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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에세이18

[호 - 정보라] 호의 편지 [호 - 정보라] 호의 편지 너의 세상이 긴 우호라면. 그래서 우리의 세상이 만나는 찰나가 짧은 열호, 아니 그저 그 포물선 위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너의 우호가 아스라이 궁굴려져 어느 시간 위에 걸릴 때까지. 나는 이 원호 위에 있을게. 무수히 해가 뜨고 지는 어느 날들을 견디며. 순리. 이치에 맞게. 우주가 세계를 운영하는 대원칙에 들어맞는 방향으로. 어떤 일이 순리에 맞게 흐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언젠가 죽음으로 삶을 갚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순리에 맞게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도, 그 간단한 한 문장을 굳게 믿을 만큼 강인해질 수도 없다. 무슨 생각으로 애한테 그런 .. 2023. 8. 20.
[이브와 트리 - 우다영] 기묘한 이야기 / 북리뷰 [이브와 트리 - 우다영] 기묘한 이야기 아니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언니야. 언니가 어떤 소설을 쓰거나, 어디선가 읽은 소설을 리뷰한 것이 아니라, 언니가 겪은 일을 쓴 거라고? 그 와중에 책 이야기도 쓰고? (직전 포스트인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 의 리뷰 [그래, 나는 코끼리다] 참조) O는 카톡으로도 똥그랗게 뜬 눈이 떠오르게 하는 말들을 하더니, 직접 만나서도 내 예상이 정확히 맞았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녀를 그만큼 잘 안다는 것을 증명이라고 해주고 싶었는지, 같은 온도의 경악을 온몸으로 되풀이했다. 언니야 아이고. 고생했다, 정말. 연말에 무슨 일이야. 잠시 후 O의 집에 들어선 L 언니는 문을 열자마자 예쁘고 참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쏟아냈다. **, 이게ㅇ 무슨 일이여. *.. 2023. 1. 10.
[나목 - 박완서] 고목(古木)에 부치는 편지 (북리뷰, 북에세이, 독서모임, 독서일기) [나목 - 박완서] 고목(古木)에 부치는 편지 당신은 한복에 새초롬하게 노란 빛으로 반짝이는 호박을 달고,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셨다. 소가 먹을 여물을 썰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쇠죽을 끓이고, 간밤에 누렁이가 퍼질러놓은 소화의 흔적을 치우셨다. 바쁜 새벽을 떠나 보내고 목욕탕 의자 위에 앉아 지팡이에 기대 볕바라기를 하고 있으면, 눈곱도 안 뗀 손주들이 우당탕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신은 할아부지 머리 까까머리라며 당신의 까슬한 머리를 짚고 빙빙 도는, 막내 아들이 낳아다 준 해맑은 늦손주들을 깊이 아끼고 사랑하셨다. 주말에 당신을 보러 가는 우리 마음도 설렜었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알게 됐을 때쯤에서야, 나는 당신이 우리를 향해 짓던 해사한 표정이 비단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이 새까맣게.. 2022. 11. 23.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엄마에 대하여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엄마에 대하여 엄마에 대하여 쓰는 것은, 나에 대하여 쓰는 것과 비슷하다. 내 글에 유독 엄마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내가 마마걸이어서도-나는 오히려 스스로가 독립적 존재임을 앞세우는 효로 자식에 가깝다-, 주변에 남은 사람이 엄마 뿐-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친구가 아직 30명 가까이 남아있다-이어서도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보면서 나를 본다. 엄마를 맡으면서 내 향기를 감지한다. 엄마를 안으면서 나의 자아와 대화하고 화해한다. 이는 DNA나 피를 타고 상속 되는 기질 같은 생물학적 분석이나 물보다 피가 진하다는 혈육의 정과 같은 보편적 정서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아빠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가족에게 더없이 .. 2022. 10. 26.
[가장 매혹적인 - 한정현] 세상의 시작과 끝 (담양 용마루길 산책) [가장 매혹적인 - 한정현] 세상의 시작과 끝 오뉴월에 뼛 속까지 얼어 붙는 듯한 비명 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다. 척 보기에 나이상, 분위기상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이상한 조합을 이루는 여성 셋이 절벽을 바라보며 서늘한 비명을 내질렀다. 안돼. 어떻게 해. 같은 소리가 사건의 위중함을 짐작케 했다. 가파른 악산은 아니지만, 등산로 건너편에는 까마득한 절벽이 있었고, 등산로와 절벽 가운데에는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가장 어려 보이는 여자가 입을 틀어막고 거의 울다시피 하고 있었다. 보라색으로 물든 머리를 뽀글뽀글 볶은 파마머리 아주머니가 어린 여자를 일으켜세운다. 아마도 아는 사람들인가보다. 이윽고 마스크를 쓴 다른 여성이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자세를 낮추고 등산로 끝으로 발을 옮겨 빼꼼히 계곡을 내려다본다.. 2022. 10. 12.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밥 두 공기 (feat. 이비스 스타일 앰배서더 서울 용산에서의 북캉스, 연휴 맞이 담양호 용마루길 산책)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밥 두 공기 엄마는 엄마 집 부엌에 딸린 세탁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앞집에, 세상에서 제일 먼저 가을이 온다고 말씀하시고는 한다. 단풍이 사방에 내려앉기도 전에 앞집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만 빨갛게 탄다. 붉은 노을이 앉아 주홍빛으로 물든 나락이 가득한 논처럼, 앞집은 사시사철 가을 풍경이 가득하다.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는 그 가옥은, 뭐랄까. 부지런하신 주인 할머니의 자부심이랄까, 그런 공간이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단단히 동여맨 할머니가 아침 일찍 일어나 마루를 닦고, 토방을 쓸고, 마당 구석 구석을 청소하고, 장독을 밝히고, 우물을 씻기고, 심지어 여름에는 우물 주위에 시멘트 바닥의 등을 하얀 솔로 촥촥 때를 밀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앞집 할매..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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