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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캉스8

[호 - 정보라] 호의 편지 [호 - 정보라] 호의 편지 너의 세상이 긴 우호라면. 그래서 우리의 세상이 만나는 찰나가 짧은 열호, 아니 그저 그 포물선 위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너의 우호가 아스라이 궁굴려져 어느 시간 위에 걸릴 때까지. 나는 이 원호 위에 있을게. 무수히 해가 뜨고 지는 어느 날들을 견디며. 순리. 이치에 맞게. 우주가 세계를 운영하는 대원칙에 들어맞는 방향으로. 어떤 일이 순리에 맞게 흐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언젠가 죽음으로 삶을 갚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순리에 맞게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도, 그 간단한 한 문장을 굳게 믿을 만큼 강인해질 수도 없다. 무슨 생각으로 애한테 그런 .. 2023. 8. 20.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 레이먼드 카버] 그래, 나는 코끼리다. [누가 이 침대를 쓰고 있었든 - 레이먼드 카버] 그래, 나는 코끼리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나를 두고 실험카메라를 찍는 줄 알았어. 너는 도대체 뭐 하는 ***니? 전화기 너머 U는 묵묵부답했다. 그가 그 자신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속이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나로 인해 들키기 전에도 그는 늘 조용했다. 대답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면서, 여백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 해오고, 상황을 조정해왔던 사람이다. 그의 침묵은 시인을 의미했다. 그러나 사과는 담겨 있지 않았다. 아니 그를 둘러싼 모든 사실이 거짓말인데, 도저히 그의 사과를 진심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U와 친구로 지낸 지 3년. 나와 U가 잘 맞을 것 같다면서 친구로 지내는 것을 적극 장려했던 다른 친구는 U와 친구로 지낸지 5년도 넘었다. 그날 .. 2023. 1. 4.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밥 두 공기 (feat. 이비스 스타일 앰배서더 서울 용산에서의 북캉스, 연휴 맞이 담양호 용마루길 산책) [무의미의 축제 - 밀란 쿤데라] 밥 두 공기 엄마는 엄마 집 부엌에 딸린 세탁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앞집에, 세상에서 제일 먼저 가을이 온다고 말씀하시고는 한다. 단풍이 사방에 내려앉기도 전에 앞집 주황색 슬레이트 지붕만 빨갛게 탄다. 붉은 노을이 앉아 주홍빛으로 물든 나락이 가득한 논처럼, 앞집은 사시사철 가을 풍경이 가득하다. 지은 지 100년이 넘었다는 그 가옥은, 뭐랄까. 부지런하신 주인 할머니의 자부심이랄까, 그런 공간이다. 머리에 하얀 수건을 단단히 동여맨 할머니가 아침 일찍 일어나 마루를 닦고, 토방을 쓸고, 마당 구석 구석을 청소하고, 장독을 밝히고, 우물을 씻기고, 심지어 여름에는 우물 주위에 시멘트 바닥의 등을 하얀 솔로 촥촥 때를 밀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앞집 할매.. 2022. 10. 5.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왜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왜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P를 만나 맥주를 마셨다. 불쑥 그가 물었다. 야, 너 혹시 L 기억남? 그게 누구여. 그 왜 있잖아, 너랑 대학 때 잠깐 친했었는데. 아예 기억 안 나? 남 욕 많이 해서 지친다고 거리 두다 멀어졌잖아. 아! 기억 나. 사실 자세히는 안 나는데, 뭐 친했지. 술도 많이 마시고. 그 사람이 왜? 그 사람이 너 결혼할 사람이랑 헤어졌냐고 물어보더라고? 엥? L이 그걸 어떻게 알고? 글쎄, 나도 그래서 너랑 아직도 연결 고리가 있는 건가. 생각하다가 아닌 것 같아서 물어봤지. 뭐, 궁금한가 보지. 나 슈퍼스타잖아. 어련하겠어. 그래, 그래, 대단하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니 성격 때문에 개 파탄 났다고 했지. 길.. 2022. 9. 23.
[소년이 온다 - 한강] 활활 타다. / 북리뷰, 북캉스, 책캉스 책 추천 [소년이 온다 - 한강] 활활 타다. 아야 서운아, 아부지 오셨다이. 얼굴에는 제법 처녀티가 나는데 몸집은 조그만 소녀가 마루에서 발딱 일어났다. 수원(水源). 그녀에게는 서당에서 훈장을 하며 여생을 보내시는 선비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좋은 이름이 있었지만, 늘 서운으로 불렸다. 그녀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 어머니가 태몽으로 용꿈을 꾸었다고 했다. 사내아이를 기다렸던 집안 어르신들은 조그맣고 하얀 여자아이가 사랑스러운 몸짓을 할때마다, 아고. 저거 서운타. 서운혀. 남자로 태어났으면 아조 예뻤을거인디 서운혀. 해서 아이를 서운이라고 불렀다. 사실 이름마저 이 애석한 별칭을 따라 지었을랑가도 모른다. 그녀는 늘 그것이 서운했다. 그러나 그날 그녀는 어매에게 입도 뻥긋 못했다. 댓돌을 밟고 마루로.. 2022. 5. 18.
[스토너 - 존 윌리엄스] 나는 무엇을 원했나. 원하는가. / 북리뷰, 책 추천, 북캉스, 책캉스 추천 도서 [스토너 - 존 윌리엄스] 나는 무엇을 원했나. 원하는가. 비가 부스스 쏟아지던 날이었다.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버스를 타고 급히 서울을 떠나며, 내가 아는 당신의 인생을 반추했다. 가까이 살아도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이후에는 할아버지댁에 자주 가지 못해서 추억이 거의 없는데도, 꽤 많은 기억이 쏟아져나왔다. 엄마는 당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할아버지가 40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재직하시며 오토바이로 출퇴근 하셨던 것, 까맣고 멋있는 오토바이 뒤에 수박, 참외, 참조기,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오셨던 것, 그러다 수박이 톡 도로에 떨어져 쪼개어져 버리면 그것을 노끈으로 동여매 아무렇지 않은척 부엌에 가져다 두셨던 것, 매일 새까만 머리에 포마드를 얹어 한쪽으로 가지런히 빗고 정리.. 2022.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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