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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아가미 - 구병모] 땅 위에서도 물 속에서처럼 / 북리뷰 feat. 연남방앗간, 파주 지혜의 숲

by 헌책방 2022. 5. 27.

[아가미 - 구병모] 땅 위에서도 물 속에서처럼.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는 순간,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발화를 청취한 모든 사람에게 그 발언은 발화자의 공식적 입장이 된다. 오랜만에 친구 B를 만났다. 그와 나 사이에 주된 토픽은 거의 늘 연애였기 때문에, 현재 만나는 연인이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지내는지, 같은 타인과 나누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는 질문이 오가는 것이 자유로운 편이다. 심상한 질문에 그는 남자친구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아요. 비슷한 정도. 라고 대답한다. 짧은 대답 이면에서 B의 두려움을 느꼈다.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정말 B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는 셈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말의 힘이 세다는 사실이 종종 뻑쩍지근하게 뼈저리는 일이 쌓이면서, 별 것 아닌 한 마디도 주워섬기게 되는 순간도 잦아진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가벼운 말들이 모이면, 감정이 증폭 되고, 처음엔 가벼웠던 것 같은 생각이 묵직해지는 일도 많다. 특히 부정적 감정이 그렇다. 늘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C와 만나면, 자리에 앉으려고 자켓을 벗어 개는 중에 벌써, 바보 같은 애가 있어. 일을 그렇게 멍청하게 하면 내가 어떻게 해야해? 로 대화가 시작되고는 한다. 마지막 때쯤에는 감정이 증폭 되어 혐오가 듬성히 맺힌 육두문자로 이야기가 맺어진다. 그래서 그를 만나는게 늘 즐겁지만은 않다. 짧은 시간 동안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며 쌓이는 말들과 말들의 확언에 힘입어 단단해지는 혐오(嫌惡)가 두렵다. 인간인 이상 무엇인가를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는 마음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혐오감은 그 이유가 없거나, 역겹다거나 불쾌하다거나 하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동기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계할 필요가 있다. 혐오 표현은 혐오 범죄 발생의 신호탄과 다름 없다. 표현 자체에서 상처 입는 사람도 발생하거니와, 그 표현 때문에 표현 하는 사람의 내부에 싹 튼 혐오는 점점 증폭된다. 그들은 산 중턱의 절 대웅전 앞에서 할렐루야를 부르짖다가 불을 지르고, 마음을 거절 당한 일이 상처가 되었다는 이유로 강남역에서 모르는 여성을 수차례 칼로 찔러 사망하게 하고, 소녀상 주변에서 전쟁 피해자를 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으로 대하고, 차로 운전하여 세시간 거리를 달려 주거주자들이 유색인종인 지역의 슈퍼마켓에서 총기를 난사하는, '사건 피의자'가 된다. 혐오는 자라 누군가를 죽일 만큼 사무치게 밉도록 만든다. 증오범죄의 피해자 대부분은 죽음의 순간 자신이 무엇을 잘 못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미움 받는 존재들인지 슬프게 확인할 뿐일 것이다.


 

구병모 작가님의 <파과>를 읽고, 글자가 서로 끈끈하게 조응하는 필력을 오롯이, 계속 느끼고 싶어져서 오랜만에 <아가미>를 찾았다. 3년 전인가, 아직 책이 신작이던 시절에 어디선가에서 빌려 단숨에 읽었었는데, 그때는 작품이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부자가 단칸방에서 쫓겨난다. 아버지는 기름이 없어 멈춰버린 경차에 아이를 싣고 마을을 전전하다, 큰 길을 만나자 차를 버리고, 아이와 노숙을 시작한다. 어느 날 아이 아빠는 더 이상 삶을 이어나갈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아들을 품에 안고 저수지로 잠긴다. 자살호수라는 병칭이 공공연할만큼 주변이 휑했지만, 이내촌이라는 작은 동네를 이루며 몇 가구가 살고 있었고, 우연한 기회에 할아버지와 한 소년이 비극적 사고에서 살아남은 아이를 발견해 집으로 데려온다. 소년의 이름은 강하. 아이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해서 새로 생긴 가족으로부터 곤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강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곤을 양육하고, 언제부터 곤의 몸에 있었을지 모르는 귀 뒤에 벌어진 아가미와 등에 옅게 붙은 비늘과 조그만 지느러미를,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철저히 지킨다. 그러나 강하는 어머니 이녕으로부터 할아버지에게 버려지듯 맡겨져 사랑에 서툴다. 강하는 곤을 아끼면서도, 그가 언젠가 떠나갈까봐, 헤엄쳐 멀리 닿지 않는 너른 곳으로 작은 소실점으로 사라져버릴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아니,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자신을 두고 떠나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릴까봐 무서워서. 곤을 학대하고, 가두고, 폭력적으로 대하는 방식으로 억압한다. 곤을 납작하게 만들고, 옆구리에 꼭 끼운다. 사람들이 곤의 아가미를 보고 그를 데려가버릴까봐 두려워서 잔뜩 겁을 주고 꽁꽁 싸매둔다. 드러나지 않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하여 곤은 강하와 할아버지를 떠나 엠티촌에 한 숙박업소에서 얹혀 지내게 되고, 어느 날 그에게 불행한 사고로 강에 빠졌다가 곤에 의해 구조 된 해류가 찾아온다. 목숨을 되찾은 해류는 곤을 추적하던 끝에 강하를 만나, 강하와 곤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이야기를 곤에게 전달한다. 이상하게도 곤과 강하의 이야기에는, 윤슬이 반짝이는 물가의 정경보다, 저수지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강가에서 나는 특유의 습습한 냄새가 더 많이, 강렬하게 묻어 있다.


