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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왜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by 헌책방 2022. 9. 23.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왜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P를 만나 맥주를 마셨다. 불쑥 그가 물었다. 야, 너 혹시 L 기억남? 그게 누구여. 그 왜 있잖아, 너랑 대학 때 잠깐 친했었는데. 아예 기억 안 나? 남 욕 많이 해서 지친다고 거리 두다 멀어졌잖아. 아! 기억 나. 사실 자세히는 안 나는데, 뭐 친했지. 술도 많이 마시고. 그 사람이 왜? 그 사람이 너 결혼할 사람이랑 헤어졌냐고 물어보더라고? 엥? L이 그걸 어떻게 알고? 글쎄, 나도 그래서 너랑 아직도 연결 고리가 있는 건가. 생각하다가 아닌 것 같아서 물어봤지. 뭐, 궁금한가 보지. 나 슈퍼스타잖아. 어련하겠어. 그래, 그래, 대단하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니 성격 때문에 개 파탄 났다고 했지. 길거리에서 L을 만나면 알아보지 못할 테지만, 타인의 불행을 얘기하면서 지었던 표정만은 아직도 선명하게 생각이 난다. 그렇게 말하니까 L 표정이 어땠어? 그건 노 코멘트할게. 맥주잔을 부딪히면서 나는 샤덴프로이데를 생각했다. 샤덴프로이데. 독일어로 손해를 뜻하는 샤덴(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프로이데(Freude)를 합성하여 타인의 불행에 느끼는 묘한 기쁨의 감정을 뜻하는 합성어다.


 

J는 종종 내게 자신의 전남친 C의 소식을 묻는다. 야, 나 C랑 안 친해 이제. 불편하게 계속 물어보냐 왜. 안 친해도 빅뉴스는 알 수 있잖아. 나는 진짜 C가 한번 크게 혼나면 좋겠어. 물론 C가 속된 말로 쓰레기고 깨달을 것이 많다는 데에 동의하지만, C가 승진에 미끄러졌다는 소식에 J가 함박웃음으로 행복해했던 날 이후로는 더 이상 J에게 C의 소식을 알려주지 않는다. C의 불행이 J에게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도, C의 행복이 J의 불행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이별하던 날 진심으로 C의 행복을 빈다면서 대성통곡하던 J가 더 이상 C의 행복을 빌어주지 않는 것도 모자라 불행을 비는 것도, 나를 슬프게 한다. 물론 J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 중에 가장 솔직한 것이 질투심이고, 가장 순수한 것이 복수심이다. 그 솔직함과 순수함을 나무랄 수는 없다. 나와 C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든-물론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는 L이 나에 대한 질투심 혹은 복수심을 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L은 샤덴프로이데보다는 호사가 기질이 높은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의 불행에 관심을 두고 불행을 확인한 후 행복해했다면, 그 기질 역시 일정 부분 작동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L과 J가 샤덴프로이데 심리의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정확한 원인을 제3자인데다 비전문가인 내가 분석할 수는 없지만, 아마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감정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샤덴프로이데의 권력에 기속된다는 사실만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찌르르하게 운다.
 

한 교수팀이 샤덴프로이데가 본능인지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실험팀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들이 부러워 하는 사람이 5달러를 주운 상황과 택시가 튄 물에 흠뻑 젖은 상황을 제시하였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부정적인 상황에 더 활짝 웃었다. 타인이 겪는 폭력적 상황에 긍정적 반응을 한다는 점에서 샤덴프로이데는 폭력성, 파괴성, 나아가 네크로필리아와도 연관성이 깊다. 에리히 프롬이 시체에 대하여 성욕을 느끼는 성도착증을 인간의 성격 유형 중 하나로 개념적으로 확장한 개념이 네크로필리아다. nekros는 그리스어로 시체와 죽음을 뜻하고, philia는 친숙함과 우정을 뜻한다. 이 두 단어를 합성한 단어 necrophilia는 시체애호증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이다가, 에리히 프롬에 의해 죽음 자체에 대한 친숙함, 가까움, 끌림으로 의미를 확장하게 됐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생명을 뜻하는 bio와 위 philia를 합성하여 biophilia, 즉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합성어를 최초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이 네크로필리아와 바이오필리아의 개념을 적극 활용하여 근현대인의 생황 양식을 분석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다. 본작은 에리히 프롬 사후에 그의 마지막 10년 가까이를 함께 일했던 조교가 그의 글들을 엮어 펴낸 결과물로, 에리히 프롬은 이 문집에 수록된 글들을 통해 우리 삶이 점점 더 각박해지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마음이 네크로필리아에 자리를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사회는 대다수의 인간이 바이오필리아보다 네크로필리아에 더 집중하기 때문에 혐오 사회, 증오 사회가 되었고, 그 정도는 심화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삶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고,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인간은 자신의 네크로필한 (파괴적인) 경향으로 혐오 사회에 기여한다. 요컨대 네크로필리아는 스스로 악순환 구조를 만들고 우리 사회를 증오로 잠식하고 있다. 


