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와 트리 - 우다영] 기묘한 이야기
아니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언니야. 언니가 어떤 소설을 쓰거나, 어디선가 읽은 소설을 리뷰한 것이 아니라, 언니가 겪은 일을 쓴 거라고? 그 와중에 책 이야기도 쓰고? (직전 포스트인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의 리뷰 [그래, 나는 코끼리다] 참조) O는 카톡으로도 똥그랗게 뜬 눈이 떠오르게 하는 말들을 하더니, 직접 만나서도 내 예상이 정확히 맞았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녀를 그만큼 잘 안다는 것을 증명이라고 해주고 싶었는지, 같은 온도의 경악을 온몸으로 되풀이했다. 언니야 아이고. 고생했다, 정말. 연말에 무슨 일이야. 잠시 후 O의 집에 들어선 L 언니는 문을 열자마자 예쁘고 참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쏟아냈다. **, 이게ㅇ 무슨 일이여. * 같은 ****들한테 걸려서 뭔 고생이야, 날랭아. 너는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책을 써. 그리고 그 순간 나는 U를 둘러싼 그 기묘한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인하여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얼마나 따뜻한 이들인지 생각했던 순간이 다시 나에게 오는 것을 가만히 느꼈다.
자신도 충격에 휩싸였을 텐데 따스한 위로와 걱정을 건네며 내 마음의 안위를 확인하는 친구들의 연락으로 긴 새벽을 보내고, 폭풍 같던 크리스마스 전후가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비극이 태동한 문래에서 K와 J를 만난 날이었다. 그녀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무정형에 남아 마감 때까지 위스키를 마시고 호텔로 돌아가면서, 그들을 용서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머리칼을 잡아당기던 그 사고의 기억이 다시는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이야기는 구원이다. 그러나 구원은 늘 따뜻하고 아름다운 형태로만 찾아오지 않는다. <아가씨>의 숙희는, 아가씨를 파괴하러 아가씨에게 온 단 한 명의 구원자다. 어떤 이야기도 비극 혹은 희극과 같은 한 가지 종류로 정의 내리기 어렵다. 우리 삶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야기지만, 이야기가 지나고 나면 사람들만이 남는다. 이야기는 알맹이만 남아 사람 안에서 살아간다. 나는 비극적인 저주가 산산이 부서져 내 안에 남는, 처연한 밤 속에 있었다.
예스 24가 젊은 작가의 요즘 최애에 대한 이야기를 단편으로 엮은 최근담 시리즈의 최근작 우다영의 <이브와 트리>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이야기로 누군가는 구원 받기도 하고, 어떤 악의는 부지불식간에 태어났다 멸하기도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그 지독한 저주의 이야기도 까맣게 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생을 만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술집에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주인공은 동창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는 주인공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주인공이 단짝이었던 그를 어느 순간 매몰차게 대했고, 어린 마음에도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스스로를 탓했다고 이야기한다. 주인공이 전학 간 이후로, 그는 아버지의 재산 부정 축재, 어머니의 불륜이 알려지는 등 안 좋은 일이 순식간에 찾아오자 주인공을 탓하고 나아가 저주를 걸었고, 이후로는 끊임 없이 사소한 안좋은 일도 주인공 탓을 하며 저주를 했다고도 말한다.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불행한 일을 겪을 때마다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저주를 받고 그럼으로 인해 상대를 구원했던 것을, 자신도 습관적으로 저주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하던 동창을 떠올린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 후로 주인공에게 사뭇 다른 의미가 된다. 넷플릭스의 화제작 <더 글로리>과 같은 악마들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채 악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꽂혔던 수없는 악의를 끝없이 생각하면서도, 주인공은 동창을 저주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이야기할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내 손으로 베일을 벗겨 두 눈으로 확인했던 악의 가득한 거짓말들을 생각한다. 그 이야기는 나에게 여전히 악몽이고, 상처이지만, 동시에 산산이 부서져 몇 조각 남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악의(나쁠 악 惡, 뜻 의 意)의 의미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는 그 악의들이 U와 C가 철저한 의도한 바가 아니라 일종의 사고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기댈 곳 없고, 온전한 믿음과 사랑이 부재하는 삶이라는 외로운 투쟁에 얼마간은 구원이 되었다고 믿는다. 다시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아니 에르노가 그녀의 작품에 쏟아내듯이, 어떤 이야기나 마음들은 단어로 쌓아 올리는 글로 축조되어야만 한다. 이야기는 지나갔고, 나는 남은 사람들과 함께, 내 안에 남은 이야기를 품고 살아갈 뿐이다. 동은이의 선택을 이해하고 함께 슬퍼하면서도, 그녀가 선택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것이 나의 복수다. 그리고 글쓰기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나의 방식이다.
이미 글로 상황은 다 알았던 터라 L 언니와 O는 디테일을 새삼 묻지 않았다. 다만 슬퍼했고, 화내주었으며, 놀라워하고, 다시 슬퍼했다. L 언니, 나 이제 비혼주의하려고요. 날랭아 너 비혼주의 아니었어? 나는 너 비혼주의인거 진작 알았는데? 벌써 그 기억을 떠올리며 깔깔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기억의 틈 바깥 쪽으로 기민하게 빠져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부서진 마음을 그러모아 나아갈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K, J, 세균맨, 코끼리, H, M, O, L 그리고 이 이야기를 지켜 본 모든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크리스마스. 라는 마음을 주고 받은 모든 이들에게 어찌나 감사한지 모른다. 나 또한 함께할 수 있는 사람, 이야기, 구원이 되기를 기도한다. J가 사 온 조각 케이크에 꽂혀, 활짝 웃으며 활활 타는 잔망스러운 초처럼, 우리는 웃으면서, 활활 타면서 살자. 인간은 기묘한 이야기를 쓰고, 부수고, 품고. 이야기의 지평선 너머로 나아가 오늘을 산다. 필멸의 존재라는 나약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을 산다. 이 역시 참으로 기묘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기묘한 이야기의 흔적도, 우리는 마음에 품고 오늘을 살아가겠지.
리뷰에 등장하는 사진 속 장소에 대하여
리뷰에 등장하는 J와 K를 문래 무정형에서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위스키를 즐기면서 함께 대화하기 좋은 장소예요!
마무리하며
용서하고 사랑하는 한 해를 다짐해요.
리뷰 100자 요약
인간은 기묘한 이야기를 쓰고, 부수고, 품고. 이야기의 지평선 너머로, 필멸의 존재라는 나약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을 산다. 이 기묘한 이야기도 마음에 품고 오늘을 살아가겠지.
별점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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