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러브, 좀비 - 조예은] 빨간약과 파란약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갈 당신 앞에 알약 두 알이 놓여 있다. 신이 어리둥절해 하는 당신에게 알약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파란 약을 삼키면 확고부동한 운명을 타고 나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라도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된다. 빨간 약을 삼키면 행위에 따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신은 늘 친절하지만은 않아서 복잡한 이 선택의 이면에 있을 상황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매트릭스>의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현재 네오의 삶은 노예의 그것과 같으며, 다만 빨간약을 먹으면 진실에 가닿을 수 있다고 이야기할 뿐, 거대한 진실에 대하여 다른 어떤 힌트도 제공하지 않는다. 신도 모피어스처럼 정보 제공에 박하다. 네오는 단숨에 빨간약을 선택하지만, 현실에서의 선택은 영화처럼 단순할 수만은 없다. 파란 약을 삼키면 결과는 정해진 바대로 이루어지고, 확고부동한 운명은 유효하게 삶에 발현되겠으나, 빨간 약을 삼킨 자들과 필연적으로 인생이 얽히면서 과정이 예기치 않은 변동을 겪고 결과도 조금 달라질런지도 모른다. 빨간 약을 삼키더라도, 확고부동한 운명을 선택한 자들과 시간이 얽히게 되면서, 적어도 각자가 그리던 포물선이 접하는 지점만큼은 정해진대로 벌어지는 운명의 영향을 받아,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변동 불가능한 결과로 귀결 될 수도 있다. 당신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어떤 삶이 더 쉬울까. 어떤 삶이 더 의미 있을까. 어떤 삶이 더 좋은 선택으로 남을까. 당신은 파란색 약을 선택해야했다고 후회하는 레이건이 될까. 삶은 삶의 주인이 통제하는 것이라는 오라클의 전언을 믿고 체제화 된 거대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네오가 될까.
한 여름의 서울밤이 열대야에 시달리지 않는 날은 드물다. 그 날은 그 드문 날 중에 하루였다. 물에 잔뜩 젖어 있었던터라 로브를 걸치고 그 위에 도톰한 비치 타월까지 둘렀는데도 공기가 찼다. 단골 바에 들어섰더니 야심한 시간에도 바에 사람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딱 하나 남은 자리에 앉자 따로 주문하지 않았는데 글렌피딕 서른살이 앞에 탁하고 놓인다. 단골 바를 운영하는 사장님이 동갑내기라 2년 넘게 친하게 지내고 있다. 따거가 이 바에 맡겨 놓고, 나래 오면 한 잔 주라고 신신당부한 술이었다. 고마워., 어떻게 됐냐., 헤어졌어., 괜찮냐? 어쩌겠냐. 불가항력이잖아. 나라도 상대방 아버지가 반대하는 결혼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아. 너네 아버지잖냐., 응. 그래서 이해해보려고. 서운해하지 않으려고., 뭐 그게 맘처럼 되겠냐. 맛있게 먹어라. 힘내고. 따로 말하지 않아도 그는 내 이별에 대해서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같은 나이,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계획하고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가 친구기 때문에 대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꼬락서니만 보고도 결론에 대한 짐작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배려와 친구로서의 관심이 고마우면서도, 불가항력(不可抗力)이라는 말이 까끌했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신 앞에서 빨간약을 선택했다. 모피어스에게 진실을 알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는 누군가의 선택과 운명이 확고하더라도 그것이 내 인생 위에 놓여 있다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최소한 중간 지점에서 합의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이해해보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코로나도, 가뭄도, 폭염도 아닌, 한 사람의 뜻이 어떻게 그에게 불가항력이 될 수 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핏줄이라는 이유로 지독하게 얽혀 있는 아빠와 나의 포물선 앞에서 그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비싼 술에 취하는 일 뿐이었다.
