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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by 헌책방 2022. 7. 19.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비가 오니까 너도 오는구나. 이별 후에 유독 새벽이 길어졌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편인데, 베개에 불면이 숨어 있었는지 박명 사이로 자꾸 뒤척임이 스민다. 지난밤 꿈에는 너의 모습이 말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와 까만 밤과 새벽 틈 사이에서 눈을 떴다. 투두둑, 발코니 철제 난간에 정신없이 빗방울이 내려 춤추고 있었다. 너와 나란히 앉아 이별을 말할 때 함께 보았던 하늘에 걸린 회색 장막에, 삼천 개의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날 차마 내리지 못했던 그것들이 빗방울이 되어 펼친 손위로 나렸다. 처마 끝에 매달려 나리는 빗속으로 오목하게 손바닥을 반쯤 쥐고, 목놓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도 너의 맘대로 꿈속에 왔듯이. 내 맘대로.

 

 

 

 


주책맞게도 빗방울 소리를 손에 담으며 천선란 작가님의 <천개의 파랑>을 생각했다. 보경과 천 개의 단어가 입력되어 있는 휴머노이드 콜리가 나눈 대화를 생각했다. 그리움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로봇은, 주인의 엄마에게 묻는다. 그리움이 어떤 것인지. 보경은 이야기한다. 그리움은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것이라고. 살아가다가도 갑자기 생각나지만 그때마다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마음을 조금씩 떼어내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그리운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해지는 일이라고.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긴다고. 그녀는 로봇에게 그리움의 의미를 가르친다. 콜리는 초록색 몸체를 갸우뚱하면서도 투데이와 함께 주로(走路)를 달리던 순간, 투데이의 심장 박동을 떠올리며, 그것이 행복이 아닌가. 그리고 그 순간이 자신과 투데이가 가장 그리워하고 있을 순간이 아닌가. 짐작한다.

 


 

보경은 소방관이었던 남편과 사별하고 두 딸, 은혜와 연재를 키우고 있다. 은혜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겪어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됐고, 휴머노이드가 은행 창구를 지키는 첨단 기술의 시대에도 학교와 사회가 약자에게 행하는 야만을 견디지 못해 현재는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학교를 다니는 또래 친구들보다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자유롭다. 그녀는 틈틈히 경마장에 딸린 마방을 돌아다니며 달리는 말들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꿈을 꾼다. 그러다 투데이를 만난다. 3살. 어린 말이지만 경주마로 태어나 평생을 달리기만 해서 이미 연골이 다 닳아져 버린 비운의 챔피언. 투데이는 남다른 면모를 가진 특별한 기수용 휴머노이드와 함께 경마장 최강의 호흡을 보이며 경마계를 제패하다가, 기수(騎手) 낙마 사건 이후 갑자기 전성기의 끝을 맞고, 좁다란 마방에 누워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보경의 둘째 딸 연재는 몸도 마음도 다친 은혜를 돌보느라 또래 사회에 적응할 시기를 놓쳐서, 학교를 겉돌기만 하는 아이로 자란다. 그녀는 공부에는 별 뜻이 없지만 로봇 기술을 다루는 데에 만큼은 두각을 보인다. 편의점 사장이 로봇을 들이자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잃게 되어도, 로봇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다. 로봇을 만든 것도, 구매하는 것도, 이용하는 것도 인간인데, 이용당하는 로봇을 미워할 이유는 없다. 다행하게도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이 그녀의 꿈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언니가 투데이를 만났듯이, 동생은 마방에서 투데이를 타고 투데이와 함께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기수용 휴머노이드를 만난다. 소프트웨어를 관장하는 칩 하나가 잘못 흘러든 탓에, 하늘을 바라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다가 낙마해서 하반신 전체가 마비된 이 특별한 로봇을, 연재는 경마장 관리인으로부터 몰래 구매한다. 로봇 기술 영재답게 몇 날 며칠을 매달려 결국 로봇을 고치는 데에 성공하고, 로봇 인생 2막을 맞은 특별한 휴머노이드에게 브로콜리라는 이름까지 붙여준다. 그리고 보경과 두 딸을 중심으로 경마장의 선한 주변 인물들이 힘을 합쳐 투데이와 콜리에게 마지막 주파(走破)의 순간을 선물한다.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에서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본 작은 SF의 외피를 빌려 쓴, 철저한 휴먼 드라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시간에 갇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보경. 신체적 한계 때문에 가슴에도 한계가 맺힌 은혜. 더 달리고 싶지만 현실적 한계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외려 트랙 밖으로 이탈해버리는 연재.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는 표현에 목마른 지수. 불의 앞에 눈 감는 스스로를 어른답지 못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마방 관리인 민주. 사랑하는 동물들의 죽음을 무력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애달픔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수의사 복희. 작품은 누구 하나 온전하지 못한, 스스로도 부족하다 할 만큼 붕괴되어 있는 이들의 삶을 그린다. 동시에 이 부서지고 깨어져 있는 인물들이, 가까운 사이에 있더라도, 천 개가 훌쩍 넘는 단어들로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음에도, 용기 내어 소리 내지 못하면 서로에게 마음을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그린다. 그들은 그러므로 인간의 진심은 말하지 않으면 어떤 곳에도 가닿지 못함을 배우고, 마침내 서로에게 진심을 이야기하여 조금씩 느슨한 연대를 형성한다. 본 작은 진심은 진정한 소통으로만 서로에게 전달되며, 진심이 서로에게 닿는 순간을 넘어서야지만이 진정한 연대가 결성될 수 있다는 통찰을, 따뜻하지만 흔들림 없이 단단한 논조로 풀어낸다. 그러면서도 차상위계층, 동물, 휴머노이드(로봇), 여성, 장애인 등 시대가 발전해도 차별 해소가 어려운 영역에 놓인 이들의 삶이 겪는 문제를 기술 발전이 해결할 수 있는가,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물음표는 차가우면서도 맹렬하다. 나아가 극강의 기술력이 발현되는 시대에도 여전히 소외받고 강자의 필요에 의해 소모를 강요받은 이들이, 느슨한 연대를 이루어 마침내 불의에 항거하고 이것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면서 두드러지는, 진심과 소통, 존중, 연대, 사랑이 낳는 눈부심이 절정에 닿는다. 느슨한 연대는 보잘것없는 삶에, 누군가는 하찮다 말할 만한 주파(走破)를,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을, 그 순간을 이룩하면서 닿는 그리운 시간을, 행복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주로(走路) 위에서 그리움과 행복에 가닿은 말과 로봇이, 세상 위에 어떤 다른 존재보다, 어떤 인간보다도 위대했다. 행복해졌다. 그리움을 이겼다. 그것을 지켜봄으로써 연대를 이룬 인간들도 행복에 가닿는다.


