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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록 생생한 침묵

by 헌책방 2023. 5. 3.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록 생생한 침묵

엄마 아빠를 담은 사진이 평일 낮 가족 메신저 방에 알람을 울린다. 오 뭐야. 어디갔슈? 했더니 딸들과 막내아들을 두고 놀러 다녀왔다는 미안함이 자뭇자뭇 묻어나는 설명이 이어졌다. 오, 아빠 그때 산 옷 입었네. 신발도 내가 사준거고. 고딩도 아니고 꼬까옷 맞춰 입고 놀러 간 거네. 귀엽당. 괜찮다는 마음을 에둘러 전하니까, 엄마가 개인 톡을 보내왔다. 구. 곡. 순. 담. 백세잔치라는 행사가 있어. 그 언젠가 순창에서 백세잔치 행사가 있었지. 그때 엄마가. 커피 무료 봉사를 맡았지. 노인들 총출동이야. 막 여기저기에서 장농 좀약 냄새. 그때가 시월인가. 쫌 쌀랑했지. 커피가 얼마나 나갔는지. 계속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따르니까 한 손에 면장갑을 껴야 할 정도였어. 노인들의 옷은 거의 구겨져 있고. 뭔가 좋은 수필이 될 거 같았는데 안 됐어. 새 옷 냄새나면 쫌 그런다고 섬유탈취제 뿌리는 아빠와 상통. 실은 엄마도 윗도리 옷 샀거든. 인터넷으로. 엄마가 보내온 카톡 속에서 그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오래된 장면이 눈에 아른 거렸다. 한참 들여다보다, 구. 곡. 순. 담. 이 뭐야? 하니까 구례, 곡성, 순창, 담양. 하고 시크한 답장이 돌아온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산 넘고 물 건너 백세 '잔치'에 가기 위해 정성껏 잔머리를 동백기름이나 포마드로 정리하고, 좀약 냄새가 묻은 좋은 옷을 멋들어지게 걸치고, 밭일 때문에 안 끼던 가락지도 끼고, 대문을 나서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나는 갑자기 폭소했다. 그리고 울컥이는 가슴을 도닥였다. 수필이 되지 못했다고 푸념하는 엄마의 짧은 카톡 속에서, 나는 여러 장면을 보았고, 수필을 느꼈으며, 포마드 냄새, 담배 냄새, 은단 냄새가 섞인 정장을 걸치고 오토바이로 신작로를 질주하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린 딸을 보았다. 이미 좋은 수필. 딸에게 툭 던지는 카톡의 껍질을 쓴 짧은 회고와 그리움을 담은 편지가 뚜껑이 살째기 열린 채 액정 위를 둥둥 떠다녔다.



어렸을 때는 저마다의 기억에 과거로 떠날 수 있는 텔레포트 버튼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람 안에 그런 버튼이 있음을 안다. 아마 구곡순담에 참석한 어르신들에게서 나는 그리운 향들이 엄마의 텔레포트 버튼일 것이다. 엄마랑 추석 연휴에 시장통을 걸어다니다, 문득 훅 끼치는 포마드 냄새를 맡은 적 있다. 엄마 코가 벌겋게 시큰대고, 눈가가 번들거리는 것이, 포마드 냄새는 아마 엄마에게 있어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엄마의 화양연화로 되돌아갈 수 있는 버튼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재빨리 모른 척했고, 물건을 내려다보는 척하며 엄마가 얼른 눈을 훔치는 것을 뒤통수로 바라보았다. 내게는 문학 작품이나 음악, 영화, 그림 같은 예술이 그런 버튼이 되어준다. 좋은 수필가이자 시인의 딸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운 덕분이기도 하겠다. 엄마는 어지간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작품이 아닌 한 내 책장에서 어떤 작품을 excammunicado(파문) 시킨 적이 별로 없었다. 그 덕에 나는 깨미책방 vip 손님이었다. <어 퓨 굿 맨> 같은 일급살인을 다루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영화를 빌려보기도 했고, <아마겟돈>을 보다가 아빠한테 성교육을 받았으며,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의 연주 장면이 수록된 공연의 DVD를 빌렸다가 반납하지 못한 상태로 깨미책방이 문을 닫아 버려서 마음의 부채감에 괴로워한 적도 있다. 마음속에 텔레포트가 많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기도, 축복이기도 하다. 그리고 깨미책방에는 소년챔프도 있었다. 나는 슬램덩크의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다 기억해 낼 만큼 빅팬은 아니지만, 그 시절. 바이올린을 더 이상 연습할 수 없는 밤이 오면 저녁밥이 다 되기를 기다리며 거실에 엎드려 농구코트 위를 달리는 오빠들의 모험을 입 벌리고 쳐다보는 아이였다. 그리고 깨미책방 vip는 자라 속독하던 작품의 주인공들이 흑백에서 컬러로 걸어 나오는 것을, CGV vip가 되어 아이맥스에 앉아 쳐다보았다. 텔레포트 버튼이 눌린 채, 숨도 못 쉬고. 마스크가 축축했다. 그야말로 <더 퍼스트 슬램덩크>였다.

