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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 안시내] 잊은 것들은 잊힌 것이 아니라. / 북 에세이, 독서 일기, 북리뷰

by 헌책방 2022. 6. 14.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 안시내] 잊은 것들은 잊힌 것이 아니라.

 

여름 무렵 순창의 날씨는 매시가 낯설다. 낮에는 가슴에 장류를 잔뜩 머금고 푹 익히는, 간장종지 모양의 분지 가득 뙤약볕이 나린다. 그러다가도 금방이라도 쏟아질듯 먹구름이 축축하게 금산에 걸리기도 하고, 여름 밤을 뚫는 풀벌레 울음소리가 어디서 났는지 서걱한 한기를 한입씩 물어오기도 한다. 5월말, 선거운동이 한창인 작은 동네를 채우고 넘칠만큼 사위에 더위가 오도도 맺혀있었다. 아현이는 자꾸 손을 잡거나 몸을 바짝 붙이는 언니를 밀어내고, 언니는 11살이나 어린 작은 동생이 예뻐서 밀어내는 몸짓에라도 손을 붙이면서, 뙤약볕 아래를 걸었다. 아이스크림 살 걸. 배고파. 집에 가면 엄마가 갈비 가득 해놨다고 하니까 그것부터 먹는거다. 촘촘히 먹을 계획을 세우면서 두 딸은 엄마집에 도착했다. 언니 그 북콘서트하는 안시내 작가님 동생 이름이 진짜 안읍내야? 어 순창 읍내할 때 읍내. 그럼 그 언니는 이름이 시내 한복판. 할 때, 그 시내야? 어, 시내네 어머니께서 시인이셔서 그렇게 지었대. 진짜야? 근데 그 어머님께서 시인이신거랑 그 언니 이름이 시내인거랑 무슨 상관이야. 시가 들어가잖아. 진짜야? 그렇다니까. 엄마가 말 그대로 한 솥단지 해놓은 갈비를 바닥까지 긁어 먹고, 자매는 <기묘한 이야기> 새 시즌을 보면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순창은 인생의 반 이상을 보낸 장소이자, 그러므로 현재의 스스로에 반 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대주주다. 예나 지금이나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방문 빈도와는 별개로 고향을 사랑한다. 그곳에 생기는 새로운 장소들, 전에 없이 도는 활력들 같은 것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작은 고장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려주는 것 같아 고맙다.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선뜻 그러지 못하는 부채감 때문에 그 마음은 증폭된다. 금산여관과 옆에 딱 붙어 운영하고 있는 모먼트립도 그런 곳이다. 현재의 주인장님이 새롭게 가꾸어 힙한 게스트하우스가 된지는 꽤 오래됐지만, 최근에 시내작가님(이하 시내라 한다)의 피드를 통해 알게 되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만은 새로운 곳들이다. 고3인 막둥이만 빼고 다같이 모먼트립에 가서 맥주 한잔씩 한적이 있는데, 그것이 인연이 돼서 모집은 마감했지만 시내의 북토크에 참여해도 괜찮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초 여름밤은 여름 무렵 순창의 이상한 날씨 한복판에 있었다. 어디 모여서 낮잠을 청하고 있다가 늦게 눈을 떴는지, 소슬한 바람이 마당을 쓸고 갔다. 풀벌레 소리 대신 멀리서 확성기의 쟁쟁거림을 타고 들리는 선거운동 노래들이 물방울 같은 한기를 물어왔다. 조용히 작은 체구로 말갛게 웃는 작가의 신작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박수를 쳤다. 돌아가면서 각자 소개를 했다. 쭈뼛거리는 마음을 안들키려고 나눠 먹은 아이스크림 봉지와 막대를 수거하러 돌아다니자, 다들 스스럼 없이 고맙다고 해주었다. 작은 것도 고마워해주는 따뜻한 사람들 속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게 웬 떡이야. 하면서 마룻 바닥 틈사이로 고난이도 비행 끝에 허벅지에 침을 박는 모기들과 싸우며.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듣기도 하고. 때 이른 수박을 먹고. 마피아 게임을 빌려 즉흥 연극 무대를 대청마루에 올리며. 우리는 밤을 보냈다. 완전한 타인이 우리가 되는 것이 이토록 자연스러운 일이었었나 갸웃거리다가, 이 축을 이루는 사람이 뒤쪽으로 물러나 옆에 앉은 연인과 손금에 맺힌 사랑을 꾹꾹꾹 나누는 장면을 보면서. 이것은 사랑 때문이고, 마음들 때문이구나. 생각했다. 골목 어두운 곳으로 잠깐 나가 올려다 본 하늘에 별이 마당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수필 읽기를 어려워한다. 눈물 많은 나는, <안나 카레리나>나 <백년의 고독>처럼 독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재독하는 책들도 펑펑 울면서 읽는다. 실재하지도 않았던 그들이 묵지근한 새벽의 무게를 불면증으로 앓는 것이, 라면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클럽에서 춤을 추다가도, 슬프게 한다. 삶은 충분히 거대한 모순이고, 농담처럼 야속히 흐르고, 비극은 스스로 점층의 길을 걷는데, 혹시라도 수필을 펼치면 실재하는 누군가의 거대한 모순과 비극의 점층을 목격해야할까봐 두려움이 앞선다. 처음 시내를 만났을 때는 예쁘고, 성격 좋고, 말도 예쁘게 하는, 그래서 잘 나가는 인플루언서라고 오해했다. 처음으로 읽은 그녀의 책 <멀리서 반짝이는 동안에>를 덮고 나서는 어쩐지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글로 갈무리한, 숱하다 할만한 특별한 기억들만큼, 보통 사람인 나와 시내는 멀어졌다. 너무 다른 사람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적기 마련이다. 여전히 좋아했지만, 어려워졌다. 그러모아도 일평생 중 이틀이 채 안되는 시간을 함께했을 뿐이었으므로, 바쁜 그녀도 나를 쉬이 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종종 너무 예쁜 스토리에는 답장하고, 좋은 글귀에는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고, 또 종종 마음이든 몸이든 다치지 않기를, 하고 기도했다. 그녀가 온전함으로 인해 세계의 온전함이 조금이라도 유지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계가 더 아름답게 온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속으로 멀어지고 어려워지면서도 종종 그녀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좋은 글이 모여 있을 신작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의 출간 소식을 듣고 신작을 바로 주문했다. 마음을 단단히 매고, 너의 이야기에 섣부르게 울고 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자신이 없어서 매일 밤 한 챕터씩만 너의 글을 읽겠다고 계획했다. 한심하게도 매번 약속을 어기며 두 세 챕터씩 더 읽었다. 너의 두꺼운 밤 한가운데에서 시리고, 따뜻하고, 충만하고, 헛헛해서, 웃다가 늘 목을 놓고 울었다. 나는 너를 잘 몰라서, 너의 이야기 너머가 보이지 않을 때는, 대신 내 이야기를 하나하나 들춰보고, 매만졌다. 덕분에 나는 잊었던 것들을 돌아봤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들을. 북토크가 끝나고 질문이 있냐는 목소리에 손을 들뻔했다. 어쩜 이런 글을 빚었는지,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잣는지 물으려다가 답을 알아서 그만 뒀다.


