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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크리스토퍼 놀란] 느린 기적

by 헌책방 2023. 11. 20.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크리스토퍼 놀란] 느린 기적

 

인사부서에서 일하게 된지 벌써 9개월이 되었다. 모든 업무에 있어서 예외적 허용 범위가 극히 좁고 따라서 인사관리가 유연하지 않은 조직특성상 내게 부여된 권한 또한 그 크기가 크거나 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300여 명의 성과급, 근평, 전보, 부서배치 등의 인사관리를 거의 전담해 왔다. 그렇게 아홉 번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 동안 지켜본 것은, 지난 30여 년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어떤 일상보다 어둡고 차갑다. 나는 성선(성품, 타고난 사람의 천성 성 性, 착할, 어질 선 善) 설을 오래 믿어 왔고, 현실의 대부분의 비극은 느슨한 연대와 부정의(아닐 부 不, 바를 정 正, 옳을 의 義)에 꾸준히 저항하는 지구력으로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밟고 있는 현실은 비극에 견주어도 지지 않을 만큼 참담하고, 깊은 심연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예의 연대와 지구력 좋은 저항정신이 한 뼘도 되지 못하는 짧은 한걸음 앞만을 겨우 밝히며 아주 느린 속도로 심연을 지우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동안 얼마나 운이 좋았던가. 내가 잠겨 있는 심연을 직접 보지 못했던 세월이 직접 들여다 볼 수 있던 이 몇 개월보다 압도적으로 길었다는 사실에, 이기적이게도 가끔 안도한다. 자신의 업무 처리가 타인의 인생에 높은 확률로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주는 업무적 피로도, 일상적인 인력 부족 때문에 발생하는 엄청난 업무량과 그로 인한 부담감, 업무적 난이도가 주는 압박감, 그러면서도 먹고살아야 한다는 삶이 주는 질긴 책무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모질지만 다정한 책임감. 특수한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늘 예민하고 날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평가 순위를 양보한 사람을 뒤에서 험담한다거나,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MZ로 깡그리 뭉개 저평가한다거나, 편을 갈라 조직 내 갈등을 조장한다거나, 사실 내지는 가공된 사실 혹은 거짓을 사실처럼 위장하여 개인의 사연을 가십화하는 행위는, 뚜렷한 이유나 명분도 없고 상기한 업무 특성을 비롯한 어떤 외부적 요인으로도 설명 불가능한 순수하고도 선명한 악의의 발로였다. 물론 이해관계와 무관한, 또렷하고 순수한 악의를 가진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악의가 일상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고, 악의(惡, 뜻 의意)는 악(惡)의 보편성을 타고 넓게 전파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심연은 그것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에게 옮겨 붙는다. 니체는 말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싸우는 사람에게조차 전염되는 것이 악의인데, 하물며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쉬이 전염되겠는가. 배타적인 집단을 포함하고 있는 좁은 사회에서 이런 악의에 전염되지 않고 정의로운 가치관을 지키며 운신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가 증명했듯 악은 평범한 얼굴로 사회에 내재되어 있으며 악의는 이런 평범함을 타고 숙주를 옮겨 다니며 전승된다.

 

