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브다니의 여름휴가 - 김초엽] 해변 끝의 카프카
야이. 너 이 xx oo 완전 꼰꼰대네. 아 선배님, 저 꼰꼰대는 맞는데요. 후배한테 xx, oo이 뭐예요? 교양 없게. 아니 그리고 그 xx가 남자 선배랑 여자 선배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이 문제지, 내가 선배라고 무조건 대우해달라는 것이 아니라니까? 나보다 나이 많아도 후배니까 무조건 군기 잡겠다. 뭐 그런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내 눈을 빤히 보더니. 많이 세졌네. 막둥이 놈이. 하면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웃을 문제가 아니라면서 샐쭉이다가 그를 따라 웃었다. 내가 권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진정한 꼰대라면, 그에게 대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후배에게는 권위적으로 행동하고 선배에게는 대드는 내로남불형 인간이거나. 후자에 해당한다면 아마 갱생이 불가능할 테지만, 어쩌면 아직 진짜 꼰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보수적인 직장 문화를 가진 회사에 입사하면서 제일 경계했던 것이 권위주의에 물드는 일이었다. 경제학과 법학을 복수 전공하면서, 경제학보다는 법학에, 법 중에서도 공법에, 그리고 옛날 판례에도 동기화가 잘 되는 스스로를 보면서 늘 불길했다. 이게 왜 술술 이해가 되지. 영감님들처럼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나이가 든다고 다 꼰대가 되는 것이 아닌데도, 어느 순간부터 나이 드는 일이 두려워졌다. 더 나이 들면 머리와 마음에도 녹이 슬어서, 서류를 복사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선배가 보고, 설수사, 치마가 쫌 짧다? 인사 안 해? 해서 기분 나빠했던 것도 잊고, A수사,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니야? 고개는 뒀다 뭐하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꼰꼰대가 될 것만 같았다.
예전보다 훨씬 나아지긴 했지만, 권위(권세 권權, 위엄, 세력 위威)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직적 조직 문화 때문에 타인의 자유를 제재하는 현상이 아직도 많은 환경 속에서 내가 나로 남아 있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은지, 스스로 계속 묻는 일이었다. 존재는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자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주체적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이 실존이다.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소박한 바람은 실존(實存)과 맞닿아 있었다. 아니, 늘 그렇듯이 실존(實存)은 이 작은 다짐을 포함한, 우리 삶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생은 본질적 자아와의 합일을 위한 긴 과정이다. 나는 누구인가. 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평생을 읽고 쓰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삶은 친절해서, 이 긴 과정 속에서 그 주인공이 지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지, 잊지 마. 너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해야 해. 하고 불쑥불쑥 이정표를 내밀기도 한다. 계산대 앞에 서서도 끈질기게 꼰대라고 놀리는 선배를 두고, 먼저 더위 속으로 나오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다시 생각했다. 죽으면 원자로 흩어질 확고부동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존재들이 가여워 아찔했다. 뒤따라온 선배가 어깨를 붙잡으며 야. 괜찮냐. 더위 조심해라. 나이 들면 훅 가.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지구 끝의 온실>로 한국 과학 문학에서 단연 최고라고 꼽힐만한 존재가 된 김초엽 작가님이 신간을 냈다. <수브다니의 여름휴가>는 이 계절에 딱 맞을만한 컨셉으로 발간한 단편이다. 화자 현은 솜솜 피부관리숍에서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다른 종이라고 믿는 고객들에게, 스스로 선택한 존재 방식에 어울리는 인공피부를 제작해주는 일을 한다. 어느 날, 솜솜에 수브다니라는 손님이 찾아와 금속 피부를 달아달라고 요구한다. 솜솜 사장과 현은 금속 피부가 녹슬기를 원하는 손님의 의뢰를 목숨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설명하며 거듭 거절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수브다니가 안드로이드였다가 인간화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곧 수브다니의 본질은 비금속성 재질로 만들어진 로봇이기 때문에 금속 피부 시술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녹이 슬 수 있는 금속 피부를 제작하여 이식하는 데에 성공한다. 나중에 수브다니는 햇살 가득한 해변에서 몸을 바닷물에 담그고 잔뜩 녹이 슨 채 사진을 찍어 현의 메일 계정으로 보내온다. 사장과 현은 그가 멋진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브다니는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녹슬 수 있는 존재, 녹스는 존재, 녹슬어가는 안드로이드. 라고 대답했던 모양이다.
