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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호 - 정보라] 호의 편지

by 헌책방 2023. 8. 20.

[호 - 정보라] 호의 편지
 

 

 

너의 세상이 긴 우호라면.
그래서 우리의 세상이 만나는 찰나가 짧은 열호,
아니 그저 그 포물선 위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너의 우호가 아스라이 궁굴려져 어느 시간 위에 걸릴 때까지.
나는 이 원호 위에 있을게.
무수히 해가 뜨고 지는 어느 날들을 견디며.


 

 

순리. 이치에 맞게. 우주가 세계를 운영하는 대원칙에 들어맞는 방향으로. 어떤 일이 순리에 맞게 흐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언젠가 죽음으로 삶을 갚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순리에 맞게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도, 그 간단한 한 문장을 굳게 믿을 만큼 강인해질 수도 없다. 

무슨 생각으로 애한테 그런 것을 보여준거여. 나가. 다시는 오지 마. 새벽 한 시. 눈앞에서 쾅, 문을 닫아버리는 언니가 야속했다. 서른 즈음에, 댓살 먹은 조카들을 돌봐주며 잠깐이지만 언니 집에 얹혀사는 것도 서러운데. 그깟 <전설의 고향> 한번 같이 봤다고 밤마다 이불에 따뜻한 실수를 저지르는 딸을 저토록 걱정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가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작은 동네에서는 5살만 되어도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집까지 제 발로 걸어 다닌다. 2살 터울 동생은 씩씩하게 재미있게 눈 한 번을 안 깜빡이고 봤는데, 그 옆에 누워 있던 첫째 조카는 바들바들 떨면서 화면을 봤던 것이 떠오른다. 결국 그날 밤부터 며칠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게 약하게 키워서 되겠어? 문간으로 걸어오는 언니 발걸음 소리가 묵직해서 소금이라도 맞을까 그녀는 후다닥 계단을 내려왔다. 첫째 조카는 멀리 들리는 새 울음소리가 슬픔을 뜻하는지, 기쁨을 뜻하는지 같은 것들을 물어보았다. 아서라. 애가 벌써부터 그러면 못써. 애들은 신나야지 자고로. 그래서 트로트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같은 노래를 들려주다 언니한테 걸려서 된통 혼난 적도 있다. 그러다 예의 <전설의 고향> 사건이 났고, 아이는 상상력을 귀신이 자기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썼다.

 

오후에 잠깐 외출 했다 돌아오는데 계단서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 일단 현관에 귀부터 바싹 댔다. 언니가 엄마야. 다시는 어디 가지 않을게. 나래 혼자 두고 안 갈게. 괜찮아. 아무도 해치지 않아. 하고, 두 조카 모두 목놓아 울고 있다. 이야기인즉슨 잠깐 얹혀사는 아이들의 이모가 외출한 사이에 엄마도 장을 보러 나갈 일이 생겼고, 언니는 세상모르고 자는 첫째 조카는 두고 둘째 조카만 데리고 짧은 외출을 나간 것이다. 그 새 아이는 잠에서 깼고,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 쪼끄만 것이 눈을 뜨면 구미호가 보일까 봐 눈을 꾹 감고, 동그랗고 노랗게 방바닥에 공포의 흔적을 남기며, 큰길로 나서 사람들 소리가 나는 작은방 창문까지 기어가, 창문에 매달려 엄마를 부르짖은 것이다. 과일 트럭 아저씨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이가 떨어질까 봐 아이 엄마가 올 때까지, 창문 아래에서 계속 말을 시키고 달래며 아이를 지켰다. 언니는, 시간이 늦었다고 사정해서 내쫓지 않을 일이었으면, 애초에 사람을 쫓아낼 사람이 아니다. 이럴 거면 빨리 쫓가내지. 읍내에 아직 택시가 있을랑가. 초등학교 뒤편 골목길이 스산해서 그녀는 큰길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괜히 혼잣말했다.

 