구체적 실례를 들 수는 없지만 이른바 은따와 텃세 같은 이유 없는 악의가 표출 되는 사례들을 확인하고 인사부서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연구하면서, 되려 제도가 악의로 인한 선의(善意:법률적으로 특정 행위의 발생, 소멸 및 그 효력, 영향 등을 모르는 상태)의 피해자들을 결코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과 악의 평범성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기치로 하는 단체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사회 작동원리 중에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해한 그리고 무해하더라도 여전히 악의인 관념의 일상성만으로도 선의를 향한 내 믿음은 꽤나 큰 상처를 입었다. 물론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을 상호작용이 결정한다는 측면에서 호응은 반론보다 자신을 지키는 데에 훨씬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쉽고 효율적인 방법이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어른이 되면 이런 유치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나이나 시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개인이 얼마나 예민하고 부지런하게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악의 보편성을 경계하는가의 문제였고, 시스템적으로 악의의 일상적인 발동을 어떻게 제재하고, 완전한 선의의 편에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악의에 반작용하는 축으로 기능하는 구성원의 노고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러나 고착화된 구조를 뜯어고치는 것은 큰 공력을 요한다. 본부는 직장 내 괴롭힘, 성희롱 혹은 성폭력, 갑질 등을 근절하기 위하여 고심 끝에 제도를 제정 혹은 개정하는 것에 대안 구성의 초점을 맞췄다. 규정은 기관장이 나서 가해자에게 경고 등의 제재를 가하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고, 예방과 사후조치를 위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문제해결방안으로 내세웠다. 요컨대 권한과 권력을 가진 자에게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영웅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생각은 물리의 세계보다 더 심하게 관성의 영향을 받는다. 우리 사회는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상호작용의 편의성을 도모해 왔고, 현실을 타개하는 데에도 동일한 접근을 하고 있다. 가해자와 가담자, 방조자들의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이다. 영화를 소비하는 전 세계인이 마블의 팬인가와는 상관없이 에드게임 다음의 마블 페이즈가 몰락하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효율을 최대 가치로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영웅은 비단 스크린 안에서 상업적 수단으로써만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진정 필요한 존재다. 히어로물에 영광하고 그 몰락에 좌절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 몰입의 문제가 아니라 영웅의 필요성에 대한 증명과도 같다. 영웅은 직접적으로 불의에 타격을 입히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문제상황을 해결한다. 사회의 정상화를 영웅에 기대고자 하는 마음은 게으르기는 하지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지속가능성이 받을 타격을 고려하면 이 게으른 방법은 장기적 관점에서 효율성이라는 명분에도 흠결이 존재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영웅이 있어야만 하는 현실은 필연적으로 참담하다. 아니 비극적 현실은 필연적으로 영웅을 양성한다. 작용과 반작용이 쉼없이 일어나는 여기는 현실이다. 15년 만에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가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망설임 없이 예매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필모그래피를 좋아하고, 본 작을 비롯한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를 감명 깊게 본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15년 전의 내게 아직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 있고 선은 승리한다는 믿음을 더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던 본작이 현재는 어떤 감흥을 전할지 궁금했다. 때로 일기장이나 예전 피드, 메모를 살펴보며 지금의 나는 어디쯤에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가늠해 보기를 좋아한다. 본작은 예의 현실의 참담함과 악의 보편성 및 전염성을 연료 삼아 전개된다. Dark knight와 Dark night는 같은 발음을 공유한다. 기사와 밤이 k 한 글자를 두고 다르게 쓰이고 똑같이 발음된다는 사실은, 영웅의 존재가 긴 밤과 같은 현실과 필연적 상관관계 안에 놓여 있음을 역설한다. 나아가 영웅이 비극을 견디는 유약한 처방은 될 수 있더라도 궁극적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음을 시사한다. 표면은 다르지만 똑같이 발음되는 것처럼, 영웅의 존재가 비극을 달리 보이게 할지라도 그 궁극적인 모습은 전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크 나이트, 그러니까 배트맨은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이 선택한 방식보다 일상적이고 조금 더 보편적이며 더 적은 반작용을 갖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사회를 지킬 수 있는 하비 덴트를 선택한다. 그러나 넥스트 다크 나이트로 선택받고 자신 또한 그 길을 자처한 하비는, 자신이 고수해 온 단단하고 타협 없으며 따라서 좁은 길을 걷는 신념 때문에 금세 타락한다. 자신의 신념, 선의만을 고집하는 그의 성정의 상징이었던 앞면만 있는 동전은 사고로 인하여 뒷면을 갖게 되고, 투페이스로 전락한 하비는 자신의 악행의 결정권을 동전 던지기라는 우연성에 일임한다. 그리고 그가 선의만을 고집했던 시절처럼 과정을 우연에 기댈 뿐 결론은 늘 그가 새로이 고집하게 된 신념, 악으로 치우친다. 우리 세계는 당연히 내가 몸담은 조직보다 훨씬 크지만 악의를 가진 배타적 집단의 규모 또한 더 크고, 그 숫자도 많다. 구부러지지 않는 신념, 앞면만 존재하는 강한 의지를 운신하는 것은 더 넓은 세계에서도 좁은 세계에서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어렵다. 막다른 길 앞에서 좁은 길은 오갈 곳 없이 부서져 버리고 길 잃은 기사는 k를 잃은 채 자신이 들여다보던 심연으로, 밤으로 추락했다. 어둠에 침잠한 고담시에 필요한 극약처방은 배트맨이나 덴트 같은 영웅의 실존이나 조커로 상징되는 절대악의 사회로부터의 추방이 아니라 실용성, 효율성, 편의성을 내세워 일상에 침투하는 악의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공동체의식이다.