 

좋은 컨텐츠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잣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외피와 내피가 다른 콘텐츠. 그러면서도 결국 한 이야기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조건. 본작은 원작 만화뿐만 아니라 원작자가 원작을 기반으로 재생산해낸 본작 역시, 좋은 콘텐츠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하는 면모를 두루 갖추었음을 여실히 증명한다. 동시에 작품은 시작부터, 본작이 새로운 이야기를 할 것임을 다짐하듯 드러낸다. 원작의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 강백호 대신 송태섭이 전면에 나서고, 원작에서 학교 밖 이야기보다 학교 안, 코트 밖 사정보다 코트 안 사정에 중심을 두고 좀처럼 다루지 않았던 가족사가 송태섭에게 부여된다. 송태섭의 어린 시절 비극이 묘사된 후에는 송태섭을 중심으로 본작을 관통하는 경기인 산왕전에 출전하는 북산고 팀원들이 흑백으로, 크로키처럼 그려지고, 관객들에게 걸어 나오다 점점 컬러가 입혀지는 방식으로 본격적인 이야기의 포문이 열린다. 이로써 본 작은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를 꽤나 노골적으로 시사하는데, 본작이 이야기의 시발점에 대한 회고이자, 잊혀진 시절에 대한 찬사이며, 어떤 것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빛이 바래지는 것이 아니라 되려 처음의 마음으로 더 선명해지기도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흑백 만화를 연상하게 하는 크로키, 스케치로 본 작의 시작과 끝을 맺는 방식은, 꿈을 향해 달리는 것 밖에 모르는 순수한 소년들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온 세상에 자신의 색채를 내뿜고, 다시 평범한 소년이었던 시작점으로 돌아가서도 오히려 화려했던 순간만큼이나 선명한 흑백으로 꿈을 만끽한다는 본작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 역시 흰 배경에 검은 선으로 남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화려한 색채를 가진 이미지에서 보다 더 강렬한 여운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는 우리는, 그 시절, 처음. 어땠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이로써 이야기의 처음을 기억하고, 함께 만들어왔던 이들에게 갖출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감사함을 전하는 데에 성공을 거둔다. 본 작은 소년들의 성장기의 외피를 하고,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이가 품은 꿈과 그 꿈이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슬램덩크는 코트 위에서 벌어지는 소년들의 '알려질만큼 알려진' 역사고, 마지막 에피소드인 산왕전 또한 결말까지 모두 발표되었다. 본작이 새로운 것을 쥐어짜기 힘든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관객에게 압도적인 호감을 주며 전혀 새로운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추억 필터를 감안하더라도 전적으로 뛰어난 연출력 덕분이다. 추억이 깃든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도 연출력이 견디기 힘든 수준이면 작품을 압도적인 호감을 가지고 지켜보기는 어렵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차세대 페이즈가 곤욕을 치르는 이유 역시, 추억 필터를 끼고 보더라도 호감을 갖기 어려운 연출력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메가폰 역할을 세련되게 해내는 캐릭터도 없는 작품일수록 더욱 그렇다. 반면 본 작은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도 많고 메가폰 역할을 노골적으로 수행하는 캐릭터가 부재함에도, 산왕전의 결말을 익히 알고 있는 기독자들도 경기에서 박진감을 느낄 수밖에 없도록 연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특히 경기 마지막에 꽤 긴 시간 동안 시끄럽던 경기장을 묵음 시켜 흑백만화라도 된 것처럼 만들고, 청각 충격으로 인물의 상황과 심정을 관객이 직접적으로 느끼고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유례없이 도전적이고 효과적이며 동시에 뛰어난 연출이다. 물론 원작에서도 북산고와 산왕공고가 77 대 78의 경기상황에서 강백호의 결승슛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묵음으로 처리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서막이자 종점이 될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공감각적 자극을 포기하는 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찰나의 순간이 영겁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같은 팀으로 뛰면서도 한 번도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던 서태웅에게 중요한 순간에 공을 패스받고,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플레이 원칙에 입각하여 자신감으로 득점을 시도하면서도, 날아가는 공이 버저비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소년 강백호의 마음을, 영겁처럼 느껴졌을 그 짧은 순간을, 이 난데없는 침묵이 생생하게 설명한다. 되려 이 침묵에 의해 공감각이 극도로 자극받는다. 그야말로 생생한 침묵이다.