불가항력의 까슬함을 씻어낼 요량으로 두번째 잔으로 카발란 올로로소 쉐리 캐스크를 시켜 놓고-<헤어질 결심>의 여운 탓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가항력적 운명을 비극적으로 그린 작품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를 생각했다. 조예은 작가님의 <칵테일, 러브, 좀비>는 표제작을 포함해 총 네편의 단편을 담고 있는 단편집이다. 그 중에서도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는 정해진 운명을 바꾸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비극적으로 그려내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어바웃 타임>에서처럼 유전이라도 되는 능력인지, 불행한 모자가 한 세대의 격차를 두고, 시간을 되돌려 유리창 위에 번진 얼룩을 지울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갖게 된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스토킹하는 스토커의 칼에 찔려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 번 시간을 되돌린다. 아들은 어머니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그녀의 남편이 되고 나자 사랑한 나날은 털끝도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내버린 상처들을 없던 것으로 만들고, 어머니가 잃어버린 세월을 보상 받도록 하기 위해서 역시 세 번의 시간을 되돌린다. 그러나 이 세 번의 기회들은 과거에서 맞물려 타임 패러독스(paradox)를 만들고, 얼룩을 지우려는 시도들은 끝내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모자에게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주겠다고 속삭이던 목소리는 말한다. 결국 벌어질 일은 벌어지지. 깔깔깔. 시간 여행을 하게 된 모자가 정보(진실)를 충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부적인 선택과 과정이 달라지지만, 과거에서 그들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이 엇갈리면서, 역설적이게도 결과는 늘 비극으로 치닫는다. 인간이 설사 시간을 오가는 능력을 갖게 되더라도, 운명 공동체 내 모든 구성원의 내심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는 한계가 있는 한, 수집 가능한 정보는 진실의 총합이 아니라 일부에 불과하고, 이 진실의 일부에 의거해 내린 판단은 당연하게도 비극이라는 불변적 결과에 저항하는 데에 충분할만큼 현명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들 중 한명이라도 용기 내 진심을, 진실을 이야기했다면 도르마무만큼 지독한 시간 역설은 끝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불운한 모자처럼 서로 차마 진심을 털어놓지 못한 채로, 지금도 어딘가에서 같은 시간 루프 속에서 서로를 위하여 계속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굴레에 갇힌 운명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곱씹어 감탄할만한 탄탄한 구성을 자랑하는 고퀄리티 타임패러독스 작품인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 외에도, 단편집 내 다른 작품들 역시 참신하다. <초대>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있는 것도 그냥 없다, 없는 것도 있다 하고 사는 것이라고 요약하며,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을지라도, 진실을 알면서도, 없는 척 혹은 있는 척하고 살아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한다. 있는 데도 없는 것처럼 가장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콕 집어 저항하기는 어렵지만 그냥 넘어가기도 어려운, '일상화된 폭력', '사소한 폭력'과 그에 따른 상처다. 작품에는 언뜻 사소해 보일 수도 있는 폭력이 어린 아이에게 억지로 회를 먹이거나, 여자친구에게 예뻐 보이는 옷을 권한다거나 하는 행동들로 묘사된다. 이런 평범한 것처럼 가장된 폭력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불편하고 폭력적이라고 느끼면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확률로 과민한 반응으로 보일까봐 염려하는 마음 때문에 피해자가 선뜻 저항하거나 제3자가 나서 제재하기 어렵다. 작품은 이런 일상적이고 비교적 사소한 정도의 폭력 역시 명백한 상처를 남기는 엄연한 폭력이라고 선언한다. 주인공 채원은 어렸을 때 친척과 부모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억지로 회를 먹고, 목에 가시가 박혀 있는 듯한 감각을 17년의 세월 동안 견딘다. 그런 채원이 그간 모르는 척, 이해하는 척하면서 견뎌왔던 악의 평범성과 작별을 고하면서야 비로소 목구멍에 박혀 있던 가시가 빠져나오고, 온전한 삶이 시작 된다. 