 

<아가미>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혐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증오범죄의 대부분은 혐오에서 시작하며, 또한 대부분의 혐오는 상대의 생각, 종교, 문화, 계급, 인종, 피부색, 성별, 취향, 출신지역 등, 인간을 이루는 극히 일부의 요소가 나와 다르다는 사소한 이질감에서 시작된다.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의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혐오와 사랑은 비단 사전적 정의 위에서 대척점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방향과 방법도 완벽히 대치된다. 강하는 자신과는 다른 인류처럼 보이는 곤을 두려워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면서도 그를 사랑한다. 아직 소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완벽한 양가감정에서 비롯되는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폭력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줄곧 곤의 앞날을 걱정하고 대비한다. 사랑은 혐오와 맞서 싸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지만, 서툰 사랑은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하가 품었던 것과 같은 불완전한 사랑도, 그 폭력적 방식이 문제일 뿐 사랑 자체는 여전히 소중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자란 혐오가 외려 혐오의 상대방을 얼마나 두렵게 만들고, 혐오의 물리적 발현이 갖는 폭력성 얼마나 쉬이 인간을 타성에 지배 당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경고한다. 혐오가 얼마나 비겁한 방식인지 비판한다. 강하는 물고기를 닮은 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다가 연구 주제로 소비 당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어 참변을 당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것은 애초에 고려해보지도 않는다. 비단 아가미 때문만이 아니라, 지상에서도 물에서도 자유로이 숨쉴 수 있는 곤이, 혐오가 넘실 대는 현실보다 강에서 숨쉬기를 더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슬픈 상황을 처연하게 비유한다.


 

<파과>와 마찬가지로 <아가미>도 작품의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관통하는 제목과 인물의 삶을 축햑하는 등장인물의 이름 선정이 탁월하다. 강하가 물고기 아이에게 지어준 이름 곤은 <장자>에 나오는 상상의 큰 물고기 곤(鯤)에서 따왔지만, 태극기를 이루는 팔괘 중 하나이자 땅을 상징하는 곤(坤), 지치고 곤궁하며 위태로운 상태를 의미하는 곤(困)과 동음이다. 곤을 큰 물고기이자 자라면 수평선 너머로 헤엄치듯 붕(鵬)이 되어 사라져버릴 존재라고 생각하는 강하의 경외심, 애정, 차라리 그렇게라도 살아 멀리 가버렸으면 하는 희망이 이름에 아른댄다. 동시에 곤은 물속이 차라리 편하지만 땅에 발붙여 오늘을 살아야하는 사람으로써의 곤의 운명, 그 카르마의 고단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누구이고, 아가미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스스로 자문하며 오늘도 존중, 그 한 단어로, 물에 빠진 이들을 구하고 있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외면하지 않을, 곤의 실존과 오늘을 표상한다. 철저히 곤의 입장에서 보면 아가미가 없는 보통의 인간이야말로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고, 열등한 존재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혐오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강하의 이름은 강하 자체가 그런 곤을 성장시킨 '집'이었다는 의미에서 강과 하천을 가르키는 말인 강하(江河)와 가장 어울려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적으로 더 높은 곳에서 더 낮은 쪽을 향하여 무엇인가가 떨어지거나, 수치가 내려가는 현상을 가르키는 강하(降下), 강의 밑바닥을 뜻하는 강하(江下)와도 연관 있어 보인다. 강하는 곤을 사랑했고, 지키고자 했지만, 자신은 끊임 없이 사랑의 부족함 안에서 추락하는 존재였고, 그리하여 밑바닥에 닿은 존재였다. 그 운명의 처연함은 비로소 평온한 강바닥 어딘가에 닿았을까. 강하의 어머니이자 아들을 노쇠한 아버지에게 버리고, 오랜시간 들여다보지도 않다가 결혼에 실패하자 집으로 돌아온 탕아 이녕(泥濘)의 이름은 땅이 질어서 질퍽질퍽해진 진창과 동의어다. 그런 이녕이 큰 물고기, 바다로 향하는 단단한 지느러미를 늘 꿈꾸던 것과 곤의 비밀을 알게 되어 곤의 반짝이는 몸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한 것이 이녕의 이름이 축약하는 질척한 운명을 더 비극적이게, 모순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바닷물의 흐름을 의미하는 해류(海流)는 강하와 곤의 끊어져버린 흐름을 잇는 매개체로 작동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제목과 이름은 단순한 명명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함축한다는 점에서, 이 모든 이름들은 알맞다. 슬프다. 혐오가 만연한 우리 사회의 비극적인 현실과 그 속에서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뭉개어져가는, 보통과 다른, 소수자들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게는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와 달라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귀히 여기겠다고 다짐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외에는, 나아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달리 이녕에서 빠져 나갈 방법이 없다. 그것이 미약하여 무력하면서도, 그래서 또한 해볼만하다.

