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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12

[서울의 봄 - 김성수] 우리는 나아간다. 기억함으로써. [서울의 봄 - 김성수] 우리는 나아간다. 기억함으로써. 나는 실제 인구가 3만 명 남짓 되는 작지만 아름다운 고장에서 자랐다. 나와 세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랬듯이, 우리 (초, 중, 고등) 학교는 늘 가던 곳으로만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강천산에 오르고, 금산에서 꽃을 보고. 물론 당시에는 지겨워했지만, 지금은 기억이라는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씬으로 남는 자연의 장면들이다. 가까운 대도시가 광주였던 탓에 광주로도 현장체험학습을 많이 갔는데, 그 시절 내가 보고 느꼈던 대부분의 것들이 아름다운 것이었던 반면, 광주에서의 현장체험학습에서 본 것들은 강산이 한번 하고도 반 넘게 바뀌는 시점까지도 가장 참혹한 장면들로 남아 있다. 광주(光州)의 5월이 유독 찬란한 것은 비참한 역사의 틈 사이로.. 2023. 12. 15.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크리스토퍼 놀란] 느린 기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크리스토퍼 놀란] 느린 기적 인사부서에서 일하게 된지 벌써 9개월이 되었다. 모든 업무에 있어서 예외적 허용 범위가 극히 좁고 따라서 인사관리가 유연하지 않은 조직특성상 내게 부여된 권한 또한 그 크기가 크거나 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300여 명의 성과급, 근평, 전보, 부서배치 등의 인사관리를 거의 전담해 왔다. 그렇게 아홉 번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 동안 지켜본 것은, 지난 30여 년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어떤 일상보다 어둡고 차갑다. 나는 성선(성품, 타고난 사람의 천성 성 性, 착할, 어질 선 善) 설을 오래 믿어 왔고, 현실의 대부분의 비극은 느슨한 연대와 부정의(아닐 부 不, 바를 정 正, 옳을 의 義)에 꾸준히 저항하는 지구력으로 상당 부.. 2023. 11. 20.
[인셉션 - 크리스토퍼 놀란] 일상은 운명보다 위대하다 [인셉션 - 크리스토퍼 놀란] 일상은 운명보다 위대하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파가니니, 베토벤 같은 악성( 樂聖)이 되고 싶었고, 스즈키, 하농, 체르니 같은 기본 교재로 연습할 때 유독 심하게 짜증을 부렸다. 서울로 콩쿠르에 나갔던 날, 턱에도, 여린 손가락 끝에도, 굳은살 한 점 박히지 않은 하얀 아이가 1등을 거머쥐는 것을 보면서, 나는 평생 2등에 머물 것임을 깨달았다. 음악가로서 원대한 업적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선택한 꿈은 검사였다. , 의 주인공들처럼 억울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법률가가 되고 싶었고, 큰 사건만 도맡아 해결하는 대단한 검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에 진학하던 해에 로스쿨이 도입되었고 가까스로 2학년 때 법학과를 복전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우여곡.. 2023. 6. 9.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록 생생한 침묵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록 생생한 침묵 엄마 아빠를 담은 사진이 평일 낮 가족 메신저 방에 알람을 울린다. 오 뭐야. 어디갔슈? 했더니 딸들과 막내아들을 두고 놀러 다녀왔다는 미안함이 자뭇자뭇 묻어나는 설명이 이어졌다. 오, 아빠 그때 산 옷 입었네. 신발도 내가 사준거고. 고딩도 아니고 꼬까옷 맞춰 입고 놀러 간 거네. 귀엽당. 괜찮다는 마음을 에둘러 전하니까, 엄마가 개인 톡을 보내왔다. 구. 곡. 순. 담. 백세잔치라는 행사가 있어. 그 언젠가 순창에서 백세잔치 행사가 있었지. 그때 엄마가. 커피 무료 봉사를 맡았지. 노인들 총출동이야. 막 여기저기에서 장농 좀약 냄새. 그때가 시월인가. 쫌 쌀랑했지. 커피가 얼마나 나갔는지. 계속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따르니까 한 손에 면.. 2023. 5. 3.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Whatever, Wherever, Whenever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Whatever, Wherever, Whenever 하나만. 하나만 줘. 기다란 손톱 밑에 까만 반달처럼 낀 때, 거친 손바닥 위에서 동글동글 까맣게 일어난 굳은살. 턱 밑에 불쑥 나타난 손바닥 앞에서 나는 욕지기를 참고 있었다. 하나만 줘. 붕어빵을 내줄 수는 없었다. 양갈래 머리를 흔들자 거지 아저씨 손바닥에 머리카락 끝이 부딪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볼 일을 보고 나온 엄마는 은행 정문을 떡하니 막고 대치 중인 딸과 아저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드려. 붕어빵 더 사줄게. 기름을 먹어 얇아진 하얀 봉투를 부시럭 부시럭 구기며 붕어빵 한 개를 꺼내자, 나래야. 다 드리자. 엄마.. 2023. 4. 21.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 레이먼드 카버] 그래, 나는 코끼리다.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 레이먼드 카버] 그래, 나는 코끼리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두고 실험카메라를 찍는 줄 알았어. 너는 도대체 뭐 하는 ***니? 전화기 너머 U는 묵묵부답했다. 그가 그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나로 인해 들키기 전에도 그는 늘 조용했다. 대답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서, 여백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 해오고, 상황을 조정해왔던 사람이다. 그의 침묵은 시인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과는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그를 둘러싼 모든 사실이 거짓말인데, 도저히 그의 사과를 진심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U와 친구로 지낸 지 3년. 나와 U가 잘 맞을 것 같다면서 친구로 지내는 것을 적극 장려했던 다른 친구는 U와 친구로 지낸지 5년도 넘었다. 그날 .. 2023.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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