대학병원에서도 찾아내지 못한 가시가 실제로 채원의 몸 속 어딘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습지의 사랑>은 인간의 이기심에 희생된 존재들이 무력함 속에서도 사랑의 힘으로 서로에게 의지하고, 끝내는 진실에 닿아 이기심보다 더 오래 생존하는 데에 성공하는, 사랑스럽고 동화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표제작 <칵테일, 러브, 좀비>는 흔한 좀비 아포칼립스를 다루면서도, 가족의 의미와 소중함에 대하여 일반화된 작품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탐구한다. 특히 작품 말미에, 노답으로 요약할 수 있을만한 작 중 좀비 아빠가 딸의 목에 낸 잇자국에 대하여, 오래 남아 있었으나 분명히 옅어질 것이고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언급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가정, 가족은 애정만이 아니라 애증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작품 내 애증은 노답 좀비 아빠더라도 그 죽음을 기리러 가자는 모녀의 다짐, 무뚝뚝한 딸에게 좀비가 되면 엄마 꼭 물어줘! 하고 이야기하는 마음, 답답한 말만 골라하는 엄마가 다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아빠 좀비와 맞서싸우는 딸의 몸짓, 잇자국의 치유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방식으로 묘사된다. 피로 묶인 혈족이라도 엄연히 서로 다른 존재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가족은 여러 종류의 술을 섞어 만든 칵테일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한 데에 모여 있게 하는 것이 사랑, 그리고 사랑의 다른 이름인 애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내린 선택들이 가족의 삶을, 심지어 좀비가 창궐하는 세계마저도 바꾼다.
인간 삶의 가장 큰 비극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저항하여 극복할 수 없는 부동의 진실 앞에 설 때도 있다는 것이다. 불가항력이 까슬한 것은 나는 나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 고 믿는 네오이고, 동시에 인간이 늘 삶을 통제할 수만은 없어서 예언대로, 속절 없이, 부지불식간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네오와 사랑에 빠지는 트리니티이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거대한 모순이다. 시간을 되돌리던 어머니와 아들의 가슴엔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 뿐이었을 것이다. 벽장 속으로 들어서던 팀의 마음엔 사랑을 지키겠다는 단단한 결심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야속하게도 모순은 다짐과 결심이 현실이 되는 것을 손놓고 지켜보지만은 않는다. 다시. 모피어스가 당신에게 알약 두 개를 보여준다. 신은 당신을 언제까지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어떤 약을 선택할지 영겁의 세월 동안 고민할 수는 없다. 숨을 크게 쉬고, 눈을 감는다. 시간을 되돌려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던 k의 눈을 생각한다. 파란 약을 집어드는 영혼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아마 더 쉽고, 어쩌면 가끔은 더 현명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나는 또 다시, 빨간 약을 집어 든다. 그리고 삼킨다. 싸워 이겨낼 수 없는 강력한 포물선이 내 길 위를 지나더라도 여린 몸을 부딪어 싸울 것이다. 내가 선택한 삶이란 그런 것이다. 선택 때문에 운명이 바뀌고, 파란색 약을 삼킨 그대들과 내가 한 지점에서 만나더라도, 깨어지고 부서지는 붕괴로 조금이라도 결과의 모양을 바꾸는 것이 내가 선택한 삶이다. 선택적 숙명. 조금이라도 망설이지 않으려고 얼른 잔을 들어 카발란과 함께 약을 꿀떡 삼켰다. 삶은 삶의 주인이 통제한다. 비장한 결심이 목을 타고 찌르르 온몸으로 번졌다.
위스키와 칵테일은 역시 무정형이다 ^0^
글렌피딕 30살도 모자라 애프터눈티타임 + 망고빙수까지 하사하신 따거
J.W. 메리어트 동대문 너무 좋다. 고즈넉하고, 고풍스럽고 정말 좋았음.
그리고 문제의 추위의 원인이었던 송크란까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www.instagram.com/seol_vely
댓글로 신명나게 이야기 나누는 중이에요.
여러분께서도 독서 후에 남은 감상을 다른 사람의 감상으로 새롭게 느끼고 다듬고 채우는 과정을 함께하세요!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독서는 발전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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