 

윤리의식과 공리주의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트롤리 딜레마를 기반으로 짜여진 조커의 사회실험은 다행하게도 완전히 실패하지만, 시민의 입장에서는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하다. 민주주의의 실현의 대원칙이자 주요 방식인 다수결에 의하여 시민들의 선택은 폭력으로 수렴하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평화를 이룩하고 조커의 믿음을 무력화했지만, 그 결과를 이룬 것은 다수가 아니라 양측의 행동대장이었던 중년 남성과 한 죄수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이 승리가 온전하기 위해서는 외압에 구부러질지언정 끊어지지는 않는 유연하고 느슨한 연대와 부지런하게 불의와 악의를 감별해 내는 시대정신이 필요하다. 이는 조커가 대대적인 사회실험을 하기 전에 배트맨과 고든에게 시행한 사회실험의 확장판이다. 심지어 배트맨과 경찰의 공조가 레이첼 도스의 죽음과 하비의 부상으로 인하여 반쪽짜리 성공에 머물렀다는 결과마저 반복된다. 배트맨과 고든이 진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덴트의 실패 하나만으로 고담시의 어두운 앞날과 희망 없음에 대하여 과민반응 한 것이 아니라, 짧은 승리의 순간 뒤에 숨은 진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는 배트맨의 독백과 알프레드의 편지를 불태움으로써 진실을 은폐하는 행위는 의미심장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진실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맞물리면 더더욱 그러하다. 당장은 마음이 편해질 수는 있지만 진실의 은폐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훗날 진실이 드러날 경우의 파장은 해결하기 더욱 어려운 무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조커와의 싸움은 승리했지만 고담은 절대악인 한 명을 세계에서 유리(떠돌 유 遊, 떠날, 떼어놓을 리 離)시켰을 뿐, 배트맨과 고든이 상징하는 선(善)이 악(惡)으로부터 승리한 것으로 확대해석할 수 없다. 악의 전염성은 보편성을 타고 더 넓게 번진다. 악의 보편성은 전염성을 타고 더 깊게 번진다. 절대악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와 합일을 반복했던 히스레저의 죽음이 생생한 경고문에 다름없다. 본작에는 간접적으로 드러났을 뿐이지만 와킨 피닉스가 조커로 열연했던 <조커>에서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조커라는 절대악에 매료되어 그를 따르고 모방하는 수많은 조커들이 흡사 무정부사태를 유발-해석은 분분하지만, 나는 이것이 조커의 상상 혹은 과대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작품 내 많은 표지를 종합적으로 독해한 결과지, 이 장면에 대한 개별적 판단은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조커 가면을 쓰거나 분장을 하고 거리에 나서는 장면은 충분히 발생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국민사형투표>에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특정인의 사형여부를 투표에 부치고 그 결과를 실제로 수행하는 집단, 속칭 개탈이 등장하는데 시민들 중 일부가 개탈에 동조하거나 개탈을 쓰고 다니는 장면이 등장한다. 익명성에 기대어 욕구를 해소하는 현상은 악플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세상에서 현실성이나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하기 어려울 것이다-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익명성 뒤에 숨은 수많은 이들이 악의 보편성의 증거이며, 악의의 전염성의 상흔이고, 조커의 후계자들이다. 심지어 나이트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하비마저도.

 

그렇다면 고담시는 아침을 부를 수 없는가. 구조는 바꾸기 어렵고, 악은 일상적으로 작은 세포부터 함락시키고 있다. 승리는 크지만 반쪽짜리인 상태로 오래가지 못하고, 패배는 단발적으로 연속하여 일어난다. 시민들은 하비의 말처럼 영웅(善)으로 죽거나, 악당(惡)으로 오래 살거나의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해결의 시작은 효율성의 논리에 매몰 되지 않고 천천히 작은 단위에서부터 심연의 영역을, 우리가 밟고 있는 지옥을 좁혀나가는 것(국민사형투표 권석주의 대사 중), 즉 악의 방법을 역이용하는 데에 있다. 고담시는 덴트나 웨인 같은 거대한 영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폭사할 위험에 놓여 있음에도 스위치를 선뜻 누르지 못한 중년의 신사나 죄수와 같은, 유약하고 평범하지만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영웅들의 찰나들이 모여서 스스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스위치를 누르자는 쪽에 중론을 모으기는 했지만, 앞에 나선 이들의 선택을 비난하지 않고 끝내 유혈사태 없이 자신의 존엄과 양심을 지킨 시민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선(下船)하여 세상으로 나와, 그때 감히 앞에 나서 그 스위치를 누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그래서 다행이었다고, 선의 힘과 그에 대한 믿음은 미약하지만 아직 남아 있다고. 이웃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배에 오르지 못한 이웃들의 아우성을 부두에 남기고 승선(昇船) 한 이 시민들은 잠재적 악인이자 동시에 살아 있는 양심, 우리가 기댈 일말의 선의 상징이다.