나란히 앉아 신나게 떠들던 자매의 떠남을 아쉬워해주는 북토크 참석자들을 뒤로하고 금산여관을 빠져 나왔다. 떠나기 전에 용기 내서, 놀자 위에 서있는 시내를 안아보았다. 서울로 돌아가면 동네술친구 하자는 어른은 불행이고, 사랑이고, 시인이다. 술친구를 하려면 한참 뒤처진 거리를 반만이라도 줄여야할텐데. 걱정이 앞선다. 별들 사이를 밤하늘이 까맣게 채웠다. 자매는 11년의 차이를 두고 그들이 졸업한 초등학교를 지나 아름다리 나무가 지키는 군청을 지나 집으로 걸었다. 언니는 술도 못 먹으면서 잘논다. 웃겼어. 재미있었어. 그런데 조금 기가 빨려. 나는 이제 E가 아닌가봐 언니. 재미없었어? 아니 좋은 사람들도 만나고 재미있었는데, 기는 빨렸어. 동생의 웃음이 짤랑짤랑 새벽 한시를 울린다. 아현아, 거짓말이야. 뭐가? 안읍내. 거짓말이야. 아 뭐야. 진짜. 근데 거짓말일 것 같았어. 거짓말. 진짜야, 나 마피아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둘 다 거짓말이잖아. 진짜야? 그렇다니까. 2층에서부터 아빠가 코고는 소리가 쩌렁쩌렁 들렸다. 자매는 깨까시 씻고 엄마 옆에서 손을 잡고 잤다.

 

 

* 정말 즐겁고, 감동적이고, 뜻 깊었던 북콘서트. 함께 모인 사람들도 다들 너무 좋아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금산여관 위치는 이곳입니다.

금산여관과 안시내 작가님 모두 승승장구 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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