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 레이먼드 카버] 그래, 나는 코끼리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두고 실험카메라를 찍는 줄 알았어. 너는 도대체 뭐 하는 ***니? 전화기 너머 U는 묵묵부답했다. 그가 그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나로 인해 들키기 전에도 그는 늘 조용했다. 대답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서, 여백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 해오고, 상황을 조정해왔던 사람이다. 그의 침묵은 시인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과는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그를 둘러싼 모든 사실이 거짓말인데, 도저히 그의 사과를 진심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U와 친구로 지낸 지 3년. 나와 U가 잘 맞을 것 같다면서 친구로 지내는 것을 적극 장려했던 다른 친구는 U와 친구로 지낸지 5년도 넘었다. 그날 새벽 나는 일기장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적었다. 인친들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피드에 (상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략) 메리 크리스마스.-물론 상략과 중략이라고 표기하는 것은 생략했다- 라고 써보냈다. 물론 나는 U와 친구로 지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U는 긴 세월 자신과 타인들을 속여오다, 마침내. 자신이 선택한 연인의 손으로 정체를 고발당했다.
나는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다. 기억력은 말할 것도 없이 뛰어나다. 순간적으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도, 눈을 감고 기억이 적재된 도서관을 뒤져 사진처럼 또렷한 장면으로 기억해 내고야 만다. U의 정체를 의심한지는 꽤 오래됐다. 그는 또래의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재정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이었고, 그 근거라도 대듯이 특이한 이력과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거짓말을 잘 해낼 만큼 똑똑하거나 중간에라도 사실을 고백할 만큼 영민하지는 못했고, 물질적으로 공세를 거듭한다고 해서 그의 거짓과 비겁함은 잘 가려지지 않았다. 종종 그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과거에 얘기했던 사실과 미묘하게 어긋나고는 했고, 그것이 나를 힘들게 했다. 일관성이 없는 것은 기어코 의심하고 조사해서 납득해야 하는 것. 아마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U가 나와 그가 동시에 아는 친구들에게 그와 내가 교제 중이며 결혼도 고려하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거짓을 이야기했을 때도, 나와 그가 교제 중이 아니라는 사실이나 설사 그가 나와 교제 중이라고 착각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 고려하더라도 나와 합의 없이 교제 사실을 밝힐 권리가 없다는 사실-K와 2년간 교제할 때 일부 친한 친구들조차 그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사생활 공유에 조심스러워하는 편이라 이 사실도 물론 불편하긴 했지만-보다, 그가 긴 세월 비혼주의를 고집하였다거나 오래 교제한 남자친구가 있는 C를 오래 짝사랑해왔다는 사실이 그와 내가 결혼을 전제로 하는 연인이 된다는 사실과 미묘하게 어긋난다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C는 남자친구를 속이고 U와 밀회를 거듭했었고, 그 이유로 나는 C와 U를 멀리했으며-당시 나는 연인 K에게 두 사람을 험담하기도 했다. C는 U를 통해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는 했고. 후일 기회가 된다면 더 자세한 상황을 글로 이야기해 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관계는 엉망진창이었다.-, 때문에 U가 C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다고 이야기하며 나에 대한 마음을 고백해왔을 때도 이 관계를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요컨대 이 일은 일관성 때문에 사건화 되었다.