 

본작은 텍스트가 갖는 의미 외에도 표현론적으로 주목할 부분도 많은 작품이다. 첫 번째로는 고담시라는 배경과 웨인의 기술력은 다분히 극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몰입을 이끌어내는 현실감이 도드라진다는 점이다. 놀란의 작품이 대부분 그렇듯이 본작의 대부분의 씬은 CG 없이 아날로그로 촬영되었고, 실제 시카고의 도시 풍경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빠른 템포로 편집되어 숨 가쁘게 전개되면서 비현실적인 순간들에도 현실감이 순간적으로 교차하여, 마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페이크 다큐처럼, 모든 장면이 끊임없이 현실로 수렴한다. 조커의 테러 장면 또한 비현실적이고 연극적이지만, 빠른 리듬으로 화면을 이끌어 나가며, 배경음악이 몰입감을 더한다. 비현실적인 테러 장면이 빠른 리듬으로 지나면 테러에 쓰였던 스쿨버스가 다른 스쿨버스의 대열에 끼어드는 장면이 등장하면서 스크린 안의 일상성도 금세 회복된다. 이로써 본작은 지극히 21세기스러운 등장인물과 배경설정이라고 할 수 있는 히어로와 안티히어로 그리고 첨단기술이 등장하되, 영화적 호흡을 비롯한 전개방식과 제조방식은 고전영화의 것을 따르는 다층적 매력을 갖추게 되었다. 양자역학, 시공간 초월 등 첨단의 기술을 다루면서도 고전방식을 고수하는 크리스토퍼 놀란표 영화의 품위가 본작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진다.

 

