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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의 터

by 헌책방 2022. 7. 29.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의 터

엄마는 이십오 년 동안 전업주부였다. 외 증조할아버지는 선비이자 지역에서 마지막 남은 서당의 훈장님이었고, 외할아버지는 공무원이자 부동산 투자에 탁월한 안목을 지닌 분이었다. 물론 엄마는 그 시절 여느 가정에서 흔했던 풍경처럼, 외삼촌과 세 명의 여동생들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했지만, 당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서울에서 잠시 일했던 순간을 빼고는 생계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스물 일곱이 되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교육을 갔다가, 어깨에 빵과 우유가 가득 든 상자를 짊어지고 선배들에게 그을린 팔을 내밀며 척척 간식을 배분하는 청년을 보았다. 얼굴이 낯 익어 청년에게 혹시 자네 나를 아는가. 했더니 청년이 학창 시절에 하던 활동에서 뵀다고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했다. 자네 결혼 안 했으면 내가 중매 설 테니 참한 규수 한 명 만나볼랑가. 청년을 쑥스럽게 좋다고 했다. 청년이 읍내에 몇 없는 깔끔한 다방에 나갔을 때 외할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데리고 나왔다. 참한 규수가 당신의 딸이었다. 그렇게 둘은 연애를 시작했고, 1년도 되지 않아 결혼식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엄마는 공무원의 딸에서 공무원의 아내가 되었다. 지금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공무원 월급으로 풍족한 삶을 유지하기 어렵지만, 나의 유년기 때만 해도 상황이 지금과 퍽 달랐다. 특히 시골에서의 삶은 풍족한 편이었다. 엄마는 아이 넷을 기르고, 작은 집을 알차게 꾸리는 데에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을 바쳤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하나 둘 서울로, 타지로 떠나 대학에 진학하고 살림이 나눠지자, 아빠의 벌이는 시원찮은 것이 되었다. 초조한 마음에 아빠는 큰 공부 없이 주식을 시작했다. 여러 이유로 쪼개 모아 놓은 통장이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엄마는 아빠 몰래 마트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달라진 것이 뭐가 있어. 부족한 것이 뭐가 있어. 일 나갈 필요 없어. 아직 당신이 그렇게까지 할 정도 아니야. 아빠가 내는 큰 소리에 엄마는 대답했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 당신이 벌인 일들 때문에 엄마가 마트로 내몰렸다고 생각했던 아빠는 놀랐다. 엄마의 취업 사유는 우리의 예상과도 영판 달랐다. 엄마는 내내 자유롭지 못했다. 작은 지역에서도 엄마는 자유와 꿈을 찾아 이직을 거듭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물은 끝에 청각장애인 지원 센터에 정착했다. 아빠는 어이 없어 했고, 우리 남매는 최고 가치가 사 남매였던 엄마의 변화에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지만, 엄마는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고 했다. 물론 돈도 벌어야 하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면 더 좋잖아. 짤막하게 덧붙이며 엄마는 무슨 색으로 염색했는지 보라색 머리칼이 가득한 파마 머리를 손질했다.