 

네크로필리아 또한 인간의 본능일까. 타인의 눈치를 보면서 내보이지 않던 어두운 마음이 사회에 드러나고, 나아가 환경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네크로필리아 악순환의 비극은 인간이 이성과 지성에 매달려 본성과 감정에 충실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따라서 이성적으로 결정한 외부적 목표에 삶의 자리를 내어준 순간, 마음 속에 이는 부정적 감정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꾸미려고 하는 순간, 삶이 더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게 된 순간,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숨김으로써 샤덴프로이데나 네크로필리아의 표출과 같은 파괴적 방식으로 되려 감정이 곪아 터지는 순간, 잠깐 길을 잃은 찰나에 시작된다. 본작에 따르면 근현대인은 스스로가 아니라 삶 바깥에 놓인 물질적 가치를 삶의 주인으로 삼고, 자신을 스스로 노예화하고 있다. 외부적 가치를 삶의 목표로 삼은 사람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나 오늘에 충실한 인간이 쌓아올린 나날의 총합, 즉 삶은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이지 결코 부차적인 수단으로 소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는 행위로써 존재하고, 본질적 자아와 합일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의미의 실존을 이룩한다. 삶은 목적 그 자체다. 정리하자면 삶을 경쟁의 수단으로 삼으면서까지 경쟁에 심취하는 파괴적 성향과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며 스스로를 노예화하는 자기 파괴적 성향이 점점 대다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네크로필리아에 시달리게 만들었고, 이 시류가 현재의 혐오 사회의 형성에 기여하였으며, 다시 사회는 네크로필리아로 마음이 기운 아이들을 낳는다. 목표와 수단, 주체와 객체, 주인과 노예, 진실과 꾸밈이 전도 되어 버린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인간은 열심히 살고 있으면서도 필연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스스로를 좋은 사람으로 꾸밀수록 이상적인 인간상과 자신의 기질 사이의 격차에 크게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현대인이 바쁘게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조급증에 시달리고, 충실히 시간을 대하면서도 스스로와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 증오(미울 증 憎, 미워할, 악할 오 惡) 내지 혐오에 빠지는 원인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태도는 공동체에도 치명상을 입힌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은 타인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증오는 반응적 증오를 이끌어내며, 증오 표현과 그에 대한 반작용들이 모여 사랑보다 증오가 더 흔하게 나타나는 사회로 현실을 견인한다. 반대로 증오 사회는 개인의 반응(반항)적 증오를 자극하고, 이제 막 사회의 일원이 되어 관계성에 편입된 구성원의 내재적 증오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삶을 수단화하는 행위는 이런 연쇄적인 상호작용으로 증오를 파생시키고, 그 만연성을 영속화 한다.


