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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14

[잠 - 유재선] 앎과 받아들임 사이에 [잠 - 유재선] 앎과 받아들임 사이에 과외와 학원 알바로 모진 서울의 생활비를 충당하던 시절. 어린 선생(먼저 선 先, 태어날 생 生)이었던 내가 학생들에게 그나마 가장 많이, 확신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문장 중에 하나는, 아는 부분은 찢어버려. 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대부분의 순간 가족의 눈과 책장에 맺힌 활자를 쫓았지만, 종종 누워 유난히 맑았던 그 시절의 하늘을 눈에 담거나 멍하니 벽지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구름이 토끼나 하트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벽지 속 패턴이 악마나 괴물, 이모가 보여 줬던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 얼굴로 보여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착시를 무의식적인 추론에 의한 인지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즉, 어린 나는 마룻바닥에 .. 2024. 3. 10.
[플라워 킬링 문(The Killers of the flower moon) - 마틴 스콜세지] 시절, 액자로 남다. [플라워 킬링 문(The Killers of the flower moon) - 마틴 스콜세지] 시절, 액자로 남다. 이 글은 브런치 스토리로 이사하였습니다. 브런치에 놀러오세요.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lync/60 01화 시절, 액자로 남다., 마틴 스콜세지, 2023 | [플라워 킬링 문(The Killers of the flower moon) - 마틴 스콜세지] 시절, 액자로 남다.옆으로 쪼그리고 누운 뒷모습을 본다. 작고 둥근 등이 볼록하다. 엄마는 당신brunch.co.kr 2023. 12. 30.
[서울의 봄 - 김성수] 우리는 나아간다. 기억함으로써. [서울의 봄 - 김성수] 우리는 나아간다. 기억함으로써. 나는 실제 인구가 3만 명 남짓 되는 작지만 아름다운 고장에서 자랐다. 나와 세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랬듯이, 우리 (초, 중, 고등) 학교는 늘 가던 곳으로만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강천산에 오르고, 금산에서 꽃을 보고. 물론 당시에는 지겨워했지만, 지금은 기억이라는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씬으로 남는 자연의 장면들이다. 가까운 대도시가 광주였던 탓에 광주로도 현장체험학습을 많이 갔는데, 그 시절 내가 보고 느꼈던 대부분의 것들이 아름다운 것이었던 반면, 광주에서의 현장체험학습에서 본 것들은 강산이 한번 하고도 반 넘게 바뀌는 시점까지도 가장 참혹한 장면들로 남아 있다. 광주(光州)의 5월이 유독 찬란한 것은 비참한 역사의 틈 사이로.. 2023. 12. 15.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크리스토퍼 놀란] 느린 기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크리스토퍼 놀란] 느린 기적 인사부서에서 일하게 된지 벌써 9개월이 되었다. 모든 업무에 있어서 예외적 허용 범위가 극히 좁고 따라서 인사관리가 유연하지 않은 조직특성상 내게 부여된 권한 또한 그 크기가 크거나 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300여 명의 성과급, 근평, 전보, 부서배치 등의 인사관리를 거의 전담해 왔다. 그렇게 아홉 번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 동안 지켜본 것은, 지난 30여 년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어떤 일상보다 어둡고 차갑다. 나는 성선(성품, 타고난 사람의 천성 성 性, 착할, 어질 선 善) 설을 오래 믿어 왔고, 현실의 대부분의 비극은 느슨한 연대와 부정의(아닐 부 不, 바를 정 正, 옳을 의 義)에 꾸준히 저항하는 지구력으로 상당 부.. 2023. 11. 20.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록 생생한 침묵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록 생생한 침묵 엄마 아빠를 담은 사진이 평일 낮 가족 메신저 방에 알람을 울린다. 오 뭐야. 어디갔슈? 했더니 딸들과 막내아들을 두고 놀러 다녀왔다는 미안함이 자뭇자뭇 묻어나는 설명이 이어졌다. 오, 아빠 그때 산 옷 입었네. 신발도 내가 사준거고. 고딩도 아니고 꼬까옷 맞춰 입고 놀러 간 거네. 귀엽당. 괜찮다는 마음을 에둘러 전하니까, 엄마가 개인 톡을 보내왔다. 구. 곡. 순. 담. 백세잔치라는 행사가 있어. 그 언젠가 순창에서 백세잔치 행사가 있었지. 그때 엄마가. 커피 무료 봉사를 맡았지. 노인들 총출동이야. 막 여기저기에서 장농 좀약 냄새. 그때가 시월인가. 쫌 쌀랑했지. 커피가 얼마나 나갔는지. 계속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따르니까 한 손에 면.. 2023. 5. 3.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Whatever, Wherever, Whenever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Whatever, Wherever, Whenever 하나만. 하나만 줘. 기다란 손톱 밑에 까만 반달처럼 낀 때, 거친 손바닥 위에서 동글동글 까맣게 일어난 굳은살. 턱 밑에 불쑥 나타난 손바닥 앞에서 나는 욕지기를 참고 있었다. 하나만 줘. 붕어빵을 내줄 수는 없었다. 양갈래 머리를 흔들자 거지 아저씨 손바닥에 머리카락 끝이 부딪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볼 일을 보고 나온 엄마는 은행 정문을 떡하니 막고 대치 중인 딸과 아저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드려. 붕어빵 더 사줄게. 기름을 먹어 얇아진 하얀 봉투를 부시럭 부시럭 구기며 붕어빵 한 개를 꺼내자, 나래야. 다 드리자. 엄마.. 2023.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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