늘 안전하다고 느끼던 시절, 아빠와 엄마가 만든 울타리 너머로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기껏해야 도깨비, 귀신, 망태기 할아버지 같은 존재들이었다. 기괴한 모습의 그것들이 실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오금이 저렸다. 물론 깜짝 놀래키고 무서움에 벌벌 떨게 하는 것이 어떻게 매력적인 문법이 된다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는 공포를 포함하는 이야기에 더 이상 벌벌 떨지는 않게 되었다. 귀신을 두려워하던 아이들이 자라면, 왜 더 이상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상상력이 조금씩 무뎌진 탓이 가장 클 것이고, 한 치의 의심 없이 실재하고 귀신보다 더 가깝고 생존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위험요소가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상상력이 물러난 자리만큼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 위협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포에 초연해졌다기에는 여전히 <악귀>나 <기묘한 이야기> 같은 작품을 볼 때 옆에 앉은 아현이를 물고 뜯고 난리 법석을 피우고 있지만, 공포감의 지속기간이 거의 하루를 넘지 못함을 인지하거나, 종종 혼자 <곡성>을 보면서 감상에 골몰하기도 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나 역시 이야기 안보다 밖이 더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유도 없이 누군가에게 폭언을 쏟아붓고, 서슴없이 옆을 지나는 행인을 칼로 찌르고, 독극물이 섞인 택배가 무작위로 전국에 흩뿌려지는 시대. 요컨대 실재가 확실한 존재들로부터 느끼는 공포 때문에, 미지의 존재 때문에 느끼는 공포심의 역치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는 미지의 존재 자체나 그것의 행위로 공포심을 자극하던 지난날의 공포소설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귀신, 괴물, 환영, 환각, 기괴하지만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늘 인간이 있다. 이 주인공들은 누군가를 저주하고, 자신 때문에 벌어진 현상에 무책임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남의 것을 빼앗고, 제 때 필요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오로지 욕심 때문에 쉽게 창조하고, 피조물을 폐기한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적이지 못한 짓도 서슴 없이 선택하고, 타인을 희생시키며, 웃는 얼굴로 신뢰관계인을 배신하고, 거짓말하고, 외로워한다. 그리워한다. 이런 인간들 틈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은 이야기가 기괴한 낯을 띄고, 현재와 역사상의, 혹은 근미래의 인간의 삶이 비현실적인 색채로 빛나는, SF 공포소설로 기능하게끔 만들지만,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그들은 메타포로 기능하여 인간들이 만드는 참혹한 현실의 일부를 가리고 판타지화함으로써, 표면적 공포가 증폭됨과 동시에 내밀한 공포가 시간차를 두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멀스멀 퍼져 나올 수 있도록 한다. 표면적 공포의 여운 끝에, 이야기의 민낯을 이해하면 서슬 퍼런 현실이 더 뼈 아프고, 피할 수 없어서 더 무서워지는, 내밀한 공포가 살금살금 스며들게 한다. 뒷맛이 찜찜한, 과학적으로 말도 안 되고, 현실에서 발생하기 어려운, 일반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의 이면을 짐작하다 보면 진짜 무서운 것들은 가까이에 있다는 감각이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무엇보다 불가해한 존재들보다 인간이 더 무섭고, 타인에게 상처 준 인간들이 결국 카르마의 칼날을 받는다 하더라도, 남은 인간들은 여전히 아직 남아 있는 무서운 인간들 틈에서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공포스럽다. 이 깨달음이 아름다운 겉모습으로 저주를 내리는 저주토끼보다, 발을 질질 끄는 할아버지 귀신보다, 모르는 아줌마를 엄마로 삼고, 엄마 대신 엄마의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꼬마 귀신보다, 더 소름 끼친다. 이를테면 정보라의 작품은 진진한 비극으로서의 현실을 조명하며,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는 공포를 자극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를 통하여 "존재의 사실성은 무상적"이며, 사람은 예견된 죽음을 앞두고 살고 있을지라도,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목적과 이유 없이 무상하게라는 방식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발걸음이야 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섬광처럼 사라질 것이나, 그전에 생존하고, 선택하고, 실존하고, 오늘을 살 것이다. 시몬이 인간이 어떻게 살지, 그 고독함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했다면, 정보라는 그 인간이 어떤 존재들과 상존할 것인지, 어떤 환경에서 실존할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인간의 선택적 숙명이 이토록 처연하고 두려울 수 없었다. 오랜만에 책을 덮고 오래 한기에 시달렸다.

 

<호>는 정보라 작가가 부커상 수상 후보로 이름을 올리면서 유명해지자 비로소 출간된 작품으로 <저주토끼> 보다 조금 덜 다듬어진 정보라 작가의 초기작이지만, 여전히 진진하고 비극적인 현실을 다루는 방식으로 비극이 언제든 '내 일'이 될 수도 있는 공포심을 자극한다. 본작에 등장하는 구미호는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지극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연민의 대상이다. 본작에는 두 가지의 곡진한 사랑이 묘사되고, 두 사랑은 서로 상충하는 방향으로 깊어진다. 손주를 향한 할머니의 깊은 사랑과 손주와 구미호의 깊은 사랑은 조화롭게 어울리지 못하고 서로를 깨문다. 사랑하는 손주가 구미호에게 홀렸다는 사실을 알아챈 할머니는 남은 기력을 모두 모아 손주가 구미호와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막는다. 구미호는 자신과 사랑에 빠졌다가도 불가항력적인 설정 때문에 결국 마법처럼 새까맣게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과의 사랑 이야기를 발설해 버리는 손주를 몇 번이고, 어떤 모습으로든, 계속해서, 사랑하고 만다. 마치 그것이 우주의 순리라는 듯이. 본 작은 자신의 이름이 잊히는 것, 자신의 의미가 지워지는 것, 누군가에게서 배신당하는 것, 약속이 파괴되는 것 같은, 자신의 실존과는 무관하지만 현대인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두려워하는 것들을 호의 사랑 이야기에 투사한다. 인간은 자신의 숙명을 선택한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 어떤 이름으로 살지 선택하며,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다하고자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적 자아가 무엇인지 깨닫는다. 인생은 인간이 밟는 그 긴 과정이다. 자신을 기억하는 것,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 자신의 이름을 지켜주는 것, 사랑이야기를 마음에 품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해야 하는 일임에도. 이 땅의 구미호들은 자신의 사랑이 그것을 해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극적인 사랑. 때로 어떤 사랑은 너무 깊고 지극해서, 미련하게도 스스로 비극으로 치닫는다. 본 작은 슬픈 사랑 이야기의 외형을 하고 있고, 너무 슬픈 사랑은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본작의 핵심이 되는 것은 현대인의 내심에 파고들어 공포심을 자극하는 슬프도록 무서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나로 남는 방법을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찾는 이상, 폐곡선인 세상 안에는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긴 우호가 된 세상에 오목하게 사랑이 고이고, 그 끝을 알면서도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호(弧) 위를 달리는 호(狐). 우리가 꿈꾸는 순리는 정해진대로 흘러서 닿는 것이 아니라 선택했기 때문에 가 닿을 수 있는 둥근 꼭짓점이다.