자유(스스로 자 自, 말미암을 유 由)란 무엇인가. 자유란 자신을 말미암아, 스스로 때문에 내리는 선택을 의미한다.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위해 내리는 선택을 의미한다. 그래서 엄마의 선언은 서운했다. 엄마는 반평생을 원활한 가족사의 운영에 구속 되어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살았건만, 그것을 잘 알면서도 내내 서운했다. 자유를 원한다는 말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괜스레 혼자 믿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가 자유를 원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소망한다. 그 소망의 칠 할은 시몬 드 보부아르 덕분이다. 그녀는 장 폴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하면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여자, 아내, 페미니스트이기 전에 사람이었다. 하나의 독립한 인간이었다. 자신이 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사르트르보다 더 대중에 가까운 언어로 풀어낸 실존주의자였다. 그녀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를 통하여 "존재의 사실성은 무상적"이며, 사람은 예견된 죽음을 앞두고 살고 있을지라도,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행위 그 다음은? 이 목적 그 너머는? 을 반복해서 묻다가, 돌아와 쉬지, 하는 대답이야말로. 목적과 이유 없이 무상하게라는 방식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발걸음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죽는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나, 그 전에 생존하고, 실존하고, 오늘을 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에센스를 얻을 것이다. 순전히 스스로의 힘과 결정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의 남편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하지만, 둘의 차이점은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녀는 예의 인간은 어떻게 실존할 것인가. 하는 논의에서 나아가, 인간이 실존을 이룩하고 그로 인하여 자유로운 상태에 도달했다면, 나와 타인의 자유는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 하는 윤리적 논의로 사유의 범위를 확장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인과 얽혀서 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엄마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의 존재에 구속 되어 자유롭지 않다고 느꼈다. 물론 맹세컨대-안타깝게도 아빠의 입장은 나와 다를 것이 자명하다-, 우리 남매는 우리의 자유와 편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엄마의 자유를 억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소통의 부족 때문이든, 엄마가 당신의 자유를 양보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이든, 우리 가족의 자유(편의)의 실현 과정에서 엄마의 자유는 억압 되었다. 보부아르는 자유 실현이 구속과 연결 되는 사실적 상황에 대하여 '애매성'으로 설명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운 존재며, 자유에 기반하여 실존을 추구하지만, 자유의 이면에는 타자의 억압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애매한 존재 상황이 유발 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도 서로 다른 대자존재의 자유가 양립하기 어렵다는 현실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으나, 보부아르처럼 윤리(도리 윤 倫, 다스릴 리理) 적 관점으로 존재적 상황을 분석하고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녀는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우연의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삶의 조건으로 결핍을 가질 수 밖에 없으나, 이것에 끊임 없이 투쟁하는 것으로 주체적으로 실존을 이룩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애매한 존재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관계에서의 결핍, 즉 타인의 자유와 실존이 나의 존재 상황을 규정하는 것을, 나의 자유를 부정하는 조건이 아니라 관계의 환경으로 받아들이고, 개인의 실존을 이룩하였듯이 그 결핍에 투쟁함으로써 자유의 양립을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게으른 자들만이 자유의 억압에 대응하고 애매성을 타개하기 위하여 폭력을 선택하므로, 결핍에 대한 투쟁과 서로의 자유를 존중하는 상호 주체적 관계의 성취에는 근면 성실한 태도와 이를 뒷받침하는 연대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모든 사람은 혼자다>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는 인간이 본질에 앞서 존재함 그 자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자문함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상태인 실존을 이룩하고, 이로써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획득하며, 나아가 공동체가 서로의 자유와 실존을 훼손하지 않고, 타인의 자유로 자신의 자유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 이상적 상태를 성취하기 위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윤리학의 특성상, 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모호한 개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음에도, 독해에 고도의 집중력과 강도 높은 고통을 요한다. 작품은 전반적으로 실체가 없고, 낯설며, 무엇보다도 어렵게 꾸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딘 독해 속에서 독자는 자신과 타인의 자유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성찰할 수 있고, 그러나 혼자만은 아닌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하여 고민할 기회를 얻게 된다. <모든 사람은 혼자다>로 보부아르가 능청스럽게도 물음표를 통해 나는 무엇이고 이 물음표에는 어떻게 대답하는 인간인가를 자문하게 했다면,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를 통해서는 안개 속에서도 똑바로 앞을 보고자 하고 서로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도 어떻게 (결국에는 또다시!) 사랑을 이룰 수 있는가를 자문하게 한다. 마치 이포를 가득 채운 안개 속에서, 망막에 인공눈물을 떨어트리며, 눈을 비비며, 찾고자 하는 것을 눈 앞에 두고도 헤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기투(꾀할, 도모할 기 企, 던질 투 投) 하는 <헤어질 결심>의 해준이 된 듯한 감각이었다.



엄마는 직장을 꼭 일터라고 표현한다. 일터는 어때. 하고 물으면, 정말 사는 것 같아. 하면서 막힌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표정을 짓고는 한다. 퇴직해서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와 거실에서 보내는 아빠는 이제 엄마에게 일터에서는 늘 성실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한다. 얇은 난닝구 아래로 배를 뽈록 내밀고, 팔베개를 한 채로 엄마에게 요즘 일터 사람들이랑 관계는 어떻냐고 묻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현재를 초월하며 미래에로 자신을 내던지는 자세, 즉 기투로 실존한다고 했다. 존재는 존재했던 순간마다 자신을 기투했고, 기투하였으므로 현재를 존재하며, 기투하면서 존재한다. 보부아르는 인간은 인류 같은 대단위가 아니라 나와 관계 맺고 있는 가까운 존재들과의 연대 속에서, 연대를 이루는 이들의 자유의 확립으로 비로소 자유를 확립한다고 주장했다. 엄마는 기투해왔고, 기투하고 있다. 엄마는 가족의 자유를 만들었고, 가족의 자유 덕분에 비로소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나는 다시, 엄마의 자유 덕분에 자유롭다. 엄마가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그러니까 엄마가 마트에 다니고 있을 때부터, 엄마에게 늘 일터 대신 회사나 직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냐고 권하고는 했다. 고백하자면, 일터라는 말이 갖는 특유의 예스러움과 촌스러움이 조금 부끄러웠다. 엄마가 일터라고 발음하면 카페에서 우리 테이블을 말끄러미 바라보는 어린 친구들이 눈빛이 엄마를 초라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다. 지금은 나도 엄마의 일터를 일터라고 부른다. 터, 활동의 토대나 일이 이루어지는 밑바탕. 엄마의 일터가 엄마의 자유와 실존을 향한 기투의 초석일 뿐, 완성이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우리는 모두 혼자다.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이 따뜻한 연대 속에서.

 

* 모든 사람은 혼자다 리뷰를 참고하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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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었던 마곡나루역 소재의 코트야드 바이 메리어트 서울 보타닉파크! *

환경 너무 좋았어요 :)

 

* 그리고 본 작은 망원동 소재의 동네서점 로우북스에서 큐레이팅 받았습니다! *

로우북스 정말 강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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