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상상력을 잃으며 —나래미온느와 머글 아빠—
누가 해리포터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응, 해덕이야-하고 대답해야할지, 아니, 책은 몇 번 읽었는데 해덕까지는 아니고-라고 해야할지, 헷갈린다. 살면서 해리포터 세계관을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들 중에 원작 책을 영화화한 작품을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안 보기까지 한 사람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 나 자신만 빼고.
지금은 영화관이 들어섰지만 내가 밤새 몰래 불을 켜고 해리포터를 읽던 시절에는 우리 동네, 아니 우리 군에 영화관이 없었다. 영화가 개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몇 날 며칠 아빠를 조르고, 꼬드겨, 아빠의 회색 현대 뉴 엑셀 a.k.a. 4333을 타고 광주에 갔다. 인터넷 영화 예매가 보편화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가능하더라도 예매하는 방법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순전히 상영시간표를 맞출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기대 무작정 영화관으로 향했다. 아빠도 영화관 경험이 몇 번 없어서, 가는 내내 초조해했다. 나랑 루나는 뒷좌석에 앉아 거의 달달 외우기 시작한 <마법사의 돌>을 복습하면서, 마법지식이 전무한 코리안 머글 아빠의 해리포터 기초지식을 다져주었다. 운 좋게도 영화관은 한산했고, 20분 정도만 기다리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나랑 루나는 손을 잡고 화장실에 다녀오고, 아빠는 부산히 표를 챙기고, 어디서 영화를 보면 되는지, 좌석은 어딘지, 확인하러 다녔다. 영화가 끝나고 근처 경양식 집-몇 년 전, 루나 머리통이 깨졌던 바로 그 집([H마트에서 울다 - 미셸 자우너] 오래된 사유는 없지만 영원한 사유는 있다. 참고)-에서 돈까스를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총체적으로 아주 엉망이었다. 처음에는, 이리저리 헤매고 그래서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작품에서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하면서도, 우리를 데리고 집에서 한시간 반거리의 영화관에 가 준 아빠에게 고마워서, 너무 재미있었다고 극찬을 하고 양쪽에서 그의 양볼에 뽀뽀를 했다. 그러나 어린 나의 성격은 지금보다 더 배려에 취약했다. 배 부르게 먹고, 4333에 올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분했다. 지금은 어느 부분이 그렇게 맘에 안들었고, 내 상상력이 영화보다 얼마나 더 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영화가 책, 정확히 말하면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마법세계와 상당 부분 다르다는 사실에 충격 받았다. 아빠는 머글 기술력의 한계, 책과 영화의 다른 매력, 각색의 미덕, 인간의 상상력의 무한함 같은 것들을 설명하며, 마법사 용어를 총동원하며 급발진하는 딸을 달랬다. 하지만, 큰 딸은 "귀지 맛이야!"하는 대사까지 똑같은데 어떻게 어떤 부분은 같고 또 어떤 부분은 다를 수 있는지, 그 대단한 사람들이 왜 나 같이 평범한 초딩의 상상보다 덜 마법적인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짜고, 한탄하고, 차창 밖에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이 더 낫다며 징징댔다. 연년생 동생 루나는 코를 파며 누워 심드렁하게 자신은 너무너무 재밌었고, 진짜 그 세계에 간 것만 같았으니 자신만은 또 데려가달라고 아빠에게 영리한 아양을 부렸다. 그 이후로 책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은 거의 보지 않았고, 특히 원작을 사랑할수록 그 경향은 심해졌다. 지금은 기억 나지 않는 디테일이 더 많아졌지만, 그 시절 나는 지팡이만 있으면 일상 생활을 주문으로 해낼 수 있을 정도로 해리포터를 사랑했고, 푹 빠져 지냈다. 빨간색깔 표지를 한 <퀴디치의 역사>, 초록색깔 표지를 한 <신비한 동물사전>처럼 스쿨북도 구매해서 대여자 목록 맨 하단에 내 이름을 또박또박 적기도 했다. 요컨대 나는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매우매우 좋아했고, 그래서 책으로만 읽었다. 그러니 누가 해리포터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조금 헷갈려 하다가 어렸을 때 그 원작을 정말 좋아했었어, 지금은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원작은 좋아해-하고 장황히 설명할 수 밖에 없다.
