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랭이 독서일기16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 7편 - 김초엽] 모호의 명확성에 대하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 7편 - 김초엽] 모호의 명확성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이를, 심지어 떠나가고 떠나온 이들까지 사랑하지만, 특히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며칠 전 날짜가 바뀌는 새벽의 틈에 지금 당신의 마음을 얘기해 주세요. 하고 카톡이 왔다. 종종 삶과 관계, 사랑과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단골 바 겸 식당 사장님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짓궂어져서 일기를 찍어 보냈다. 작은 방에 에어컨을 켜면 삽시간에 사방이 얼어붙는다. 책장 위에 다닥다닥 붙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책들의 표피에도 오도도 소름이 돋는다. 아 비로소 여름이구나. 이기적인 인간은 생각한다. 유치한 일기를 찍은 성의 없는 사진으로 답변을 대신하자, 그가 오늘은 슬픔에 잠기는 날이라고 고백했다. 사랑은 양.. 2022. 8. 2.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비가 오니까 너도 오는구나. 이별 후에 유독 새벽이 길어졌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편인데, 베개에 불면이 숨어 있었는지 박명 사이로 자꾸 뒤척임이 스민다. 지난밤 꿈에는 너의 모습이 말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와 까만 밤과 새벽 틈 사이에서 눈을 떴다. 투두둑, 발코니 철제 난간에 정신없이 빗방울이 내려 춤추고 있었다. 너와 나란히 앉아 이별을 말할 때 함께 보았던 하늘에 걸린 회색 장막에, 삼천 개의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날 차마 내리지 못했던 그것들이 빗방울이 되어 펼친 손위로 나렸다. 처마 끝에 매달려 나리는 빗속으로 오목하게 손바닥을 반쯤 쥐고, 목놓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도 너의 맘대로 꿈속에 왔듯이. 내 맘대로. 주책맞게도 빗방울 소리를 손에 담.. 2022. 7. 19.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 황보름] 엉망이어도. 봄날의 곰만큼.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 황보름] 엉망이어도. 봄날의 곰만큼. 2020년 12월. 많이 아팠다. 하루 중에 울지 않을 때가 없었다. 부장님이 자리를 지날 때마다 말했다. 설프로, 힘들면 퇴근해. 쉬어도 괜찮아. 어디 많이 안 좋은 것은 아니지? 어머니는 괜찮으신거지? 매번 고갯짓으로 대답하는데도 그는 근성 좋게 눈물 흘리는 직원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9월, 몇 년 간 골치였던 위에서 뭔가가 발견 됐다고 엄마에게 전화하자, 엄마는 즉각 삼성병원으로 달려 왔다. 암센터 앞에서 엄마는 멈춰섰다. 너 암이야? 아니, 나는 암 아니고, 암 걸린 것도 아니야. 그런데 엄마 종양은 암센터에서만 제거할 수 있대. 2개월 간 가족 전부가 이 거짓말 작전에 투입 되었고, 배신감에 몸을 떨던 엄마는 결국 고집.. 2022. 6. 25. [질투의 끝: 마르셀 프루스트 단편선] 사랑은 계속 되고 있다. [질투의 끝: 마르셀 프루스트 단편선] 사랑은 계속 되고 있다. 사랑은 아름다운가. 완벽히 서로 다른 존재들이 허공에 제각기 포물선을 긋다가, 맞부딪는 것이 사랑이다. 그것이 찬란하고 아름다울지언정 늘 그러할 수는 없다. 그간 각자가 남긴 무상한 자취를 서로 인정하고, 다른 모양을 받아들이고, 맞부딪음으로 인해 변경될 항로를 전쟁 같은 토론으로 합의, 재설정하는 과정이 순조로울 수만은 없다. 지옥 같은 다툼 속에서 맞부딪음의 인상은 강렬해진다. 눈부심을 이기지 못한 사람은 교차점을 지나 자신의 포물선 속으로 침잠한다. 남은 이는 긴 자취를 남기며 떠나는 그 뒷모습마저 사랑하고 응원한다. 사랑은 전투다. 스물에 만나 3년 넘게 연애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사랑이 닳아져 그가 먼저 권태기를 느꼈고, 나는 속수.. 2022. 6. 23.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 안시내] 잊은 것들은 잊힌 것이 아니라. / 북 에세이, 독서 일기, 북리뷰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 안시내] 잊은 것들은 잊힌 것이 아니라. 여름 무렵 순창의 날씨는 매시가 낯설다. 낮에는 가슴에 장류를 잔뜩 머금고 푹 익히는, 간장종지 모양의 분지 가득 뙤약볕이 나린다. 그러다가도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먹구름이 축축하게 금산에 걸리기도 하고, 여름 밤을 뚫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서걱한 한기를 한입씩 물어오기도 한다. 5월말, 선거운동이 한창인 작은 동네를 채우고 넘칠만큼 사위에 더위가 오도도 맺혀있었다. 아현이는 자꾸 손을 잡거나 몸을 바짝 붙이는 언니를 밀어내고, 언니는 11살이나 어린 작은 동생이 예뻐서 밀어내는 몸짓에라도 손을 붙이면서, 뙤약볕 아래를 걸었다. 아이스크림 살 걸. 배고파. 집에 가면 엄마가 갈비 가득 해놨다고 하니까 그것부터 먹는거다... 2022. 6. 1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당신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밀란 쿤데라] 당신에게 아니, 도대체 왜 우는 거야. 눈물 앞에서 모든 연인들이 예외 없이 물었다. 아무도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다. 뭘 잘했다고. 얼른 주워 삼겼을 뒤에 이어진 말들도, 발음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눈물을 닦아주지 않을만 하다고도. 눈물은 최선을 다했다는 표식이었고, 결과와 무관하게 억울하다는 호소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입장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얼른 결정해. 지금 결정해야해. 머릿 속에서 목소리가 울린다. 무기력하게 초여름 한복판에 버려져 있다. 나는 순발력이 좋지 못한 인간이다. 길게 생각하고 오래 고민하고 여러 방향으로 사고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가끔 전 애인들과 멀어진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2022. 6. 6. 이전 1 2 3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