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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세이7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 7편 - 김초엽] 모호의 명확성에 대하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 7편 - 김초엽] 모호의 명확성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이를, 심지어 떠나가고 떠나온 이들까지 사랑하지만, 특히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며칠 전 날짜가 바뀌는 새벽의 틈에 지금 당신의 마음을 얘기해 주세요. 하고 카톡이 왔다. 종종 삶과 관계, 사랑과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단골 바 겸 식당 사장님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짓궂어져서 일기를 찍어 보냈다. 작은 방에 에어컨을 켜면 삽시간에 사방이 얼어붙는다. 책장 위에 다닥다닥 붙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책들의 표피에도 오도도 소름이 돋는다. 아 비로소 여름이구나. 이기적인 인간은 생각한다. 유치한 일기를 찍은 성의 없는 사진으로 답변을 대신하자, 그가 오늘은 슬픔에 잠기는 날이라고 고백했다. 사랑은 양.. 2022. 8. 2.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의 터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의 터 엄마는 이십오 년 동안 전업주부였다. 외 증조할아버지는 선비이자 지역에서 마지막 남은 서당의 훈장님이었고, 외할아버지는 공무원이자 부동산 투자에 탁월한 안목을 지닌 분이었다. 물론 엄마는 그 시절 여느 가정에서 흔했던 풍경처럼, 외삼촌과 세 명의 여동생들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했지만, 당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서울에서 잠시 일했던 순간을 빼고는 생계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스물 일곱이 되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교육을 갔다가, 어깨에 빵과 우유가 가득 든 상자를 짊어지고 선배들에게 그을린 팔을 내밀며 척척 간식을 배분하는 청년을 보았다. 얼굴이 낯 익어 청년에게 혹시 자네 나를 아는가. 했더니 청년이 학창 시절에.. 2022. 7. 29.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 황보름] 엉망이어도. 봄날의 곰만큼.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 황보름] 엉망이어도. 봄날의 곰만큼. 2020년 12월. 많이 아팠다. 하루 중에 울지 않을 때가 없었다. 부장님이 자리를 지날 때마다 말했다. 설프로, 힘들면 퇴근해. 쉬어도 괜찮아. 어디 많이 안 좋은 것은 아니지? 어머니는 괜찮으신거지? 매번 고갯짓으로 대답하는데도 그는 근성 좋게 눈물 흘리는 직원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9월, 몇 년 간 골치였던 위에서 뭔가가 발견 됐다고 엄마에게 전화하자, 엄마는 즉각 삼성병원으로 달려 왔다. 암센터 앞에서 엄마는 멈춰섰다. 너 암이야? 아니, 나는 암 아니고, 암 걸린 것도 아니야. 그런데 엄마 종양은 암센터에서만 제거할 수 있대. 2개월 간 가족 전부가 이 거짓말 작전에 투입 되었고, 배신감에 몸을 떨던 엄마는 결국 고집.. 2022. 6. 25.
[질투의 끝: 마르셀 프루스트 단편선] 사랑은 계속 되고 있다. [질투의 끝: 마르셀 프루스트 단편선] 사랑은 계속 되고 있다. 사랑은 아름다운가. 완벽히 서로 다른 존재들이 허공에 제각기 포물선을 긋다가, 맞부딪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찬란하고 아름다울지언정 늘 그러할 수는 없다. 그간 각자가 남긴 무상한 자취를 서로 인정하고, 다른 모양을 받아들이고, 맞부딪음으로 인해 변경될 항로를 전쟁 같은 토론으로 합의, 재설정하는 과정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다. 지옥 같은 다툼 속에서 맞부딪음의 인상은 강렬해진다. 눈부심을 이기지 못한 사람은 교차점을 지나 자신의 포물선 속으로 침잠한다. 남은 이는 긴 자취를 남기며 떠나는 그 뒷모습마저 사랑하고 응원한다. 사랑은 전투다. 스물에 만나 3년 넘게 연애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사랑이 닳아져 그가 먼저 권태기를 느꼈고, 나는 속수.. 2022. 6. 23.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 안시내] 잊은 것들은 잊힌 것이 아니라. / 북 에세이, 독서 일기, 북리뷰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 안시내] 잊은 것들은 잊힌 것이 아니라. 여름 무렵 순창의 날씨는 매시가 낯설다. 낮에는 가슴에 장류를 잔뜩 머금고 푹 익히는, 간장종지 모양의 분지 가득 뙤약볕이 나린다. 그러다가도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먹구름이 축축하게 금산에 걸리기도 하고, 여름 밤을 뚫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서걱한 한기를 한입씩 물어오기도 한다. 5월말, 선거운동이 한창인 작은 동네를 채우고 넘칠만큼 사위에 더위가 오도도 맺혀있었다. 아현이는 자꾸 손을 잡거나 몸을 바짝 붙이는 언니를 밀어내고, 언니는 11살이나 어린 작은 동생이 예뻐서 밀어내는 몸짓에라도 손을 붙이면서, 뙤약볕 아래를 걸었다. 아이스크림 살 걸. 배고파. 집에 가면 엄마가 갈비 가득 해놨다고 하니까 그것부터 먹는거다... 2022. 6. 14.
[불편한 편의점 - 김호연] 사라진 오래 남는 것들 / 북에세이, 북리뷰, 독서 일기 [불편한 편의점 - 김호연] 사라진 오래 남는 것들 사람의 기억은 이상하다. 이것까지 저장하니까 용량이 부족하지. 살펴 보면 한숨이 절로 새게 하는 가벼운 기억이 꽤 많다. 예컨대 펌프하면서 땀을 비오듯 흘렸던 전학 간 경수의 얼굴이라든지, 불콰한 얼굴로 오는 애들마다 새우깡 몇개를 나눠주시던 술꾼 세광슈퍼 아저씨라든지, 닭도 튀기고 슈퍼도 하는 오성슈퍼 냄새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오성슈퍼는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부엌에 꼬꼬 소리가 가득했고 수많은 생명의 죽음을 암시하는 커다란 칼과 도마로 쓰는 새까매진 나무 밑둥이 어쩐지 서늘하게 했지만, 닭을 튀기는 달콤하고 기름진 기름 냄새가 가득해서 따뜻하기도 했다. 닭 주문이 들어왔는지 사장님이 닭을 잡고 있는 순간에는 눈을 질끈 감고, 과자가 가득한 매대 사.. 2022.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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