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 박완서] 고목(古木)에 부치는 편지 (북리뷰, 북에세이, 독서모임, 독서일기)
[나목 - 박완서] 고목(古木)에 부치는 편지 당신은 한복에 새초롬하게 노란 빛으로 반짝이는 호박을 달고,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셨다. 소가 먹을 여물을 썰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쇠죽을 끓이고, 간밤에 누렁이가 퍼질러놓은 소화의 흔적을 치우셨다. 바쁜 새벽을 떠나 보내고 목욕탕 의자 위에 앉아 지팡이에 기대 볕바라기를 하고 있으면, 눈곱도 안 뗀 손주들이 우당탕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신은 할아부지 머리 까까머리라며 당신의 까슬한 머리를 짚고 빙빙 도는, 막내 아들이 낳아다 준 해맑은 늦손주들을 깊이 아끼고 사랑하셨다. 주말에 당신을 보러 가는 우리 마음도 설렜었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알게 됐을 때쯤에서야, 나는 당신이 우리를 향해 짓던 해사한 표정이 비단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이 새까맣게..
2022. 11. 23.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 북 리뷰, 북 에세이 feat. 월디페 2022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눈물이 다 나네잉. 나래야 정말 잘했다이, 잘혔어. 아빠와 나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수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아빠와 나는 작은 방에 앉아서 같이 채점을 했다. 내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글자 그대로 극혐한다. 아니, 어떻게 아빠랑 수능 시험지를 채점해? 나는 20대가 되기 전까지 만해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에, 그게 왜 궁금하냐? 또는 그것도 생각이냐? 하는 날카로운 반문 대신, 음. 나는 아빠! 라고 대답하는 부류의 딸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아빠랑 껴안고 뽀뽀할 수 있고, 주말이면 아빠 팔을 베고 누워 낮잠 자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아빠와 나는 가장 친한..
2022. 8.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