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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 유재선] 앎과 받아들임 사이에 [잠 - 유재선] 앎과 받아들임 사이에 과외와 학원 알바로 모진 서울의 생활비를 충당하던 시절. 어린 선생(먼저 선 先, 태어날 생 生)이었던 내가 학생들에게 그나마 가장 많이, 확신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문장 중에 하나는, 아는 부분은 찢어버려. 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대부분의 순간 가족의 눈과 책장에 맺힌 활자를 쫓았지만, 종종 누워 유난히 맑았던 그 시절의 하늘을 눈에 담거나 멍하니 벽지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구름이 토끼나 하트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벽지 속 패턴이 악마나 괴물, 이모가 보여 줬던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 얼굴로 보여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착시를 무의식적인 추론에 의한 인지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즉, 어린 나는 마룻바닥에 .. 2024. 3. 10.
[플라워 킬링 문(The Killers of the flower moon) - 마틴 스콜세지] 시절, 액자로 남다. [플라워 킬링 문(The Killers of the flower moon) - 마틴 스콜세지] 시절, 액자로 남다. 옆으로 쪼그리고 누운 뒷모습을 본다. 작고 둥근 등이 볼록하다. 엄마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40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재직하시며 오토바이로 출퇴근하셨던 것, 까맣고 멋있는 오토바이 뒤에 수박, 참외, 참조기, 같은 식재료를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오셨던 것, 그러다 수박이 톡 도로에 떨어져 쪼개어져 버리면 그것을 노끈으로 동여매 아무렇지 않은 척 부엌에 가져다 두셨던 것. 아직 엄마가 여중생일 때, 오토바이를 타고 읍사무소로 출퇴근하던 외할아버지는 예의 오토바이 뒤쪽에 엄마를 태우고 등교시켰다. 하교는 외할아버지의 퇴근과 시간이 맞지 않으니 대부분 엄마 혼자 .. 2023. 12. 30.
[서울의 봄 - 김성수] 우리는 나아간다. 기억함으로써. [서울의 봄 - 김성수] 우리는 나아간다. 기억함으로써. 나는 실제 인구가 3만 명 남짓 되는 작지만 아름다운 고장에서 자랐다. 나와 세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랬듯이, 우리 (초, 중, 고등) 학교는 늘 가던 곳으로만 현장체험학습을 갔다. 강천산에 오르고, 금산에서 꽃을 보고. 물론 당시에는 지겨워했지만, 지금은 기억이라는 영화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씬으로 남는 자연의 장면들이다. 가까운 대도시가 광주였던 탓에 광주로도 현장체험학습을 많이 갔는데, 그 시절 내가 보고 느꼈던 대부분의 것들이 아름다운 것이었던 반면, 광주에서의 현장체험학습에서 본 것들은 강산이 한번 하고도 반 넘게 바뀌는 시점까지도 가장 참혹한 장면들로 남아 있다. 광주(光州)의 5월이 유독 찬란한 것은 비참한 역사의 틈 사이로.. 2023. 12. 15.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크리스토퍼 놀란] 느린 기적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 크리스토퍼 놀란] 느린 기적 인사부서에서 일하게 된지 벌써 9개월이 되었다. 모든 업무에 있어서 예외적 허용 범위가 극히 좁고 따라서 인사관리가 유연하지 않은 조직특성상 내게 부여된 권한 또한 그 크기가 크거나 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300여 명의 성과급, 근평, 전보, 부서배치 등의 인사관리를 거의 전담해 왔다. 그렇게 아홉 번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 동안 지켜본 것은, 지난 30여 년간 직, 간접적으로 경험한 어떤 일상보다 어둡고 차갑다. 나는 성선(성품, 타고난 사람의 천성 성 性, 착할, 어질 선 善) 설을 오래 믿어 왔고, 현실의 대부분의 비극은 느슨한 연대와 부정의(아닐 부 不, 바를 정 正, 옳을 의 義)에 꾸준히 저항하는 지구력으로 상당 부.. 2023. 11. 20.
헌책방 소장 도서 목록 한번에 정리하기는 힘드니까 조금씩 업데이트 할 헌책방 소장 도서 목록 1. 2023 새벽녘 연필소리 1) 태풍의 계절 2) 그로운 3) 여행자와 달빛 4) 가여운 것들 5) 베르타 이슬라 6) 만조를 기다리며 7)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8) 단 한 사람 독서가들을 위한 뉴스레터 추천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248950 2. 브런치북 부커로 만난 나의 인생 이야기 1) 채식주의자 2) 작은 것들의 신 3) 남아 있는 나날 3.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 실낙원 2) 루이 랑베르 3)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4) 순교자 5)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6) 더블린 사람들 7) 정글북 8) 염소의 축제 9)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10) 호텔 뒤락 11) 이인(이방.. 2023. 11. 11.
[호 - 정보라] 호의 편지 [호 - 정보라] 호의 편지 너의 세상이 긴 우호라면. 그래서 우리의 세상이 만나는 찰나가 짧은 열호, 아니 그저 그 포물선 위의 작은 점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너의 우호가 아스라이 궁굴려져 어느 시간 위에 걸릴 때까지. 나는 이 원호 위에 있을게. 무수히 해가 뜨고 지는 어느 날들을 견디며. 순리. 이치에 맞게. 우주가 세계를 운영하는 대원칙에 들어맞는 방향으로. 어떤 일이 순리에 맞게 흐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언젠가 죽음으로 삶을 갚아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태어난 이상, 순리에 맞게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도, 그 간단한 한 문장을 굳게 믿을 만큼 강인해질 수도 없다. 무슨 생각으로 애한테 그런 .. 2023.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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