누군가는 U와 내가 교제하게 된 계기가 어찌 됐든, 내가 U의 경솔함을 용서하고 그의 여자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변함 없고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였으나, 나는 나름대로의 수사를 계속했다. 그가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했던 토지의 등기부등본을 떼어 소유자를 확인하고, 그가 다니고 있다고 말했던 회사에 컨택하여 그가 실제로 그 회사에 재직 중인지 확인했다. 등기부등본에는 그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고, J사에는 동명이인이 재직 중이었지만 그와 인적 사항이 달랐다. 그를 함께 알고 있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려 그동안 그에게 설명을 요구했을 때마다 애매한 침묵으로 설명 받아야 했던 불가해한 지점들의 디테일을 확인하고, 그 디테일이 내가 아는 것과 상이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그의 가방에 늘 고전이 두어 권 들어 있고, 영화를 보고 그 내용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핏대 세울 줄 알며, 사람이 많은 바에서도 눈을 감고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인 것이 좋았지, 그의 통장 잔고나 스펙 따위는 애당초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새벽, 그에게 깜빡 몇 년을 속아왔던 친구들이 모인 카톡방에서, 나는 U의 거짓된 삶을 고발했다. 그가 불쌍했다. 거짓말로 점철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삶의 무거움을, 자신마저 속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자기혐오를 동정했다. 마지막 통화에서 U는, 건성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고, 말을 할 때보다 침묵할 때가 더 많았다. 아, 그동안 그는 침묵할 수 밖에 없어서 침묵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지난 우정의 세월 동안 U에게서 침묵의 힘과 필요성에 대하여 배웠다. 인생이 지독한 농담과도 같다지만, 이토록 고약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U는 조지 엘리엇이나 안톤 체호프, 그리고 무엇보다 피츠제럴드의 작품에 대해서 격렬한 대화를 하다가도, 일순간 입을 다물고 빙그레 웃고는 했다. U는 말 없이도, 손등을 가만히 두드리는 조용한 행동 같은 것으로 대화를 이끌어갔고, 공백으로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듣지 않고도 스스로 듣도록 만들었다.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완성 되기 마련인 대화의 긴장감이 그의 침묵으로 완성 되었다. 지금 와서야 그것이 침묵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따라서 U의 의도에 따른 여백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분명 그를 통해 가끔 쉼표를 찍는 것이, 하고 싶은 말도 덜어내는 것이, 대화의 속도와 조도를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이라는 점을 배웠다. U의 침묵을 생각하면서, 우습게도 레이먼드 카버와 안톤 체호프를, 세기의 대작가들을 떠올렸다. 나는 말하기와 글쓰기에 있어서 맥시멀리스트에 가까운데, 특히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적정한 침묵의 중요성을 배웠다. 아직도 필요하지 않은 말을 덜어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야기를 다듬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진다. 그 깨달음을 U를 통해 반추하다니 어이 없는 웃음을 터뜨리는 속이 쓰리다.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은 국내에 아직 공개되지 않았던 단편들을 포함하여, 총 11편의 카버의 단편을 모아 엮은 단편집이다. 본 단편집을 구성한 단편들에는 앞뒤의 상황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절제하고 현 상황만을 거울에 비추듯 리얼하게 그려내는 카버 특유의 리얼리즘이 여실히 드러나면서도, 신경질적이고 때로는 난폭하며, 대화로 드러내기보다는 침묵으로 감정을 숨기는 인물들이 주를 이룬다는 점이 돋보인다. 또한 생략과 침묵의 미덕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많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물론 단편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두드러질 수 밖에 없는 요소지만, 꼭 필요한 순간에 대놓고 생략하기도 하고 말 줄임표로 침묵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신경질적인 인물들이 만드는 미묘한 갈등을 긴장감 있게 묘사하는 점이 인상 깊다. 물리적으로 침묵을 표현하는 말 줄임표가 더 우회적인 표현으로, 대놓고 생략하는 방식이 더 직설적인 표현으로 느껴지는 것도 새롭다.
특히 본 단편집의 마지막 작품으로 실린 <심부름>은, 톨스토이가 일기에 "기쁘게도 체호프를...... 사랑한다"라고 썼다고 표현하여 말 줄임표에 놓일만한 기쁨 혹은 사랑한다는 감정에 대한 이유와 배경 상황을 상상하게 하거나, 죽음을 앞둔 체호프와 그의 아내 그리고 주치의가 나누는 대화를 무음에 가깝도록 생략하여 체호프의 죽음이 등장인물들 뿐만 아니라 작품 바깥에 놓인 독자에게도 갖는 무게를 표현한다. 더불어 "오직 아름다움, 평화, 그리고 죽음의 장엄한 뿐이었다." 와 같은 짧고도 근사한 표현으로 침묵과 생략의 힘과 깊이를 체감하게 하기도 한다. 카버는, 체호프의 임종 후에 체호프의 아내 올가와 그저 방을 정리하러 온 호텔 벨보이 사이에 대화를 의도적으로 절제하여 슬픔에 젖은 올가와 영문 모르고 당황해하는 호텔 직원이 분명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없는데도 대치 상황에 놓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고, 예의 직원이 심부름 가는 과정에서 흐르는 침묵으로 체호프의 죽음을 둘러싼-이미 작중에서 체호프는 명백하게 사망하였는데도!-긴장감을 조성하는 등, 단편이 갖는 필연적 특성이자 한계를 유려하게 활용하며 극복한다. 특히 본작은 체호프의 말년을 묘사하고 있어, 미국의 체호프라는 카버의 수식어에도 절묘하게 호응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에게 오랜 기간 동안 큰 의미였던 체호프를 오마주하고자 체호프의 죽음을 주제로 본작을 쓰고, 이 작품이 그의 생애 마지막 단편이 된다. 