두번째로는 절대 악을 등장시켜 양측의 논리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하고, 선과 악의 대립으로 캐릭터들과 그들이 속한 진영 논리를 평면화시키면서도, 절대악 이외의 모든 것은 선과 악의 경계에 놓아 층위를 만든다는 점이다. 이 또한 연출의 힘이자 영화적 미학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예컨대 배트맨모빌로 조커를 치어 죽일 수 있었던 배트맨이 차마 그를 치지 못하고 그 직전에 멈추는 장면이라던지, 배트맨이 지하벙커에서 수없이 많은 화면을 전시해 두고 고담시의 모든 핸드폰을 도청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웨인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소유하고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결핍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조커와 유사점을 가지고 있고, 수단보다 목적의 정당성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점도 비슷하다. 다만 배트맨에게는 레이첼이 있지만 조커에게는 레이첼과 같은 존재마저도 없다는 점이 다르다. 웨인의 공명심은 표면적으로 고담시를 사랑하고 무해한 욕구로 하루를 살아내는 선량한 시민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지만, 사실 그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평범한 삶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웨인은 그가 추구하는 보통의 삶이 레이첼과의 결합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고, 그녀와의 사랑을 이루면서 자신이 평범한 사람으로 회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을 때의 평화를 미리 준비한다. 이때 주목할만한 뉘앙스 중에 하나는, 선을 수호한다는 그의 공명심(공평할 공 公, 밝을 명 明, 마음 심 心, 공을 드러내려는 마음을 가리키는 功名心과 동음이지만 뜻이 다르다.)이, 레이첼 도스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석했을 때는 인정 욕구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특히 하비와 레이첼의 식사 자리에 웨인과 모델 지인이 합석하는 장면은 웨인의 배트맨 활동이 사감(사사로울 사 私, 느낄 감 感)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레이첼은 직업의식이 투철한 검사이고, 마찬가지로 순결한 신념으로 선의 구현에 앞장서는 연인 하비와 함께 고담의 정의 구현을 위하여 동분서주하고 있으므로, 웨인의 배트맨 활동이 공명심에서 출발하였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활동을 유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연출 중에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레이첼 도스의 역할을 익히 알고 관람하면서도 여전히 밋밋하게 느껴진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웨인의 활동 동기가 다소 희미해진다는 점이다. 물론 웨인의 활동이 완전히 정의감 때문만은 아닌 것 또한 여전히 분명해 보인다. 더불어 웨인은 자신이 배트맨이라는 사실, 밤마다 도시의 기사로 활동하고 있음에 즐거움을 느끼기도 한다. 회의에서는 졸고 회의 외의 다른 활동에 심드렁한 그가, 배트맨으로서의 활동에 있어서는 주변과 의논할 때부터 이미 눈에 띄게 활기차지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는 갱단의 말단 조직원들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팔을 뽑아버리거나 두 동강 내버리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지만, 조커는 차마 치어 죽이지 못한다. 웨인은 조커와 그가 하는 행동의 원인에 대하여 궁금해하고, 그 근원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며, 이 호기심은 조커가 취조실에서 내뱉은 대사, You complete me와 맞물려 조커가 배트맨에게 갖는 관심과 호기심이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배트맨이 조커와 손을 잡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행위겠으나, 영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고담시는 완전히 길을 잃을 것이기 때문에, 히어로에 비극의 해결을 의존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위험하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결정적으로 본작은 배에 탄 시민들과 죄수들이 이분법 중에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게 함으로써 주어진 두 가지 선택지에 얽매이는 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제시하여, 관객들의 마음속에서 선과 악에 대한 다층적 논의가 가능하게끔 한다. 이처럼 본작은 조커는 설명이 필요 없는 절대악의 화신으로 묘사하지만, 배트맨을 비롯한 다른 인물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 있거나 공명심과 사감이 혼재하는 상태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런 연출이 감독은 동전의 양면처럼 이분법적으로 진영을 나눠 전개를 편리하게 하는 대신, 관객은 캐릭터들을 살아 숨 쉬는 다면적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세번째로는 단연 본작의 화룡점정이자 백미라 할 수 있는 배우들의 호연이다. 연기야말로 영화 미학의 주요 관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전설이 된 히스레저의 조커 연기뿐만 아니라, 웨인역으로 분한 크리스찬 베일, 하비 덴트역으로 분한 아론 에크 하트, 알프레드역의 마이클 케인, 짐 고든 역의 게리 올드만, 루시어스 역의 모건 프리먼, 그리고 역할은 작지만 존재감이 좋았던 킬리언 머피까지 본작에 출연하는 거의 모든 배우가 인상 깊은 연기를 남긴다. 특히 본작을 유작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난 히스 레저는, 절대 악 그 자체가 된듯한 혼신의 연기를 펼친다. 대화할 때 입맛을 다시듯이 혀를 낼름거린다던지, 말을 조금씩 더듬는다던지, 머리를 쓸어 올리는 버릇까지, 절대악이라는 관념을 아무도 직접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람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납득하게 된다. 조커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아무도 웃지 않는 상황에서 혼자 비통한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본작을 관통하는 역설로 기능한다. 아무도 웃지 않는 지독한 농담을 하는 자, 그러나 아랑곳 않고 홀로 웃는 자가 바로 조커인 것이다.

 