본 작은 20분이면 완독 가능한 짧은 분량으로 편지 형식을 빌어 구어체로 쓰여졌다는 형식적 특성과 여름의 청량감이 뚝뚝 떨어진다는 분위기상 특성이 두드러지며 전반적으로 가벼움이 돋보이지만, 실존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져 균형감을 도모하고 있다. 질문들이 구체적, 실체적, 직설적이기 때문에 현의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게 된다는 점에서 참여적이기도 하다. 현은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피부 제작을 의뢰하는 의뢰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특정한 어떤 존재가 되고 싶다는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지, '진짜 나'이고 싶다는 갈망은 무엇인지, 내가 어떤 존재다. 라는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에 대하여 거듭 묻는다. 현이 지인에게 보내온 이 편지에는 '나는 무엇인가'가 모양만 달리하며 반복되고 있으며, 이것이 작품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수브다니와 인간인 연인 남상아는 함께 오랜 세월 동안 예술 활동을 해왔고, 모종의 이유로 결별했다. 그러나 마지막 협업 작품이었던 <변화의 실행>의 메이킹 필름에 환히 웃으며 행복해하는 수브다니와 남상아의 모습이 남아 있다. 메이킹 필름 속 수브다니는 폐기된 금속 로봇들과 서로의 손목을 끈으로 연결한 채 바닷물이 들이치는 해변 끝에 누워있다. 수브다니는 녹슬지 않는 소재로 제작되어서 끝내 녹슬지 않고, 그를 제외한 다른 금속 로봇들만이 세월을 거치며 녹슬어, 작품 <변화의 실행>을 이룬다. 수브다니는 마침내 녹슬 수 있는 피부를 갖게 되면서, 그간 염원해왔을 변화의 실행을 이룩하고, 변화 그 자체가 된다. 연인 남상아의 소망이었든, 혹은 자의 었든, 그의 실존은 사실 인간화 시술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안드로이드라는 자신의 본모습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 본모습 그대로 마침내 늙어가는 데에 있었다. 추측건대 수브다니가 남상아의 금속 작품의 일부를 훔쳐와 자신의 새로운 금속 피부에 덧대 달라고 의뢰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은 늙어가지만 자신은 그녀와 함께 늙을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수브다니는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실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완으로 남은 사랑을 영원에 부치기 위하여 녹슬어 붕괴할 결심을 한다. 그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위해, 또 사랑을 위해, 자신이라는 존재를 녹슨 존재로 변화시키는 데에 여름휴가를 쓰겠노라 마음먹었을 것이다. 녹슬겠다는 결심으로, 자신이 누군지에 대하여 대답하고, 동시에 상아를 위해 붕괴되었을 것이다. 늘 그러하듯, 발이 넓은 실존에 대한 고민은 사랑의 영역에서도 유효하다.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양자역학, 죽으면 원자로 돌아가는 자연의 섭리에서 자유로웠던 그는, 인간과 같은 확고부동한 운명을 앞둔 존재라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답하며, 실존을 이룩한다.
나는 녹슬고 있다. 부디 녹슬지 않기를 그렇게 원했건만. 별빛에, 바람에, 파도에, 눈물에. 시시각각 녹슬고 있다. 세월이 마음에도, 머리에도, 눈가에도, 자꾸 흔적을 그려 넣는다. 그러나 나는 녹슨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기준을 다른 이에게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나와 다른 이를 혐오하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나와 다른 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클라라와 태양>, <작별인사>, <천 개의 파랑>, <완다비젼> 과 같은 작품들을 되돌아보면, 최근의 작품들은 실존이 비단 인간만이 고민할 문제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나는 누구인가. 에 대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의미를 규정하고, 실존한다. 그러므로 다시. 나는 실존하는 존재다. 나는 사랑을 위해 기꺼이 붕괴를 선택하는 존재다. 해변의 끝에 서서 눈을 질끈 감고. 수브다니처럼, 내가 녹슬고 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다음에 선배를 만나면 꼰꼰대라고 놀릴 그에게 그래요, 나 꼰대야. 나 녹슬고 있어. B가 남자 선배한테는 인사하고 나는 먼저 인사해도 안 받아준단 말이야. 그래서 B한테 왜 나한테는 인사 안 해줘요? 물어본 것이 꼰대 짓이라면 그래. 나 꼰대 할게요. 됐어요? 하고 속사포처럼 쏟아낼 거다. 누가 설나래는 무엇인가. 에 어떻게 대답하더라도 그에 상관없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원자가 모여 만든 내 존재는 아직 괜찮다. 실존은 실존의 주인의 대답에 의존한다. 녹슬어 가는 것도 퍽 괜찮다. 녹슨다고 '진짜 나'는 달라질 리 없으니 말이다. 작열하는 햇빛과 짭쪼롬한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묻는다. 나는 누구인지. 갑자기 이 긴 길이 꼭 여름휴가를 떠나는 해안도로인 것만 같다.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떠나는 여름휴가다. 지구 끝의 해변으로.
* 밀리의 서재에서 단독 공개한 작품이므로 이번에도 책과 관련한 이미지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여름 휴가지로 너무 좋은 롯데호텔 제주의 모습을 첨부하겠습니다 *
해온 수영장 정말 최고
라세느에서 조식, 중식 모두 해결했는데, 역시 최고입니다. 여름휴가지로 강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www.instagram.com/seol_vely
댓글로 신명 나게 이야기 나누는 중이에요.
여러분께서도 독서 후에 남은 감상을 다른 사람의 감상으로 새롭게 느끼고 다듬고 채우는 과정을 함께하세요!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독서는 발전합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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