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구병모] 파과가 아름다운 이유
아빠는 멀리 사는 큰형님, 셋째형님보다 가까이 살고, 첫눈에 봐도 느껴지는 넓은 배포와 아량, 농사 짓는 사람 특유의 애정 어린 보살핌의 몸짓을 갖춘 둘째형님을 많이 따른다. 보수적이고 엄격했던 당신의 아버지 대신 둘째형님에게 많이 기댔다. 당신이 지금 내 나이쯤 되어 가정을 이루고 독립하기 직전까지 둘째형님과 형수님이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는 집에서 함께 살기까지 했으니, 통칭 호치큰아빠로 불리우는 큰 아빠는 아빠에게 형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어린 버전에 가까운 의미였을 것이다. 지금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만나기만 하면 각자의 아내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면서도 킬킬대며 야금야금 약주를 나눠먹고, 무릎 연골과 고관절 건강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말 섞어 논의하는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었지만, 아빠는 어쩐지 당신의 형수님만은 편하게 대하지 못한다. 농촌에서의 노동의 강도는 일의 양이나 질로 따질 수 없지만서도, 큰엄마는 작고 여린 몸으로 아재들도 힘들게 해내는 일을 척척 해냈다. 낮에는 음료수를 병입하는 작업을 하는 공장에 다니시면서도, 사과, 배, 복숭아 등 각종 과일 열매를 매다는 과수원을 가꾸시고, 고추, 애호박, 호박, 상추, 깻잎 같은 밥상에 오를만한 식재료가 맺히는 각종 밭을 경작하셨으며, 큰아빠가 주로 관리하는 너른 논에 푸른 모를 심고, 그 모가 와르르 햅쌀로 영글때까지 끝도 없이 줄지어 선 곡식 줄기 사이 사이에 난 피들을 잡아 뽑으셨다. 나는 그런 큰 엄마를 어렸을 때부터 존경해왔고, 아마 이 존경심은 아빠가 당신의 형수님을 존경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약주가 한참 들어가 장녀가 봐도 창피하고 해괴한 주장이 안주상에 오르면, 큰엄마는 단칼에 대화를 자른다. 어먼 소리 할거믄 집이나 가. 넘의 집에 와가꼬 이상한 소리 핑핑 할거여? 아빠는 아이 형수님, 내가 없는 소리 하는 것도 아니고. 하다가, 없는 소리여. 없는 소린게, 가란게. 하는 냉정한 대답에 상처 입은척으로 대응해보지만, 이내 곧 작전이 전혀 효과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고집을 슬그마니 꺾는다.
어린 시절 아빠와 엄마가 여행을 가면, 나와 루나는 큰엄마 집에 맡겨져 울지도 않고 며칠밤이고 잘 버텼다. 슬하에 타 지역으로 유학 간 아들만 둘을 두신 두 분은 우리를 친딸처럼 아껴주셨다. 종종 큰 엄마가 운전하는 흰 트럭을 타고 밭에 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카리스마 넘치는 지휘 아래, 나무에는 우리 키가 도저히 닿지 않았기 때문에, 흔덕흔덕, 손끝이 한 마디나 남아 펄럭대는 목장갑을 끼고, 본수확 전에 고추가 더 잘 자라라는 의미에서 쪼끄만 고추를 따고는 했다. 요령을 피운답시고 고추 끝을 잡고 익, 잡아당기면 와르르 매운물이 손끝에 따끔 들어왔다. 눈물이 나서 눈물을 닦으면 눈이 아파서 또 울고, 그래서 또 눈물을 닦으려고 장갑 끝을 손으로 가져가서 또 울고, 뻥하고 터져 아작나버린 채 비닐 위에 나뒹구는 고추가 불쌍해서 울고, 다른 고추가 더 크게 자라라고 어미를 떠나야하는 작은 고추들이 불쌍해서 울고.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으면 큰엄마가 다가와 요러게. 요러게. 대가리를 따야제. 꼭지. 꼭지 알제. 아이고. 울지마. 하셨다. 밭 끝으로 나를 들고가 생수로 얼굴이랑 손을 씻겨주고 혀를 쯧쯔 차면서도 귀여운지 쓰다듬어 주시고 트럭에 나와 루나를 싣고 집으로 데려다 주셨다. 아직 한참 더 따얀디. 아마 큰엄마는 언제 낯을 가렸냐는듯이 엄마 따르듯 큰엄마를 따르는 조카들이 들을까봐, 걱정을 그 단단한 가슴에 붙들어 매셨을 것이다. 불쌍하게도 허리가 잘리고 발끝이 통통하게 물이 차서 터져버린 고추들도 산길을 감속 없이 험하게 달리는 큰엄마의 하얀 트럭 짐칸에 타고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파과>. 구병모 작가의 남다르고, 선혈이 낭자하는 파격적인 세계관 속에서, 매캐한 시취를 풍기던 고추들과 그 파과들을 매만지고 닦아 어떻게든 살아 있는 세상에 붙잡아 보려고 애쓰던 큰엄마의 옆모습을 떠올렸다. 