 

본작에 상대팀은 있어도 악역은 없다는 사실도 산왕전을 지켜보는 이들이 의도한 것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한다. 대체로 어떤 대결구도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상대팀, 빌런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거나 능력이 없는데 시기, 질투 때문에 부적절한 행위를 시작하면 주인공 내지는 화자 측이 승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해진다. 동시에 대결이 가져야 할 긴장감과 몰입도가 낮아지면서 작품이 나아가게 하는 추동력을 빼앗긴다. 또한 빌런이 매력적이지 않고 절대 악에 가까울수록 지켜보는 이는 빌런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에게 몰입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응원을 강요받은 반작용으로 반발감과 거리낌을 체험한다. 반면 본 작은 산왕팀의 전력을 전국 최고의 것으로 설정하고, 팀원을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매력적인 캐릭터로 구성하며, 양 팀의 각 포지션별 라이벌 구도를 팽팽한 선의의 경쟁이 되도록 구성한다. 산왕전의 결말을 모르는 관객들은 꿈을 쫓는 소년들 중 누구의 편을 쉽사리 절대적으로 지지하지 못하고, 집중적으로 한 캐릭터에 몰입하더라도 다른 캐릭터나 상대팀을 미워하지만은 못하게 된다. 결말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그 결말을 새롭게 그려내는 방식에 감탄하고, 결말을 모르는 관객들은 산왕전에 거리낌 없이 작품에 몰입하며 마치 실제로 대결을 보고 있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애니메이션이라는 본작의 특성상 그림을 다루지 않을 수 없는데, 감독은 여전히 자신의 퍼포먼스 능력이 건재함을 본작을 통해 차고 넘치게 증명한다. 실제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그림으로 그려진 캐릭터의 움직임에서 감정의 전이를 느끼고 깊게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은 물론 뛰어난 스토리와 플롯, 연출력 덕분이겠으나, 적당히 현실적이고 적당히 비현실적인 작화가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표현론적으로 육체의 움직임 위주로 구성되는 운동 경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데에 본 작과 같은 수준의 작화는 필수적이다. 본작에서의 시각적 표현이 원작보다 질적으로 낮은 수준이었다면, 관객은 별다른 도리 없이 몰입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그것이 갖는 의미가 가장 중요하지만 어떤 문법으로 표현되느냐도 중요하다. 예컨대 본작이 <업>이나 <코코> 같은 수작의 문법을 따른다면, <스파이더맨:뉴 유니버스>가 본 작의 그림체로 표현된다면, 작품들이 본디 차지한 위상은 현격히 낮아졌을 것이다. 흑백에서 컬러로, 컬러에서 흑백으로 화면이 변환되는 수미상관과, 송태섭의 형의 의지와 송태섭이 형으로부터 계승한 꿈을 상징하는 빨간 아대가 형, 송태섭, 그녀의 엄마에게 이동하는 과정이 작품 전반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이, 의미로도 그렇지만 이미지적으로 긴 여운을 남기는 것도 뛰어난 시각적 표현과 애니메이션이라는 특성을 십분 활용한 연출력 덕분이다.