 

마지막으로 C를 만났을 때, 대화 속에서 그가 내뱉는 극혐이라는 단어를 세아리다 아연해졌다. 누군가를 지극히, 극렬하게(極), 혐오한다(嫌)는 표현의 홍수 속에서, 자신을 돌아봤다. 누군가에게 사랑한다. 고 말하는 것은 부끄럽고 어색한 일로 여기면서도, 극혐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지 생각했다. 엄마가 전화통 너머로 사랑해. 라고 이야기하면, 나도. 로 말을 끊으면서도, 엄마, 나 새로 같이 일하게 된 00 있잖아. 진짜 극혐이야. 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던 스스로를 반성했다. 혐오감의 선언은 마음 안에 있는 혐오감을 증폭시킬 뿐 아니라, 말없이 홀로 누군가를 미워했던 마음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나만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감각은, 누군가가 죽도록 싫어지는 이 감정이 옳다는 확신을 준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이 인간에게 당연한 일이면서도, 쉽게 입 밖으로 그것을 꺼내서는 안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연이 끊어진 친구 중에 여전히 마음에 남는 사람이 몇 있다. 그 중 한 명은 그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멀어졌었는데, 사실 그가 오래사귀었던 연인도, 이른바 환승한 새로운 연인도, 나와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그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굉장한 충격이었다. 나와 M은 늘 바람피우는 사람은 정말 극혐이라고 이야기를 나눴었고, 그 앞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에 그가 내가 바람에 갖는 부정적 인식에 대하여 충분히 인지하고 공감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한다는 것은, 나를 배신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비열한 사람과 친구로 지냈다고 통탄했다. 세월이 흘렀다고 그런 종류의 실망감이 옅어지거나 그 행위가 옳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의 여지를 차단하고 폭력적으로 행동했던 것에 대하여 후회한다. 그가 바람 피운 결과로 새로 사귀게 된 연인과 아직 썸을 탈 때 이러다 금방 끝내겠지 하는 마음으로 방관하고, 짐짓 모르는 척하며 시험하고 놀리고 조롱하듯이 그 썸남을 가볍게 대했던 것도 물론 후회한다. 여전히 누군가 누구를 두고 바람을 피운다면 나의 것과는 다른 그 생각에 대해서 통렬히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그를 혐오했던 것을 후회한다. 평생 누군가에게서 받아보면 잊힐 수 없을 혐오의 눈길로 너를 바라본 것을 후회한다. 혐오의 눈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것을 후회한다. 너의 마음을 후벼판 것을 후회한다. 타인을 혐오했던 그날들을 후회한다. 너에게 극혐이라고 중얼거린 입술을 후회한다. 나는 혐오의 선언을 놓아주기로 한다. 이로써 우리가 딛는 땅이 조금이라도 극혐사회에서 벗어나길 희망한다. 곤이 밝은 대낮에도 저벅저벅 강가로 다가가 아가미를 활짝 열고, 윤슬보다 빛나는 비늘로 물살을 가르며. 멀리 헤엄치기를. 땅 위에서도 물 속에서처럼 자유롭게 숨쉬기를. 살기를. 희망한다.

 

* 작품을 밀리의 서재에서 이북으로 읽는 바람에 또 관련 이미지가 부족....;ㅁ;..........합니다..... 그래서(?) 연남방앗간 사진

개츠비가 되고 싶었던 설츠비ㅋㅋㅋㅋㅋㅋㅋㅋ

거대한 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것 같은데, 참깨에 진심인 사장님이 운영중이신지 그 진심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어요. 꽤 흥미로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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