땅바닥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중력의 방향을 향해 자라는 하이얀 고추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초록색, 빨간색, 알록달록한 고추 열매가 열린다. 맵자하게 자란 고추의 머리끝을 잡아 당기면 톡,하고 고추는 가지와 이별하며 죽음을 맞는다. 그 순간은 고추 나무의 열매 맺는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면서도, 고추 열매가 더 이상 땅과 연결되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진 채로 썩어가기 시작해야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성장기가 하얗게 시작해서 알록달록하게 끝나는 것이, 참 벅차면서도. 때로는 그 열매가 자신이 하얗게 순수하던 시절을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과>의 주인공 조각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친척집에 입양 되어 식모살이를 하다 얼마 못 가 파양 되어 떠돈다. 그녀는 순전히 우연한 기회로 청부살인 전문업체에 소속 되어 예순다섯까지 평생을 킬러로 살게 된다. 업체는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서 벌레, 쓰레기라고 불릴만한 요인들을 의뢰인 대신 죽이는 일을 도맡는다. 중년, 이제 점차로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이끌고 과거를 살던 그녀는, 자각하지 못했던 과거의 망령을 만나고, 동시에 이대로 무위로 가려던 몸을 세상으로 단단히 붙잡는 미래의 감정을 느끼기도 하며,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과거를 어느 지점을 맘에 담아 두고 들여다보거나, 미래를 꿈꾸게하는 희망, 사랑 같은 감정을 허락 받지 못한 삶에, 갑작스럽게 쾅쾅. 그것을 허하노라. 하는 도장이 찍히고, 열여섯에 멈춘 마음은 예순다섯의 몸을 달뜨게 하며 미뤄 온 성장통을 겪는다.
구병모 작가의 작품들은 문장을 이루는 단어, 어구와 같은 요소들이 서로, 그리고 자기들끼리, 절로 감탄이 나는 뛰어난 조응력을 선보인다. 문장과 문장이 어깨를 맞대고 문단으로, 작품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다. 아름답다. 묘사는 눈에 보이는 듯이 세밀하고, 색채는 창백해서 흐릿하지만, 텍스트만으로도 피비린내, 물비린내, 과일의 시취 같은 특유의 후각적 기억을 자극하는 데에 늘 성공한다. 특히 <아가미>, <위저드 베이커리>가 그러하듯 작품 전체를 멈춤 없이, 망설이지 않고 꿰뚫어버리는 제목, 캐릭터를 축약하는 등장인물들의 이름 선정이 탁월하다. 제목 파과는 열매가 흠집이 나 파손되는 파과(파괴하다 破, 과일 果), 여자의 나이 16세를 이르는 말이자 참외, 오이, 모과 등 열매의 파괴, 처녀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파과(파괴하다 破, 오이 瓜)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그리하여 열여섯의 나이에 세상에 외따로 떨어져, 영혼이 파괴된 채 벌써 세번째 인생을 맞이하는 조각의 삶을 축약하며, 우리 삶은 싱싱한 과즙을 머금어 생명력 가득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향하고 있는,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있는 과정임을 상징한다. 주인공의 이름 조각(손톱 조 爪, 뿔 각 角)은 짐승의 발톱이나 뿔처럼,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물건을 비유하기도 하지만, 재료를 깎거나, 재료에 새기거나, 재료를 빚어서 특정 형상을 만드는 미술 행위인 조각(彫刻), 방해하는 어떤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의 조각(阻却), 무엇보다도 어떤 것에서 따로 떼어 내진 작은 부분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조각과 동음이의어다. 이로써 그녀의 이름은 손톱이라는 활동명만큼이나 날카롭게 방역을 실시하는 그녀의 업을 상징하기도 하고, 사랑 받기 위해서 그리고 살기 위해서 막 꽃일 때의 모습이 이제 막 아른아른 멀어지는 아직 어린 열매일 때 줄기로부터 떼어지고, 흠집이 남고, 그 순간부터 끝없이 파열하는 그녀의 삶을 응축하기도 한다. 