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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드라마 : 안톤 체호프 단편선] 얼룩 / 북리뷰, 독서 일기

by 헌책방 2022. 6. 13.

[드라마 : 안톤 체호프 단편선] 얼룩


창문에 조그맣게 얼룩이 번진다. 저걸 어떻게 닦아낸다. 신문지에 물을 묻혀 닦아낼까, 부드러운 천을 가져와서 닦아낼까. 내내 고민하다가 뒤늦게서야 숙고의 결과로 닦아보지만, 풍경 위로 헝겊이 지난 자리가 오돌돌 하다. 그 흔적을 지우려고 닦고 또 닦다가 엉엉 운다. 내 삶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보기 드물다 할만큼 미련한 인간이다. 최선을 다해도 그 결과가 후회로 남는다는 점에서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최선을 다하면 일정 부분이라도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지독한 낙관주의자며, 능력이 부족한 지독한 낙관주의자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들과 고민을 나누지 않는 것이 배려이고, 온전히 혼자 책임지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비겁하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얼룩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럼 그대가 떠나 얼룩이 남은 채 외따로 비와 햇살을 맞는 유리창 너머 홀로 남을 것 같아서. 울며 얼룩을 지우는 사람이다. 얼룩은 얼룩을 남긴다.

 

민음사에서 운영하는 북클럽 멤버십에 몇 권의 책과 굿즈가 포함 되어 있는데, 올해는 가입하면서 민음 북클럽 스페셜 에디션 2022 중 <드라마: 안톤 체호프 단편선>을 골랐다. 체호프의 군더더기 없는 구성의 글들은 명의와 비슷하다. 그의 짧은 글들은 사회와 인간이 겪을 수 밖에 없고, 현재 겪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맥을 짚는다. 미술 작품에 젯소 작업을 하는 것처럼 강렬하고 매서운 위트를 촘촘히 깔고, 말을 줄이고 가다듬어 그야말로 촌철살인으로 가슴에 파고든다. 체호프의 총으로 상징 되며 야나체크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간결한 구성과 늘 새롭게 느껴지는 서술방식이라는 형식적 특수성이 특유의 해학과 극단적인 상황이라는 내용적 특수성과 결합하여 모든 작품이 흥미롭게 읽힌다. 표제작으로 선정된 <드라마>는 유명 작가가 지루하게 자신의 희곡을 줄줄 읽는 다른 무명 작가를 앞에 두고, 집에 가고 싶다든지 하는 잡생각을 하다가 그야말로 쳐죽이게 되는 모습을 그린다. 모든 사람이 쉽게 거부하지 못하는 일들 앞에서 겪는 혼란부터 배심원의 결정으로 무죄를 선고 받는 마지막까지 모든 과정이 날카로운 위트로 무장 되어 있고, 비열한 공감을 자아낸다. 물론 메타포로 쓰이기는 하지만 종종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런 폭력성은 섬뜩하고, 결코 권할만한 방식은 아니다. <내기>는 인간의 실존과도 연관이 깊다. 인생을 바꿀만한 거액을 걸고 젊은이와 은행가가 내기를 한다. 15년 동안 젊은이는 자신의 자유를 박탈당하기로 하고, 이것을 해내면 은행가는 젊은이에게 거액을 내놓기로 한다. 긴 세월이 지나도록 갇힌 자는 군만두가 아니라, 수많은 책들을 탐식한다. 그가 여러분야의 책들을 게걸스럽게 읽어내자 은행가의 자본도 상당한 타격을 입는다. 은행가는 갇혀 있는 사람을 먹이고 읽히고 재울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인 생활도 호화롭게 영위하기 때문에 내기 종료를 앞두고는 남아 있는 재산만으로 내기에 건 돈을 지불하기도 빠듯해진다. 결국 그는 가둬놓은 자를 죽이기 위해 밤에 몰래 감옥용 가옥에 잠입했다가, 앉아서 졸고 있는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자가 남긴 메모를 발견한다. 메모에는 진리에 가까워진 사람이 얻은 허무와 책과 지혜와 행복에 대한 경멸이 적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기에서 이기는 것을 거부하고 종료 5시간 전에 도망갈 것이라는 선포가 담겨 있다. 은행가는 자고 있는 기인의 머리에 키스하고 자기혐오에 몸을 떨면서도 그저 방을 나오고, 갇혀 있던 자가 떠난 후 남은 메모를 금고에 넣는다. 책들을 읽고 글을 써내도 여전히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나는, 읽고 쓰는 것이 무의미한 몸짓에 불과하다는 이 메시지에 강력히 수긍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얼룩을 지우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이것은 한계가 극명한 삶을 살면서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는 인생의 부조리를 증명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하여 고백하고 스스로 묻는 것으로 실존을 이룩하는 인간의 숙명을 증표한다.


단편선에 실린 6개의 작품 중에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관리의 죽음>이다. 어느 멋진 저녁, 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우연히 상급자를 향해 재채기를 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른 관리가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고자 상급자를 찾아 사과를 거듭하고, 계속 사과를 받다 지친 상급자가 크게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자 관리가 배가 터져버려 죽어버리는 비극으로 결말을 맺는다. 실수를 수습하고자 했던 것들이 또 다른 실수가 되고, 그 앞에서 허둥대다가 비극을 맞는 관리의 모습은 얼룩을 지우려고 노력하다가 그 무용한 몸짓이 의미를 잃고 창문 앞에서 엉엉 울어버리는 나의 모습과 닮았다. 소통은 인간이 겉으로 드러나는 포장 아래에 내심을 감출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한없이 복잡해진다. 관리와 나는 상대의 발화를 있는 그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복잡성과 소심함만으로도 진솔한 소통에 실패할 수 밖에 없고, 혼자만의 힘으로 실수를 만회하거나 상황을 극복하려는 미련스러움만으로도 한치 앞으로도 나아갈 수 없다. 애통한 것은, 정작 나는 내뱉는 말 아래에 어떤 것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며, 책임지겠다 약속하거나 다짐한 것을 해내는 것에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은 책임의 전가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어느 멋진 저녁, 어느 멋진 인생 한복판에서도 비극의 단초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내미는 것이, 그 아이러니가 가슴을 조인다. 어느 운수 좋은 날처럼. 인생은 거대한 모순이다.

 

 


얼룩은 얼룩을 낳는다. 네모난 방 한 가운데, 녹음이 우거진 초여름을 담은 유리 액자 앞에서, 기어코 얼룩을 발견한다. 도와줘. 제발. 겨우 입 밖으로 꺼낸 말은 텅 빈 방을 겉돌다 햇살 속으로 산산조각 난다. 엉엉 운다. 그새 얼룩이 번졌는지, 창 밖 풍경이 온통 희뿌옇다.

 

 

 

 

 

* 2022 민음 북클럽에 가입하면 스페셜 에디션 세권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선택한 모든 책들이 진심으로 좋았다. 패키지도 정말 예쁘고 깔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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