 

네크로필리아가 인간의 본성에 내재 되었다고 해서,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혐오 사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용과 반작용으로 건설 되었다. 이 실마리를 한꺼번에 풀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네크로필리아에 굴복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샤덴프로이데의 영향력에 귀속 된다고 타인의 불행에 행복해하는 마음이 바람직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다시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삶을 사랑하지 않게 된 이유를 차근차근 되짚어 보면서 찾을 수 있다. 인간 본성에는 파괴성과 폭력성 외에도, 바이오필리아와 타인의 행복을 응원하는 마음과 같은 긍정적 성격 유형이 공존한다. 열쇠는 본성 중 하나를 골라 함양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군집에서 균형을 찾는 데에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삶은 사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지 삶을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물질적 가치가 존재의 목적이 아님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꾸미고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해야 한다. 반목을 조장하고 물질만능주의로 삶의 주인을 물질로 인식하게 하는 경쟁 사회에 투쟁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을 통해 자신과 자아의 합일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타인의 시선 때문에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해소하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타인의 삶으로 쏠리는 눈길이 그에게 칼날임을 알고,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기 위하여 투쟁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무관심이야 말로 사랑의 반대말이고, 파괴는 무관심에서 싹튼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무관심보다 우월하다고 하여 사랑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양가감정 안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다. 빗나간 애정은 질투나 복수로 발현한다. 타인을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면 타인의 사생활만큼은 무관심으로 대하여야 한다.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충실히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다르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에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 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끊임 없이 묻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으로만 성취 된다. 인간은 나는 누구인지 자문자답하는 과정으로 삶에서 솔직한 감흥을 느끼고 삶의 주인인 스스로의 본질, 본래성을 직시할 수 있게 된다. 본질적 자아를 찾아가는 통로를 거쳐야만 자신이 무엇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 없는지, 나의 안에 양립 불가능한 존재들의 균형점은 어떻게 찾아낼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경쟁 사회에 사는 우리에게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의 삶 자체가 목적이라고 고백해도 스스로가 도태되고 있다고 인식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삶의 가치는 자신의 기준으로만 판단하고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는 준비운동이 필요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나의 안에 어떤 알맹이가 모여 있는지 알며, 타인의 삶과 외부요인으로부터 자유롭게 다름을 인정하는 인간만이, 네크로필리아와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자신의 바이오필리아를 지킬 수 있다.


 

토요일 밤,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방영된다. 그알(앓)이들을 양산하고 유튜브에서도 엄청난 수의 구독자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눈물 짓는다. 네크로필리아가 만연한 세상에서 파괴성의 발현을 현명한 방법으로 예방하고, 관심과 사랑으로 대응해 보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동시에 일부 시청자들이 타인의 불행을 오락거리로 소모하고 심각한 사건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취급한다는 점이, 우리가 혐오 사회를 살고 있고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사회를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땔감으로 써야 할 만큼, 어떤 이들의 삶은 여전히 나약하다.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과 미워하고 증오하려는 몸짓 사이에서 경계선이 바짝 움츠러든다. 경계인들의 균형 잡기는 좁은 경계선 위에서 점점 더 아슬아슬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사회에 관심을 갖고 일부나마 타인의 불행을 안타까워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전히 삶은 사랑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삶의 부속품이 아니라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우리가 디딘 땅을 함께 밟고 있는 이들과, 적당한 사랑과 무관심 속에서, 다르면 다른 채로 그래서 괜찮은 채로 공존하게 한다. 타인의 기준과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각자가 고유의 속도로 걸으며 여전히 행복하도록 한다. 스스로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을, 삶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물질을, 비교하지 않게 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돌아가기에 너무 먼 길을 건너왔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는 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주장이 명백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은. 오롯이 자신을 위한, 자신에 의한 삶을 살기 위해, 삶을 사랑하기 위해, 계속 도전할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 수레바퀴에 깔릴까 봐 억지로 기운 내어야 하는 한스가 아니라, 투쟁하여 알을 깨고 나가 압락사스에게 날아가는 새로 살기 위하여. 시지프스의 숙명은 숭고하다. L과 C가 지금보다 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집중하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을 사랑해야 한다.

 

 

* 책 추천에 이어 책 읽기 좋은 장소도 추천합니다 >_< *

SDC에서는 그랜드머큐어앰배서더랑 노보텔스위트만 가보다가 처음으로 이비스 앰배서더를 가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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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뷰를 보면서 책 읽으니까 책이 술술 잘 넘어갔고요!(?)

야경도 정말 좋아요. 남산뷰!

룸은 정말 컴팩트하고 깨끗합니당 쏘쏘해요

푹 쉬다가 왔어요. 종종 북캉스하기 좋은 곳입니다.

ㄹㅇ 귀요미!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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