중요한 등장인물인 투우는 소와 소, 혹은 투우사와 소가 싸우는 것을 일컫는 투우(싸울 鬪, 소 牛)와 바람에 날려 올라간 모래흙이 비처럼 땅으로 떨어지는 현상을 뜻하는 토우의 경남지역 방언인 투우와 발음을 함께 한다. 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후에 영혼이 깨어져버린 그가 한평생 복수의 의지가 아니라 그저 이유 없이, 아버지를 죽인 자를 내내 마음으로 들이받고, 마지막 순간 땅에 가라앉은 흙먼지처럼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비춘다. 조각이 키우는 개 무용은 어떤가. 조각은 강아지에게 쓸모가 없다는 뜻으로 무용(無用)이라 이름 지어 주지만, 개는 속 깊게 주인의 고독과 늦은 성장을 옆에서 지키는 의미에서 무용하지 않고, 외려 무용(무예 武, 용감하다 勇)하며, 마지막 순간 늘 잠들던 조각의 이부자리에 들지 않고 마루 바닥에 잠들어 시퍼렇고 묽은 흔적을 남기며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다. 제목과 이름은 단순한 명명이 아니라 그것의 존재의미를 함축한다는 점에서, 작품이 명명한 모든 것들은 알맞다. 빛난다. 처연하게, 모순적이고 때로는 헛웃음 날만큼 무용하고, 농담 같은 인생을 비춘다.
작품의 실체는 개연성 낮은, 판타지에 가까운 여성서사지만, 조각의 이야기는 그저 여성도 서사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작품은 여성이, 경계에 선 우리 모두의 삶을 대표할 수 있으며, 나이는 존재의 성장을 제한하는 요소기도 하지만, 사유를 낡게 하는 제한점은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것이 내가 조각의 일생에서 강인함을 강요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방향대로 내내 강인하기를 선택한 큰엄마를 발견하게 했다. 늦은 성장이 빚는 혼란과 새로운 인생의 국면 앞에서도, 오롯이 자신의 선택으로 혼란을 감내하고, 결국 더욱 굳건해지는 조각과 큰엄마의 인생이, 정답 없는 인생에서 흐릿한 길을 비추어 줄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라고 느낀다.
하루도 쉬지 못했던 큰엄마는 아들들이 보내 주는 세계 각지의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액자 속에서, 고단한 얼굴에 활짝 미소를 새기고 있다. 손목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태산 같던 남편의 몸이 쇠약해지는 파고 속에서도, 당신은 웃는다. 오랜만에 찾아뵈어 손에 쥐어드리는 용돈 봉투를 두어번 거절하시다가, 눈물이 핑 돌아 물기 어린 눈으로 고맙다 이야기하시며 가만히 내 등을 토닥이신다. 아들 둘은 건강한 손자, 손녀 여섯을 당신 품에 안겼다. 조카들은 유치원에서 가족을 그려보라는 선생님의 지령에, 당연하다는듯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함께 그려넣는다. 평생 누군가를 할퀴던 손톱에 화려한 파츠와 기하학적인 무늬를 오랑오랑 그려넣고, 햇빛에 비추어보던 조각이 마음 찡하다. 평생 열매를 따고 흠집난 복숭아가, 배가, 고추가, 조금이라도 더디게 세상에 머무를 수 있도록 띄엄 띄엄 자리를 잡아주고, 윤기 나게 닦던 손이, 이제는 가끔 책장을 넘기고, 손주들을 두드리고, 먼 곳으로 이유 없는 드라이브를 하려고 나선 운전대를 잡는 것이 기쁘다. 나무로부터 독립해서 보기만해도 군침 도는 싱그러움을 자랑하며, 끝없이 죽음으로, 무위로 나아가는 열매의 아이러니와 우리 삶은 기막히게도 동일한 궤를 나눈다. 그러나 열매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씨앗은 썩어 문드러진 과육 밖으로 포도시 고개를 내밀어, 땅과 만나 새로운 삶을 약속한다. 모순적인 우리의 오늘이. 파과가 아름다운 이유다.
* 이번 책도 이북으로 읽었기 때문에 책 이미지가 없어서 책을 들고 있는 저의 모습을 아무거나 가지고 왔습니다.....쥬르륵
* 그리고 평일 낮에는 직장인으로 가득하지만 주말에는 분명 책읽기 좋은 장소가 될 것 같은 전주 혁신도시 근처 로민커피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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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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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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