물론 작품 안팎의 공교로운 속 사정을 모르더라도,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아메리칸 체호프인 카버가 체호프의 고통스러운 죽음과 죽음 후의 절차를 묘사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짐작하게 되고, 이내 영문도 모른 채 장의사를 부르는 심부름을 떠난 호텔 직원만큼이나 불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단편이라는 특성과 연결 지을만한 특질도 대단하지만,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은 리얼리즘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자랑한다. 대표작 <대성당>은 퓰리처상 후보에 오른 바 있기도 하다. 카버의 작품은 체감상 한뼘정도 밖에 되지 않을 좁은 구역에서 벌어지는 일반적인 사람들의 일반적이지 않지만 여전히 일상의 범주 안에 놓여 있는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공간적, 시간적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와 행동이 지극히 사실적이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작품의 구체적이고 특정한 단면을 세심하게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섬세한 공감 덕분에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가 독자가 몸담은 현실에 맞춰 변모하여 전달된다. 독자가 작품의 세부적인 내용을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따라서 깊게 공감할수록 글 또한 능동적으로 독자의 상황에 들어맞게 되며, 독자가 인물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듯이 작품 또한 독자가 처한 사실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세심하게 어루만질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게다가 침묵과 생략이 낳은 정보의 부족은, 안 그래도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인물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을 느끼는, 호텔 직원을 비롯한 체호프의 작품들 속의 일부 인물들과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 모두로 하여금 불안감, 불편감을 갖게 한다. 불안감의 전이. 독자는 어떤 형태로든, 어떤 감정이든, 작중 인물 누군가와는 반드시 그야말로 공감대(한 가지 공 共, 느낄 감 感, 띠 대 帶 / 서로 공감하는 부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상자들>에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의 모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언행이 현실에 있을법한 형태로 전개되면서, 꼭 모자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족과 애매한 관계에 놓여 있거나, 가족이 아니더라도 타인과 본작의 모자와 비슷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독자라면, 등장인물들이 겪는 불편함에 공감하고 몰입하거나, 작품이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작중 어머니는 아들이 권하지도 않았는데 아들이 살고 있는 소도시로 이사 오더니, 하나 둘 불평을 늘어놓다가 이내 매사를 불평하게 된다. 모자의 모든 대화는 불평으로 이루어지기에 이른다. 어머니는 하루도 더 견딜 수 없으니 곧 캘리포니아로 이사하겠다면서 상자들에 이삿짐을 싸지만, 이사는 떠나지 않고 몇 달이고 이사를 미룬다. 그렇다고 이삿짐을 도로 풀지도 않아서, 상자들을 집안 곳곳에 전시한 채로 생활한다. 카버는 싸우기에도, 그렇다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지내기에도 애매한 상황을 소름 끼치도록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특히 자동차 오일을 가는 이웃, 앞집의 현관 전등 등 주인공이 경험하는 바까지 상세하게 묘사하여, 독자가 이 이야기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라디오에서 듣는 '사연' 한 토막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반응하게 한다. 주변에 사사건건 불평을 늘어놓거나 남의 험담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면, 작 중 모자관계와 비슷한 관계 맺기를 해본 적 없는 사람이라도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이나 며느리의 입장에 몰입할 수 있다. 사실적일수록 공감 가능한 범위가 넓어지는 것이다. 카버의 작품에서는 <블랙미러> 시리즈를 보는 듯한 불편함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분노의 포도>처럼 실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리얼리즘이 두드러지고, 이 특징이 카버 특유의 문체와 침묵의 방식과 조응하며 상황을 관찰하는 독자의 몰입도를 극강으로 유도하면서 강력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본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형식과 분량 탓도 있겠으나 이러한 특질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본 단편집은 카버 식의 리얼리즘이 낳는 공교로움과 생략과 침묵의 미덕을 여실히 드러내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종종 내 일상이 시트콤 같다고 농담하고는 하지만, <리플리>, <화차>와 같은 상업 영화급의 막장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산다. 그것도 기쁘게 혹은 행복하게. 크리스마스에는 Merry, 신년에는 Happy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 본 단편집에 수록된 <코끼리>에는 엄마, 동생, 딸, 아들, 전 아내에게 은행에서 상환 능력 이상으로 대출 받으면서까지 돈을 송금해야 하는 아들이자 형이자 아버지이자 전 남편인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매번 더 큰 돈을 송금해달라고 하는 동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창밖을 내다보고 소매로 얼굴을 닦는다. 그는 막다른 길에 내몰려있고, 그것을 가족들이 전혀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그는 꿈에서 아버지와 만나고, 목말을 탄다. 그는 아버지가 코끼리 같다고 생각한다. 꿈에서 깨어 아침 출근길에, 남자는 자신의 주변 사람 모두가 행복하기를 기원한다. 그는 그의 고유하고 단일한 권한으로, 그를 막다른 절벽으로 내몬 이들을 용서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출근 중이던 직장 동료를 만나, 그의 차를 얻어탄다. 동료는 아직 값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차를 정비했고 그 결과를 남자가 경험하길 원한다고 말한다. 남자는 동료에게 달리라고 말하고, 자동차는 죽자 사자 달려간다.