신념은 사치일 뿐인가. 수많은 신념이 부딪히는 현실에서 한가지 믿음만을 고집하는 데에는 웨인가(家) 같은 부와 권력이 필요하다. 생존의 위협 앞에서 신념은 쉬이 깨진다. 그러나 오늘 신념을 포기한 자는 내일 한 뼘 더 넓은 지옥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신념이 오늘의 사치일지는 몰라도, 동시에 내일의 생존을 위한 가치 투자이기도 하다. 운은 스스로 만드는 것인가. 인간은 운명의 힘 앞에 무력하다. 최선의 선택에도 비극의 열매가 매달릴 수 있고, 믿음은 가차 없이 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인간은 죽기 위해 살 수 없다. 이 끝에 어떤 결과가 맺힐지라도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내려야 하는 것 또한 인간의 운명이다. 그 선택들이 모여 연대의 의미를, 미래를 결정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선택적 숙명. 인간은 자신의 의미를 결정하고, 숙명을 선택한다. 악이 그러하듯이 모든 것을 우연성에 일임할 수 없다. 운을 스스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영웅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가. 하비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경찰들, 시민들이 진정한 영웅이다. 비극은 영웅을 필요로 하지만, 어떤 영웅도 혼자 힘만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다. 공동선에 대한 신념으로 사선에 선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은 그 작은 영웅들의 합심으로 구원받는다. 두척의 배가 밤이 내린 바다 위에서 그러하였듯이. 전투 직전의 비장감마저 맴도는 재개봉관에서, 양 옆에서 쉴 새 없이 다리를 떨어대는 젊은 학생들에게 극장 에티켓을 지켜달라는 쓴소리를 남겼다. 의도를 가지지 않고 한 그 행동들이 악의인가. 내가 한 행동은 정의인가. 글쎄, 그렇지는 않다. 15년 전처럼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며 우리 사회에 선은 결국 승리한다고 되뇌는 낭만적인 순간은 없었다. 그 대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작지만 선명한 악의나 유해한 행위가 주변을 물들이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고 그 다짐을 작은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무심코 극장에서 크게 다리를 떠는 행위-내가 앉은 좌석 등받이가 흔들릴 정도였다.-가 누군가에게는 큰 불편일 수도 있다는 작은 한마디 경고가 앞으로 그들이 겪을, 그리고 그들 옆에서 누군가가 함께 겪을 수많은 문화생활을 뒤바꿀 수도 있다. 귀가 여려 쉬이 다른 소리에 흔들릴 수 있는 후배들은 다독이고, 내가 확인한 어떤 악의도 못 본 척 지나가지 않고 대항할 것이다. 내게는 규정이 위임한 어떤 권한도 없고 무력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으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상의 영웅으로 남고 싶다. 적어도 그들은 누군가의 심장에 폭탄을 심는 조커는 아니므로, 두렵지 않다. 미력한 우리 중 누구라도 영웅이 될 수 있고 그 작은 기사들의 힘이 모여야 비로소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발전 방법이고, 선의의 기적이다.

 

동틀녘, 새벽의 직전이 가장 어둡다. 그리고 아직. 어둠의 기사가 빛나는 어두운 밤. 여전히 고담은 그 한가운데에 남아있다. 작은 영웅들이 눈을 떠 오늘을 맞을 새벽을 기다리며.

 

 
다크 나이트
정의로운 지방 검사 ‘하비 덴트’, ‘짐 고든’ 반장과 함께 범죄 소탕 작전을 펼치며 범죄와 부패로 들끓는 고담시를 지켜나가는 ‘배트맨’ 그러던 어느 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범죄 조직은 배트맨을 제거하기 위해 광기어린 악당 ‘조커’를 끌어들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조커의 등장에 고담시 전체가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급기야 배트맨을 향한 강한 집착을 드러낸 조커는 그가 시민들 앞에 정체를 밝힐 때까지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죽이겠다 선포하고 배트맨은 사상 최악의 악당 조커를 막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마지막 대결을 준비한다. 어둠의 기사 배트맨 VS 절대 악 조커 운명을 건 최후의 결전이 시작된다!
평점
9.0 (2008.08.06 개봉)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크리스찬 베일, 히스 레저, 아론 에크하트, 마이클 케인, 게리 올드만, 매기 질렌할, 모건 프리먼, 모니크 커너, 론 딘, 킬리언 머피, 친 한, 네스터 카보넬, 에릭 로버츠, 리키 코스터, 안소니 마이클 홀, 키이스 사라바이카, 콜린 맥파란, 조슈아 하토, 멜린다 맥그로우, 나단 겜블, 마이클 비유, 마이클 스토야노프, 윌리엄 스밀리, 데니 골드링, 마이클 제이 화이트, 매튜 오닐, 윌리엄 피츠너, 빈센조 니콜리, 진관희, 윈스턴 엘리스, 키이스 쿠프레레, 리차드 딜레인, 로버트 스톤, 크리스 윌슨, 트리스탄 타이트, 토미 타이니 리스터, 매튜 레이치, 크레이그 히니, 앤드류 빅넬, K. 토드 프리먼, 낸시 크랜, 폴 버차드, 빈센트 리오타, 니키 캣, 제니퍼 녹스, 패트릭 리하이, 윌 자른, 니디아 로드리게즈 테라시나, 그레고리 빔, 얼루미지 얼라우미, 톰 맥엘로이, 척키 베니스, 패트릭 클리어, 샘 디렌스, 제임스 파루기오, 세라 제인 던, 앤디 루더, 에릭 헬만, 제임스 피에로, 베아트리스 로젠

 

 

CGV에서 받은 필름마크 들고 좋아하는 놀란 사랑꾼

*이 날 바프 찍는 날이라 메이크업 해서 셀카 많음 주의*

유진 메이크업 최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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