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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기7

[인셉션 - 크리스토퍼 놀란] 일상은 운명보다 위대하다 [인셉션 - 크리스토퍼 놀란] 일상은 운명보다 위대하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파가니니, 베토벤 같은 악성( 樂聖)이 되고 싶었고, 스즈키, 하농, 체르니 같은 기본 교재로 연습할 때 유독 심하게 짜증을 부렸다. 서울로 콩쿠르에 나갔던 날, 턱에도, 여린 손가락 끝에도, 굳은살 한 점 박히지 않은 하얀 아이가 1등을 거머쥐는 것을 보면서, 나는 평생 2등에 머물 것임을 깨달았다. 음악가로서 원대한 업적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선택한 꿈은 검사였다. , 의 주인공들처럼 억울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법률가가 되고 싶었고, 큰 사건만 도맡아 해결하는 대단한 검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에 진학하던 해에 로스쿨이 도입되었고 가까스로 2학년 때 법학과를 복전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우여곡.. 2023. 6. 9.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록 생생한 침묵 [더 퍼스트 슬램덩크 - 이노우에 다케히코] 이토록 생생한 침묵 엄마 아빠를 담은 사진이 평일 낮 가족 메신저 방에 알람을 울린다. 오 뭐야. 어디갔슈? 했더니 딸들과 막내아들을 두고 놀러 다녀왔다는 미안함이 자뭇자뭇 묻어나는 설명이 이어졌다. 오, 아빠 그때 산 옷 입었네. 신발도 내가 사준거고. 고딩도 아니고 꼬까옷 맞춰 입고 놀러 간 거네. 귀엽당. 괜찮다는 마음을 에둘러 전하니까, 엄마가 개인 톡을 보내왔다. 구. 곡. 순. 담. 백세잔치라는 행사가 있어. 그 언젠가 순창에서 백세잔치 행사가 있었지. 그때 엄마가. 커피 무료 봉사를 맡았지. 노인들 총출동이야. 막 여기저기에서 장농 좀약 냄새. 그때가 시월인가. 쫌 쌀랑했지. 커피가 얼마나 나갔는지. 계속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따르니까 한 손에 면.. 2023. 5. 3.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Whatever, Wherever, Whenever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Whatever, Wherever, Whenever 하나만. 하나만 줘. 기다란 손톱 밑에 까만 반달처럼 낀 때, 거친 손바닥 위에서 동글동글 까맣게 일어난 굳은살. 턱 밑에 불쑥 나타난 손바닥 앞에서 나는 욕지기를 참고 있었다. 하나만 줘. 붕어빵을 내줄 수는 없었다. 양갈래 머리를 흔들자 거지 아저씨 손바닥에 머리카락 끝이 부딪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볼 일을 보고 나온 엄마는 은행 정문을 떡하니 막고 대치 중인 딸과 아저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드려. 붕어빵 더 사줄게. 기름을 먹어 얇아진 하얀 봉투를 부시럭 부시럭 구기며 붕어빵 한 개를 꺼내자, 나래야. 다 드리자. 엄마.. 2023. 4. 21.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의 의미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의 의미 '식구'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족(家族)은 뿌리를 같이하는 친족, 특히 혈연 관계에 있는 이들을 묶어 부를 때 쓰고, 가정(家庭)은 혈연, 혼인으로 성립된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 자체 혹은 그들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부를 때 쓴다. 때문에 내가 속한 가족이나 앞으로 이룰 가정에 속하는 이들은 아닌, 그러나 친밀한 관계를 맺어 집단을 이룬 이들을 지칭할때, 가족과 가정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적확하지 않다는 감각이 있다. 반면 음식을 나눠 먹는 입들이 모인 모임, 그 특별함을 말하는 단어 '식구(食口)'에는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누군가와의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함의 되어 있다. 그럼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작품을 통해 그리기 즐기곤 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 2022. 6. 28.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아쉬가르 파라디] 비극의 점층과 균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아쉬가르 파라디] 비극의 점층과 균열 눈꺼풀에 든 멍은 오래 간다. 중학교 1학년생이었을 때, 중학생이나 돼서 운다고 이웃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하면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울면서 집에 갔다. 사실 내내 울지 않고 학교에서 오후를 잘 보냈었는데, 엄마에게 가는 집 계단 위에서 괜히 더 서러워져서, 참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시골 깡촌에 있는 여중학교에 다녔지만, 선행학습을 마친 친구들의 진도를 따라잡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흔한 속셈학원, 수학학원 한번 다녀본 적 없이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 언니들이 푸는 문제도 척척 푸는 친구들 틈에서 뒤쳐짐의 괴로움에 몸부림쳐야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본격적인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는 초조함 때문에 밤낮 없이 공부했고, 덕분에 늘 .. 2022. 5. 4.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상상력을 잃으며 —나래미온느와 머글 아빠— / 영화 리뷰, 후기, 용산 아이맥스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상상력을 잃으며 —나래미온느와 머글 아빠— 누가 해리포터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응, 해덕이야-하고 대답해야할지, 아니, 책은 몇 번 읽었는데 해덕까지는 아니고-라고 해야할지, 헷갈린다. 살면서 해리포터 세계관을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들 중에 원작 책을 영화화한 작품을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안 보기까지 한 사람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 나 자신만 빼고. 지금은 영화관이 들어섰지만 내가 밤새 몰래 불을 켜고 해리포터를 읽던 시절에는 우리 동네, 아니 우리 군에 영화관이 없었다. 영화가 개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몇 날 며칠 아빠를 조르고, 꼬드겨, 아빠의 회색 현대 뉴 엑셀 a.k.a. 4333을 타고 광주에 갔다. 인터넷 영화 .. 202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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