나의 말 줄임표는 여기서 끝난다. 복수나 용서는 넓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처분의 권한, 힘에서 온다고 했던가. U의 정체와 U와 C의 부적절한 관계를 고발했던 새벽, C는 즉시 그리고 담담히 전화로 사과를 전했다. U와 내가 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만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는 점. 그리고 긴 한숨. 공허한 침묵 속에서 C와 나의 관계는 종말을 맞았다. C와도 친구로 지낸 지 3년. 친구보다 지인에 가까웠지만, 나에게 그녀는 종종 전화해서 안부를 물어오고 10월 참사 때 걱정 섞인 카톡을 보내오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떤 친구들은 내가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을 속여 왔던 U와 남자친구와 친한 언니(나),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속이며 U와 내연하였던 C의 배반을 용서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아니 에르노의 <집착>을 읽고 쓴 리뷰 <그러나 사랑으로>에서 이야기했듯이, 나는 바람 피우는 족속은 곁에 두지는 않는다. 내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고, 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연애 속에서 바람 피우는 친구들도 예외 없다. 내게 그들을 용서할 권한이 없으므로 별다른 도리가 없기도 하다. 실제로 남자친구를 두고 다른 사람과 연애한 L과 K와 더 이상의 친구 관계를 유지하지 않기로 마음 먹고 일부러 멀리하다, 자연스럽게 인연이 매듭지어진 적도 있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그런 강경했던 태도를 후회한 적도 있긴 하다-. 그러나 나는 C의 한숨 섞인 침묵에서 U의 침묵을 발견했다. 그 여린 속살을 발견하는 순간, 그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나는, 나에게 권한과 힘이 있고, 나란 인간은 그들의 배반이 나에게 유의미한 생채기를 남길 수 없을 만큼 단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게 주어진 최대한의 권력을 사용하여 그들을 용서했다. 잘못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고, 가능한 따뜻한 태도로 조언하고, 너저분하다 할 만큼 엉망이 된 상황을 정리하고, 카버의 소설 속 불편한 리얼리즘처럼 공교로워진 관계를 매듭짓는 것. 내게는 그 이상의 권한은 없었다. 내게 권한이 없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 일들, 예컨대 U가 속여 온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 U가 사과하는 일이나 C가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속죄하는 일 같은 것에 개입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월권이었다. 권한 없는 영역에서의 용서는 하지 않은 것이기도 했고,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슬프게도 나는 아직도 U와 C를 염려하고,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던 거짓말이 사라지면, 삶의 행로 위에서 세게 넘어질까 걱정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계속 개입하는 것 또한 나의 권한 밖에 있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이 자신 그대로를 발견하고, 안아주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그들 그대로인 채로 오늘을 살아가길, 그저 기도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 잘 살면서 갚으라는 말,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잘 지내라는 말은 진심이다. <코끼리> 속 남자와 달리. 나는 양팔을 뻗고 겨우 균형을 잡지 않고도, 동료의 차에 올라 쏜살같이 길을 내달리지 않고도. 나의 오늘로 돌아왔다. 그러니 나도 잘 지낼 테니 이제 그만 미안해하라는 말도 진심이었다. 말줄임표 사이에 끼인 그 긴 이야기를 이토록 짧게 벼려 카버의 책 사이에 책갈피로 끼워 넣는다. 영영 잊고야 만다. 그래, 나는 코끼리다.
C와 U에게
* 그러니 U와 C가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부디 잘 지내길. 자신을 있는 힘껏 사랑하며 살길 기도한다.
* 특히 C에게. 마음이 흔들려 힘들고, 자신이 미워질 때 연락하라고 했던 말도 진심이니, 힘들 때 연락하기를.
* 모두 새해 복 많이 받고.
책을 읽은 장소에 대하여
연말을 맞아서 글래드 여의도에서 북캉스를 했습니다.
책 읽기에 너무 좋아요. 책상도, 침대 옆에 달린 북스탠드도, 조도 조절이 잘되고 조도 자체도 너무 좋아요.
커튼 걷으면 들어오는 자연광에서 책 읽기도 딱 좋아요. 가습기 신청하면 가습기도 따로 주니까 꼭 신청하세요!
사진과 글은 인스타그램 seol_vely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
행복한 겨울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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