구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듯이, <아무튼, 술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로 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누가 이 진솔한 앞에서 여자가 술을!이나 술은 나쁜거지! 같은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술은 죄가 없다.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죄가 있을지언정.
아는만큼 보인다고. 김혼비 작가가 어째서 술을 골라 책까지 썼는지, 작품을 읽다 보면 그 이유가 술에 대한 덕심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쯤은 느낄 수 밖에 없을만큼 나도 술에 대해서 알아버리게 되었다. 나의 오늘은 어제가 모여 만들어졌고, 그 결과가 좋든 싫든 우리는 그 사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나의 오늘을 만든 어제의 반은 술이 함께 했다. 고3시절 주말마다 백악관 노래방에서 마셨던 맥주가 아니었더라면 수능을 잘 치르지도 못했을 것이고, 고시생시절 주말마다 클럽에서 마셨던 각종 리큐르들이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고시촌을 탈출하지 못했을 것이고, 직장에서 종종 회식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사표를 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친구들과 혹은 홀로 종종 위스키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나의 실존은 어떤 모양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늘 빨간 상태로 그러니까 술톤으로, 일욱, 성원, 균민과 밤새 마신 술 때문에 알큰하게 취해, 문래동 골목에 놓인 소파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너는 마음 속에 고요의 바다가 있어-, 내가?, 맞아, 나도 느꼈어- 아, 근데 저도 느꼈답니다 잭슨!, 그러자 내 안에 출렁이는 것이 술인지 고요의 바다인지, 잠시 잠깐 헷갈리면서, 그래 사실 그런 것도 같네- 같은 대답을 하는 대화도 나누지 못했을 것이다. 고요하게 위스키와 마주 앉아 방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종종 그 역사가 나에게 말을 건다. 너는 누구야, 아는만큼 보인다는데.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며 나에 대해 알아간다. 역시 엄마 말은 늘 옳아서, 아는만큼 보인다는 것을, 아는만큼 보이는 나를, 찌르르하게 실감하고는 한다. 알고 나면, 보다 알고 보면, 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했던 논의들은 다 뭉뚱여버리고, 결론으로 흐름을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아무튼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러니, 아무튼, 어쨌든, 술이다.
*
제 글은 보통 무겁고, 진지한 편입니다.
이 책은 그렇게 리뷰하는 것이 적절치 못한 것 같아서 유쾌하게 써보려고 했습니다.
가볍지는 않고 그러나 유쾌하게 쓰는게 정말 쉽지 않더군요.
익숙하지 않은 스타일이라서 그런지, 최근에 읽은 작품이라 그런지 결국에는 김혼비 작가님의 문체를 흉내내는 것이 되어버렸네요.
하루 이틀 뒤면 증발할 배움이니까, 그냥 두기로 했습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어서 더 즐거웠다.
잠깐 아무튼, 비건을 아무튼, 술 옆에 붙여서 사진을 찍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원위치 시켜놓았다.
도산공원 근처에서 할 일 없고 심심하면 여기서 책 읽어도 좋겠다.
특이한 디자인과, 파격적인 제목이 인상적이었던 책들
그리고 내 사랑 타바스코
지어진지는 꽤 됐는데 여전히 핫플이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www.instagram.com/seol_vely
댓글로 신명나게 이야기 나누는 중이에요.
여러분께서도 독서 후에 남은 감상을 다른 사람의 감상으로 새롭게 느끼고 다듬고 채우는 과정을 함께하세요!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독서는 발전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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