 

늘. 의외로 답은 간단하다. <듄>, <매트릭스>, <가타카>, <멋진 신세계>, <1984>, <마이너리티 리포트>와 같은 아득한, 발전이 극에 달한 미래에서도 비극은 끊이지 않는다. 불행은 신발 밑에 붙어 있다가 순식간에 짙은 검푸른 빛 휘장으로 사방을 덮는다. 세상에는 관계의 평온을 깨고 비극을 소환하는 원인이 많지만 대부분은 그 뿌리에 욕심이 있다. 인간은 이기(利己)를 위해 취한 존재들을, 같은 이유로 가차 없이 버리고는 한다. 기준치에 미달 된다고 해서, 나와 다르다고 해서, 존재를 외면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거대한 비극의 단초는, 인간이 이기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사랑뿐이다. 사랑은. 말 못 하는 동물이라 하여, 천 개의 단어밖에 모르는 감정 없는 로봇이라 하여, 성별이 다르다 하여, 장애를 가진 신체적 약자라 하여, 가난하다고 하여, 상대와 내가 다른 존재라 하여. 그를 혐오하거나, 그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거나, 그와 내가 공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살아내는 시간의 속도는 서로 다를지언정, 무게는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고, 존재 자체로 그를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르다. 모두가 혼자다. 이를 인정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느슨한 연대로 묶여 나아갈 때, 뿌리에 호시탐탐 기대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던 욕심은 무력해진다. 콜리는 세상에 올 때 천 개의 단어를 알고 있었고, 살면서 천 개의 단어보다 더 무겁고 큰 몇 사람의 이름을 배웠다. 그는 사람이었다면 죽음이라고 불렸을 마지막 순간, 그동안 자신이 알았던 모든 단어는 전부 파랑이었다고,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하늘이 파랑파랑 하고 눈부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천 개의 단어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가장 아름답고 그리운 이름으로 부르고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늘. 문제가 가득한 복잡한 세상에 간단한 답이 되어준다.
 


삼천 개의 물방울이 손목까지 적시고 잠옷 끝 소매를 회색으로 물들이고 나서야, 나는 울음을 그치고 손을 거뒀다. 비가 많이 내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문 땅이 꿀꺽꿀꺽 은회색 물방울들을 마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리움은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일이다. 물방울 하나에 기억 하나씩, 릴을 풀어 회색 필름에 맺힌 기억을 비로 지워냈다. 그렇게 마음을 다 떼어냈다.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엔드게임의 여운이 가득할 때라, 비를 뜻하는 너의 이름 끝에 3000을 붙여, 3000만큼 세차게 내리는 비를 생각했다. 그만큼 사랑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하늘이 땅에 갚을 빚이 많았는지 강우가 세찼다. 그 속으로 그리움이 녹아 멀리 흘렀다. 창 밖으로 삼천 개의 회색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 시절 내가 아는 모든 단어는 전 부 다 삼천 개의 비였다. 빗방울이었다. 창문을 닫으며 이제 행복해지겠다고 다짐했다. 나와 다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면서 행복해지리라 다짐했다. 느슨한 연대의 작은 한 귀퉁이가 되겠다고. 건물을 버티는 한 알의 나사가 되겠다고. 누군가에게 가서 빗방울이 되겠다고. 아파도 마음을 열고 사랑하겠다고. 그리움을 이기겠다고. 비가 가면서 너도 간다. 진정한 작별이었다.

 

 

 

 

이번에도 이북으로 책을 읽어서, 책과 관련된 이미지가 없는 관계로 주말에 놀러 갔던 파라다이스시티 호텔 씨메르에서 찍은 파랑파랑한 사진들로 장식해봅니다 :)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www.instagram.com/seol_vely
댓글로 신명나게 이야기 나누는 중이에요.
여러분께서도 독서 후에 남은 감상을 다른 사람의 감상으로 새롭게 느끼고 다듬고 채우는 과정을 함께하세요!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독서는 발전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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