2016년 해리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을, <신비한 동물사전>의 저자 뉴트 스캐맨더를 중심 인물로 하는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 Fantastic Beasts and Where to Find Them>이 개봉했다. <해리포터> 본작을 손에서 놓은지도 오래됐고, 이 작품은 스토리상 원작이라고 부를만한 작품도 없으니, 괜찮겠다 싶어 당시 남자친구와 선선한 마음으로 관람하러 갔던 것이 기억난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를 보고 나와서, 함께 관람한 사람과 술을 마시면서 영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문화생활 중 가장 중요한 의식인데 내가 그날 사람 많은 술집에서 정말 펑펑 울어서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살고 있을지 전혀 모르겠는, 동시에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는) 그가 영문도 모르는 채 나를 달랬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평범했지만, 비주얼과 사운드 측면에서 매우 훌륭했다. 음악 감독이 한스 짐머가 아니었는데도 화면과 음악은 충분히 훌륭하게 마법세계와 어우러졌다. 이 기억 덕분에 나중에 한스 짐머가 내한했을 때 그 가운데에 앉아, 해리포터 관련 트랙만 나오면 열광하고 울음짓는 사람들을 단번에 이해했다. 또, 그 때도 이미 조금씩 생각나지 않기 시작했던 예전의 상상과 이 실사를 비교할 수 없어 아쉬웠다. 아니, 이내 곧, 화면 이상의 상상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상상력의 마모가 슬퍼졌다. 그리고, 아빠를 생각했다. 지금은 이토록 간편하게 앱으로 자리를 예매하고, 상상 이상의 장면들과 몰입을 더하는 음악을 버무린 작품을 볼 수 있는데. 그 시절 두 딸을 데리고 한 시간 반, 엑셀을 운전해서 영화관에 갔던 그가. 이 절체절명의 행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두 딸의 의전에 빈틈 없게 하고자 구슬땀 흘렸던 그가. 큰 딸의 울음 앞에서 얼마나 망연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되려 미안하다고, 울지말라고 말하고야 말았던 순간에, 그가 얼마나 울고 싶었을지도. 결국 나는 울고야 말았다. 이렇게 증발해 사라져버릴거면서. 엉엉. 엉거주춤 테이블 곁에 선 허둥지둥하는 그의 몸짓에서 그 날의 아빠를 발견할 때마다 더 심하게 울었다.
결국 나는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에 대하여, 영화를 정주행하거나, 하루 종일 전시리즈를 상영하는 영화관의 행사에 참여할 정도의 열정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듄>의 개봉 소식에 개봉 첫날 아이맥스로 달려가고, <신비한 동물 사전> 시리즈의 개봉을 기다릴 정도로 내 상상력의 한계에 점차 무감해졌다. 더 이상 상상 이상을 구현하는 화면 앞에서 슬퍼하지 않게 되었고, 영화관에 데려가던 아빠의 심장을 상상하며 콧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이제 제법 냉정을 찾아서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Fantastic Beasts: The Secrets of Dumbledore>를 관람하고, 아쉽다고 생각하며 영화관을 나왔다. 작품의 제목처럼, 그리핀도르나 슬리데린에 비해서는 팬덤이 얕은 후플푸프 출신의 뉴트 스캐맨더와 그가 사랑한 신비한 동물들에 대하여 그렸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 히포크리프나 피닉스처럼 주목 받고 사랑받지는 못하지만, 충분히 사랑스럽고, 마법세계의 가장 끝에서 세계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작은 나사와도 같은 존재, 니플러 테디, 보우트러클 피켓 같은 신비한 동물들에 대한 갈증이 오히려 자극 될 뿐이었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이제 이름을 들어도 그 모습을 상상해낼 수 없는 호그스미드, 닥스의 망토와 비슷한 류의 망토를 걸치고 뾰족한 모자를 쓴 모습이 아니라, 제임스본드 같은 멋진 영국 신사 차림새를 한 오러들을 확인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작품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마법 정부보다 마법부가 훨씬 익숙하고, 이제 호그스미드의 이름을 들어도 유럽의 어느 거리에서 본 골목 이상을 상상해 낼 수 없고, 오러라면 닥스의 망토와 비슷한 류의 망토를 걸치고 뾰족한 모자를 쓴 모습만을 상상하는, 과거형 <해리포터> 애독자이므로.
사르트르의 말마따마 실존은 늘 본질을 앞서지만, 자신에게 자신은 누구인지 묻고, 그 질문에 대답하며 실존을 이룩하고 나면,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신 삶의 정수, 에센스, 본질을 확인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작품은 해리포터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실존(내지는 생존)'은 물론이고, 본질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가치인 사랑(이를 둘러싸고 하도 많은 논란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긴하나 이성애, 동성애, 우정, 모성애와 부성애를 포함한 친인척간의 우애도 모두 사랑에 기반하기 때문에 각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과 신념에 대하여 쉽게,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게 이야기한다. 110여년간의 긴 삶 속에서 해리포터와 같은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을 친손주처럼 가르쳐 장성시키고, 뉴트 스캐맨더와 같은 너드 오브 너드를 온몸으로 감싸 지키며, 제이콥 코왈스키를 비롯한 머글들도 마법사와 동등하게 귀하고 마음이 넓다고 생각했던, 고귀한 마법사 알버스 덤블도어가 마법사, 그것도 순수혈통만이 최고의 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고, 때문에 마법사들은 합심하여 머글을 짓누르고 세계를 제패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린델왈드와 잠시나마 뜻을 함께 했던 이유는, 아마도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버스는 물론 모든 존재가 품은 신념은 저마다 완전히 다르고,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신념이더라도 서로 존중해야한다는 신념관을 가졌으나, 그 신념관마저도 상대의 신념이 다수가 동의하기 어려운 파괴성을 가지고 있을 때만은 예외적으로 작용했다. 펜던트에 깃든 마법의 힘에 기대 온 그린델왈드의 얕은 사랑과 굳은 신념, 폭 넓게 사랑하고 존재를 지지해왔던 알버스의 깊은 사랑과 넓은 신념의 대결은 알버스의 승리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덤블도어는 신념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상대가 자신 사랑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를 지키기 위해 싸웠고, 그린델왈드는 마지막까지 이기고자 싸우며, 누구도 이기지 않지만 사랑의 증표는 산산조각 나고 만다. 20여년 후, 알버스와 그린델왈드는 다시 결투를 벌이고, 패배한 그린델왈드는 죽을때까지 누멘가드에 수감된다. 이 긴 사랑의 깨어질 수 밖에 없는 숙명과, 끝끝내 승부를 보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을 신념의 부닥침이 작품이 끝나고서도 긴 여운을 남긴다.