이렇듯 새로운 방식으로 슬램덩크를 다루고 제목에도 더 퍼스트를 붙여 본작이 슬램덩크 세계관에서 갖는 위치를 처음의 것, 가장 뛰어난 것으로 공고히 한 것은, 본작의 내용이 송태섭과 그를 중심으로 정대만의 알려지지 않는 과거를 그린다던지 하는 프리퀄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본 작을 통해 대중이 이 세계관을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포부이기도 하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자신이 만들어놓고 뛰어넘지 못하고, 또 오랜 기간 다시 다루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좋은 방식으로 다시 그리며 스스로의 과거를 극복하고, 작품이 있게 한 시작점을 바로 지금으로, 자의로 재설정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 의도는 본작이 원래 이 세계관의 주인공이나 인기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송태섭을 주요 인물로 설정한 데에서도 드러난다. 재구성된 플롯 안에서 송태섭은 자신의 심리적,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어 훌륭한 선수로 나아가고, 슬램덩크라는 세계와 산왕전이라는 대결이 진행되는 과정을 자의로, 자신 중심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송태섭의 형에 대한 감정을 미움, 원망, 무엇보다 죄책감 보다 책임감에 가까운 것으로 그리면서, 전국에서 가장 강력한 팀을 꺾겠다는 형의 꿈을 태섭이 이어받아 마침내 이룸으로써, 형의 그늘을 극복함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지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도, 감독이 스스로의 과거에서 극복해 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요컨대 본 작을 통해 캐릭터, 감독, 관객 모두가 성장과 극복을 확인하는 드문 경험을 하게 되고, 긴 여운을 남긴다.


새로 생긴 추억을 톺아보며 자랑하면서도, 자신보다 자녀의 감정적 안위가 우선이어서, 혹시 자랑에 서운해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미안해하는 엄마와 앞다퉈 보기 좋다며 엄마를 다독이는 동생들을 보면서, 인생이라는 실전 경기에서 내가 얼마나 든든한 팀을 가지고 있고, 얼마나 큰 힘이 되는 감독을 만났는지 실감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실전 경기일 인생에서 나는 과연 엄마에게 든든한 팀이 되어주고 있는지 돌아본다. 태섭의 엄마가 남편과 아들을 차례로 잃는 과정은 마치 팀이 와해되어 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그녀는 주장과 주장의 빈자리를 채운 주전을 차례로 잃고, 드넓은 코트 귀퉁이에 놓인 벤치에 외로이 혼자 남아 반쪽만 남은 팀으로 경기를 운영해야 하는 고독한 운명의 뒷모습으로도, 최선을 다해서 나아간다. 경기는 계속되므로. 나는 엄마가 감독인 우리 가족의 경기에서 주전으로 충분히 내 역할을 해내고 있을까. 나는 엄마가 주장으로 필드를 뛰고 있는 엄마의 경기에서 팀원으로, 혹은 응원석에서 괜찮은 어시스트를 하고 있을까. 나는 내 경기에서 괜찮은 감독으로, 선수로, 최선을 다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고 해서. 이 이야기는 이대로 끝나는 걸까.


인생은 늘 쉽고 즐겁지만은 않다. 실존적 존재로서의 모든 인간은 혼자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대답에 누구도 대신 대답해주지 않는다. 인생은 때로 코트 위에서 혼자하는 드리블 연습과도 같다. 그러나 끝없이 어깨로 바위를 밀어 올리며 산을 올라야 하는 지독한 인간 숙명 안에서 쌓이는 질문 위로 세계는 한없이 넓어지고, 그 드넓음 안에서 텅 빈 코트는 조금씩 작아진다. 세계는 더 넓어진다. 나는 누구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매달린 바스켓 앞에 텅텅 울리는 공소리와 몇 번의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는 다리, 흐르는 땀, 높이 떠오르기 위해 잔뜩 웅크린 발바닥이 우리 세계를 넓힌다. 찰나는 영겁처럼 흐르고, 모두가 숨죽인 세계에서 순식간에 코트에는 슉, 덩. 하고 덩크 슛의 소리가 흐른다. 더 많은 이야기가 듣고 싶다. 엄마의 수필은 이제 시작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막을 내리는 이야기에 더 퍼스트가 놓인다. 시끄럽지 않아도,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빨간 아대는 오늘도 닳아진 어깨로 힘껏 누군가의 손목을 받친다. 강백호의 말처럼, 영광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작가에게도. 북산고의 모든 이에게도. 우리에게도. 삶에 흐르는 이토록 생생한 침묵이, 그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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