희생자(犧牲者). 뉴스를 틀어놓고 샤워를 하는데 이미 유명을 달리했거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 앞에 있는 아까운 생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3분만에 지하차도를 가득 채워버린 빗물과 뻘 속에 갇힌 사람들, 그 차가운 순간에도 타인을 살리기 위해 내민 손들, 그들을 찾으러 침잠했다가 돌아오지 못한 젊음, 오래 이뤄지길 꿈꾸고 준비했을 목표 끝에서 스스로 선택한 참담한 결말, 좋은 어른(먼저 선 先, 날 생 生)이 되고 싶었던 이들의 좌절, 부지불식간에 휘둘러진 칼 끝에 피로 맺힌 일상의 파훼. 전설이 깃든 고향인지, 고향에 깃든 전설인지에 억울한 죽음들은 어떻게 해결됐을까. 나를 보고 웃는지, 우는지, 얼굴에 돋은 수많은 주름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던 구미호는 어디에 깃들었을까. 한 맺힌 복수로 억울한 죽음이 해결되면 우리 삶은 그가 억울했던 만큼 나아지나. 한 맺힌 복수를 미결로 쌓아 놓으면 우리는 이 폐곡선 밖으로 나갈 수 있나. 참담한 일화 끝에 교훈이 흘러나오는 화면을 들여다보며, 솜털을 오소소 세우고, 저러지 말아야지. 저러면 안 되는 거지. 벌 받는 거지. 중얼거렸던 사람들은 그때의 결심 앞에 떳떳하게 살고 있을까. 전설의 고향 이후로는 그 어떤 고향의 전설도 전설의 고향도 없었던가. 우리는 순리를 타고 어디로 흐르는가. 아니, 애초에 우리가 이 운명을 선택했던가. 그저 흐르는 대로, 출발점으로 다시, 실려오지는 않았던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선택했던가.



이모가 보여줬던 전설의 고향보다, 나는 발디딘 현재가 두렵다. 실로 오랜만에, 마음에 공포가 찬다. 책을 덮으며 슬퍼하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했던 모든 것들이, 이토록 짧은 시간만에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것이. 이 관성이. 그렇게 만드는 현실이. 거기에 적응하고 굴복한 스스로가. 못 견디게 무섭다. 책에 인덱스를 붙이고 잠깐 멈춰 그 의미를 생각하며 소름 끼쳐했던 모든 순간이, 몇 번이나 반감기를 거쳐 벌써 희미해진 것이 못 견디게 슬프다. 김은희 작가의 신작 <악귀>는 인간들이 저지른 일이 악귀가 벌인 일들만큼이나, 그리고 가끔은 그보다 더 참혹하다는 점을 조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이들이 그 사실에 고개 끄덕이는, 서글픈 시대에 살고 있다. 범인을 잡는 것이 우리 일이야.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악귀보다 더 순수한 악에 가까운 악인을 찾아 정의는 내달린다. 내 이름을 맞춰봐. 원혼은 그의 이름을 찾아줘야 이 땅을 떠날 수 있다. 나를 기억해줘. 자신을 잃은 구미호는 사랑 말고는 기댈 곳이 없다. 코다(coda) 없는 도돌이표 속에서 다시 사랑으로, 몇 번이나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구미호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렇게. 모든 사람은 혼자다. 그러나 혼자만은 아닐 시간을 주가 긴 폐곡선 안에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 사랑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은 내용이고 힘이지 존재의 목적일 수는 없다. 삶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동시에 사랑 없는 삶은 순리에 가 닿을 수 없다.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여우는 지독한 딜레마와 싸운다. 그녀가 인간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사랑이지만, 그녀가 인간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연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호가 편지를 쓴다. 부쳐지지 못한 편지를 몰래 읽는다. 비극적인 소식을 쏟아내던 휴대폰은 멈췄고, 나는 철저히 네모 박스 안에 혼자였다.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온몸으로 물방울을 맞으며 그 쓸쓸함을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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