부수적으로는 신동사 시리즈를 볼때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스캐맨더 형제의 비주얼, 특히 영국 오러 국장으로 출세하기까지 한 테세우스 스캐맨더(배우 칼럼 터너)의 영국적 실루엣을 빼놓을 수 없다. 에디레드메인과 뉴트의 싱크로율이 찰떡 이상인 것, 귀여움이 치사량을 도과하는 것도 물론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또, 셜로키언이라면 수긍할 수 밖에 없는 대표적인 영국 형제, 마이크로프트 홈즈와 셜록 홈즈가 스캐맨더가 형제, 덤블도어가 형제와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는 점도 흥미롭다. 세 형제들 모두가 형은 잘나가는 관료이자 다재다능한 능력자인데에 반해, 동생들은 역시 영특하지만 어딘가 남다른 면이 있고, 그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 특이(내지는 특별)한 재원으로 묘사된다. 특히 영드 <셜록>에서는 홈즈 형제에게 숨겨진 여동생 유러스 홈즈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그녀가 죽은 덤블도어가의 고명딸이자 무자비한 머글의 폭력에 노출되어 ptsd를 앓다가 그만 옵스큐러스가 되고 말았던 아리아나 덤블도어와 겹쳐보여 (물론 아리아나와 유러스의 본성은 상당히 다른 듯 하다) 영국을 대표하는 형제들을 비교하는 데에 재미를 더했다. 조니 뎁 대신에 그린델왈드를 연기한 매즈 미켈슨이 엄청나게 섹시하다는 것도 큰 매력이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아빠를 꾸짖었다. 당신은 책 표지에 있는 커다란 나무 그림을 보며 "엄마, 여기에 매미가 살아?", 무당벌레를 보며 "엄마, 무당벌레는 왜 무당벌레야?"하고 묻고, <전설의 고향>을 보고 있는 귀신, 없는 귀신을 다 상상하며 낮에도 바지를 젖히는 실수를 하고, 미술학원에서 허수아비 얼굴이 타서 빨갛게 칠했다가 혼났다고 짐싸서 집에 오는 애인데 무슨 영화예요? 애가 얼마나 낙담을 했어 지금? 당신이 애들이랑 없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애한테 왜 이렇게 관심이 없어? 같은 반말과 존대말이 섞인 소리가 꽤 긴 시간동안 안방에서 새어나왔다.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에게 첫경험을 안겨준 대견한 큰 딸 일이라면 아빠도 아는 사연을 하나하나 늘어놓는 것과 본론을 말하기 전에 긴 시간 변죽을 울리는 것을 즐긴다. 아빠를 조르고 꼬드겨 영화관에 갔던 장본인은 안방 앞에서 서성이다 어쩔 수 없지, 둘 다 혼나는 것보다야 아빠만 혼나는게 낫지- 하면서 방에 돌아와 엎드려 <해리포터>를 읽었다. 잔뜩 풀이 죽어 큰 딸의 서가에 들어온 아빠에게 돈까스도 맛있었고, 엄마 없이 하는 외출도 신났다고 말해줬다. 아직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이 남았는데, 상상력을 거의 다 잃어서인지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타인의 상상력의 소산에 기대어 생각해보자면, My philosophy is that worrying means you suffer twice. 뉴트 스캐맨더 말이 맞았다. 아빠는 메리야스차림으로 얄미운 큰 딸을 꼭 안아줬다. 나래미온느도 머글 아빠를 꼭 안아줬다.
용산 아이맥스에서 오랜만에 영화관람>_< 가운데 블럭 맨 뒷줄에서 봤는데, 이런 영화는 맨 뒷줄도 충분히 괜찮았어요.
여전히 멋있었던 주드로, 에디 레드메인, 그리고 너무 창백했던 에즈라 밀러...ㅋㅋㅋㅋ
아쉬움도 많은 작품이었지만 일단. 내가 취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던 메시지 중심으로 오늘은 갈무리!
별점은 2점 같은 3점 되겠습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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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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