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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랭이 독서일기16

[나목 - 박완서] 고목(古木)에 부치는 편지 (북리뷰, 북에세이, 독서모임, 독서일기) [나목 - 박완서] 고목(古木)에 부치는 편지 당신은 한복에 새초롬하게 노란 빛으로 반짝이는 호박을 달고,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이셨다. 소가 먹을 여물을 썰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쇠죽을 끓이고, 간밤에 누렁이가 퍼질러놓은 소화의 흔적을 치우셨다. 바쁜 새벽을 떠나 보내고 목욕탕 의자 위에 앉아 지팡이에 기대 볕바라기를 하고 있으면, 눈곱도 안 뗀 손주들이 우당탕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당신은 할아부지 머리 까까머리라며 당신의 까슬한 머리를 짚고 빙빙 도는, 막내 아들이 낳아다 준 해맑은 늦손주들을 깊이 아끼고 사랑하셨다. 주말에 당신을 보러 가는 우리 마음도 설렜었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알게 됐을 때쯤에서야, 나는 당신이 우리를 향해 짓던 해사한 표정이 비단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이 새까맣게.. 2022. 11. 23.
[하트모양 크래커 - 조예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feat. 안다즈에서 애프터눈 티타임과 스페인 클럽에서 저녁. 그리고 강남권에서 북캉스 하기 좋고 가성비 좋은 호텔 카푸치노. 루.. [하트모양 크래커 - 조예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디엠함에 새 메시지가 깜빡였다. 팔로우가 서로 맺어져 있지 않고, 피드에 글 한 편 없는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메시지를 보냈다. 작가님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한마디가 절박해 보여서 새벽 한 가운데가 뜨거워졌다. 없으면 죽는 것도, 있어야 살 수 있는 것도 아닌 두 글자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낼 만큼 큰 의미를 갖는 이유는, 종종 어떤 이는 사랑이 없으면 죽고,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다 타인을 구원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구원 받는 것이 사랑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구원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계기가 되거나, 사랑의 결과가 갖는 한 모양이다. 사랑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구원했다고 해서 .. 2022. 10. 17.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왜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왜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P를 만나 맥주를 마셨다. 불쑥 그가 물었다. 야, 너 혹시 L 기억남? 그게 누구여. 그 왜 있잖아, 너랑 대학 때 잠깐 친했었는데. 아예 기억 안 나? 남 욕 많이 해서 지친다고 거리 두다 멀어졌잖아. 아! 기억 나. 사실 자세히는 안 나는데, 뭐 친했지. 술도 많이 마시고. 그 사람이 왜? 그 사람이 너 결혼할 사람이랑 헤어졌냐고 물어보더라고? 엥? L이 그걸 어떻게 알고? 글쎄, 나도 그래서 너랑 아직도 연결 고리가 있는 건가. 생각하다가 아닌 것 같아서 물어봤지. 뭐, 궁금한가 보지. 나 슈퍼스타잖아. 어련하겠어. 그래, 그래, 대단하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니 성격 때문에 개 파탄 났다고 했지. 길.. 2022. 9. 23.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이야기는 계속 된다 / feat. 연희동 청수당 공명, 예스24 굿즈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이야기는 계속 된다. 아빠, 어떤 게 할머니고 어떤 게 할아버지야? 아빠는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가 묻힌 쌍분 앞에서 코를 훔쳤다. 그리고 내 질문에 곧, 게가 아니고 어떤 쪽이라고 말해야제, 분도 괜찮고. 우리나라에서는 무덤 앞에서 보았을 때 남자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모신다. 하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아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디 그렇게 외우지 않아도 될거여. 잔디를 심은 지 꽤 됐는디. 어무니 쪽은 잔디가 길게 자라고, 아부지 쪽은 잔디가 짧게 자라는 거이 보이제. 두 분 머리 스타일 기억하냐?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는 왼쪽, 할매는 오른쪽 하고 되뇌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신 분들의 머리 스타일이 봉분에 난 잔디의 길이랑.. 2022. 8. 27.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 북 리뷰, 북 에세이 feat. 월디페 2022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눈물이 다 나네잉. 나래야 정말 잘했다이, 잘혔어. 아빠와 나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수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아빠와 나는 작은 방에 앉아서 같이 채점을 했다. 내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글자 그대로 극혐한다. 아니, 어떻게 아빠랑 수능 시험지를 채점해? 나는 20대가 되기 전까지 만해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에, 그게 왜 궁금하냐? 또는 그것도 생각이냐? 하는 날카로운 반문 대신, 음. 나는 아빠! 라고 대답하는 부류의 딸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아빠랑 껴안고 뽀뽀할 수 있고, 주말이면 아빠 팔을 베고 누워 낮잠 자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아빠와 나는 가장 친한.. 2022. 8. 20.
[가꾸는 이의 즐거움 - 이유리] 행운목처럼 [가꾸는 이의 즐거움 - 이유리] 행운목처럼 행운목에 꽃이 피면 좋은 일이 생긴대. 행운이 와서 행운목이라는 거지. 거실 한복판에서 행운목이 하얀 꽃을 여물렸다. 죽은 듯이 가만히 서있던 행운목이, 갈색 줄기 속에서 남몰래 키워 온 펄떡거리는 생명을 세상에 여봐란 듯이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예닐곱 살쯤 됐었던 그 해,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었을 여러 이야기들 중에 무엇이 행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저 작은 나무토막 같던 시절부터 몇 년을 공들여 키운 행운목이 드디어 꽃을 피우자 엄마 얼굴도 그 하얀 꽃처럼 화사하게 빛났던 장면만은 어제 일처럼 선연하다. 그때는 엄마가 화분을 들여다보고 그 여린 잎들을 보살피며 식물을 키우고 가꾸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과 같다고, 나래와 루나를 키우..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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