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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잠 - 유재선] 앎과 받아들임 사이에

by 헌책방 2024. 3. 10.

[잠 - 유재선] 앎과 받아들임 사이에

 

과외와 학원 알바로 모진 서울의 생활비를 충당하던 시절. 어린 선생(먼저 선 先, 태어날 생 生)이었던 내가 학생들에게 그나마 가장 많이, 확신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문장 중에 하나는, 아는 부분은 찢어버려. 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대부분의 순간 가족의 눈과 책장에 맺힌 활자를 쫓았지만, 종종 누워 유난히 맑았던 그 시절의 하늘을 눈에 담거나 멍하니 벽지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구름이 토끼나 하트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벽지 속 패턴이 악마나 괴물, 이모가 보여 줬던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 얼굴로 보여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착시를 무의식적인 추론에 의한 인지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즉, 어린 나는 마룻바닥에 누워 바라보던 미지적 풍경에 무의식적으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인간은 아는 것만큼 본다. 그리고 보는 것만큼 안다(知). 따라서 아는 것이나 보는 것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어느 한쪽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것만으로는 충족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알거나 볼 수는 없다. 정보의 양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필요성은 이런 지점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어떤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에 대하여 ‘안다’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만큼 숙지도를 높인 후에는 주어진 맥락을 자신이 익히 아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해석한다. 디자인부터 무작위에 가까운 벽지의 문양을 해석하는 것도, 교과서를 눈에 익었거나 이미 그 내용을 내 것으로 소화한 텍스트를 중심으로 독해하는 것도, 인간이 아는 것만큼 보고 보는 것만큼 아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인간에게 중요하고 또 <곡성>에서 목격하였듯이 경계하지 않으면 무서운 이유는 앎과 봄에서 온다.

 

 

 

 

<잠>의 이야기는 인간이 어떤 사실을 이미 목격하여 알게 되었고 그래서 믿게 되는 과정, 혹은 알고 있거나 이미 믿고 있어서 딱 그만큼 보게 되었고 그래서 그 목격이 믿음을 강화시키는 과정을 그리며, 그 과정이 사고와 시야를 편협화하고 완벽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외부와 타협 불가능한 견해를 만든다는 착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본작은 이 착점을 의식적으로 시야를 돌리거나 사고의 폭을 확장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한 선입견(먼저 선 先, 들 입 入, 볼 견 見) 안에 자신을 가둔 채로 외롭게 인간 실존적 한계에 봉착하게 되는 인간의 숙명을, 잠이라는 일상과 생존의 필수 요건임과 동시에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로 기능하는 활동을 끌어들여 대유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수면욕은 인간의 3대 욕구인 수면욕, 식욕, 배설욕 중 억압받는 경우 체력과 정신력에 가장 빠르고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욕구이자, 불특정 다수의 현대인이 그 해결에 장애를 겪고 있는 욕구다. 따라서 신경질적이고 예민하며 때로 불쾌하기도 한 본작의 캐릭터들은 관객 자신 혹은 관객 주변의 어떤 이름으로도 치환 가능하다는 높은 호환성을 띤다. 

 

 

아파트를 주된 장소적 배경으로 설정하고, 갈등의 요인을 묘사하는 데에 장소적 배경과 엮어 층간 소음이나 물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심정적으로는 괴리가 큰 이웃들과의 관계를 적극 이용한 사실도 이 기괴한 이야기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감각을 강화한다. 평범한 일상은 잠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기본적인 생활 요소의 균열에서 시작하여, 아파트의 공용공간과 그곳을 함께 공유하는 이웃들과의 관계라는 공적 영역의 균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일어나는 걷잡을 수 없는 균열로 인해 산산조각 나버린다. 종종 인간은 아내라는 이유로, 혹은 남편이라는 이유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대범하게 결정해 버리고, 알고 있다고 믿는 그대로에서 어떤 미세한 조정이나 새로운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이는 일상을 이루는 평범한 풍경에 대하서도 마찬가지다. 수진과 현수는 서로를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믿고 있지만, 되려 그 믿음에 의하여 걷잡을 수 없는 비극에 침잠한다. 앎과 이해(다스릴 이 理, 풀 해 解)의 격차는 시간이 지나고 믿음을 배반하는 현상이 개입할수록 크게 벌어진다. 안다는 것이 표피에 대한 표상적인 인지(인정할 인 認, 알 지 知)에 불과할 때, 관계의 고리는 취약해지고 잘못된 믿음은 그 인지의 방향으로 고착화되고 강화된다.

 

 

확실히 아는 것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얼마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쉽게 ‘안다’라고 표현하는 오만함과 허영심에 익숙해져 있는지를 반증한다. 현대인이 지인(알 지 知, 사람 인 人)과 친구(친할 친 親, 예 구 舊)를 명확하게 구분 짓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안다는 사실이 얼마나 얕은 관념인지 우리는 종종 잊고 지내는 것 같다. 인간은 동시에 많은 것을 인지하지만 의식하거나 이해하지는 못한다. 단순히 어떤 대상을 인지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인지를 나름의 방향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즉 이해로 나아가는 것이 다정한 이 부부가 눈앞에 닥친 시련을 헤쳐나가는 데에 필요한 선행이었을 것이다. 앎은 다른 맥락을 해석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지만, 이해는 전혀 다른 텍스트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제반으로 기능한다. 인간이 지식을 습득할 때는 앎과 이해 사이에 간격은 좁다. 수열의 극한과 급수는 그 원리를 아는 순간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복합적인 이해가 필요한 존재, 특히 인간과 인간관계를 둘러싼 현상을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수학 문제를 풀거나 비문학을 독해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공정이 존재한다. 본작은 앎과 그것에 기반한 믿음에 대한 경계의 설파이며, 상대방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그러면서도 이해의 결과에 따라 상대의 의미를 판단하고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존중하는 것의 필요성에 대한 완곡한 외침이다.

2024. 3. 카페 Knows에서 영화 <잠>을 떠올리며 쓰다.

 

 

관람 후에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고 쓰는 영화 후기라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몇 자 내가 이해한 영화가 아니라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본다면

<잠>은 배우들의 호연이 특히 빛을 발했던 작품으로 기억 남는데, 정유미식의 일관된 연기가 크게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전혀 다른 질감으로 다가오는 점이 매우 인상 깊었다. 한 때 홍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로 <옥희의 영화>, <우리 선희> 등에서 호흡을 맞췄던 이선균과 정유미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케미를 보이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표현이나 연출에 힘이 달린다는 인상을 받은 적도 있지만, 인물들이 <곡성>에서처럼 특정 현상도 믿음과 가치관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는 시선이 읽혀서 마무리 장면까지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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