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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18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엄마에 대하여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엄마에 대하여 엄마에 대하여 쓰는 것은, 나에 대하여 쓰는 것과 비슷하다. 내 글에 유독 엄마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내가 마마걸이어서도-나는 오히려 스스로가 독립적 존재임을 앞세우는 효로 자식에 가깝다-, 주변에 남은 사람이 엄마 뿐-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친구가 아직 30명 가까이 남아있다-이어서도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보면서 나를 본다. 엄마를 맡으면서 내 향기를 감지한다. 엄마를 안으면서 나의 자아와 대화하고 화해한다. 이는 DNA나 피를 타고 상속 되는 기질 같은 생물학적 분석이나 물보다 피가 진하다는 혈육의 정과 같은 보편적 정서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아빠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가족에게 더없이 .. 2022. 10. 26.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 딜레탕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 딜레탕트 우리 집 책장 맨 아래 칸에는 나와 동생의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는 A4 파일철들이 있다. 아빠가 사무실에서 거의 강제로, 그리고 가격 면에서는 반쯤 사기를 당해서 디카와 캠코더를 사 온 이후로 아날로그 카메라들은 먼지 구덩이 속으로 밀려났지만, 나와 루나가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외출하는 엄마 손에는 늘 묵직한 똑딱이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엄마는 사진을 인화해서 A4에 풀로 정성껏 깔끔하게 붙인 뒤, 사진마다 사진 속 찰나가 어떤 순간이었는지 정성껏 각주를 달아 놓았다. 나랑 루나는 그 흔적을 열어볼 때마다 흠칫한다. 위에서 내려찍은 우리들의 머리통은 만화 캐릭터처럼 둥글고 거대하다. 그러나 엄마는 그 사진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사진 속 순간을 떠.. 2022. 9. 13.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이야기는 계속 된다 / feat. 연희동 청수당 공명, 예스24 굿즈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이야기는 계속 된다. 아빠, 어떤 게 할머니고 어떤 게 할아버지야? 아빠는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가 묻힌 쌍분 앞에서 코를 훔쳤다. 그리고 내 질문에 곧, 게가 아니고 어떤 쪽이라고 말해야제, 분도 괜찮고. 우리나라에서는 무덤 앞에서 보았을 때 남자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모신다. 하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아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디 그렇게 외우지 않아도 될거여. 잔디를 심은 지 꽤 됐는디. 어무니 쪽은 잔디가 길게 자라고, 아부지 쪽은 잔디가 짧게 자라는 거이 보이제. 두 분 머리 스타일 기억하냐?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는 왼쪽, 할매는 오른쪽 하고 되뇌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신 분들의 머리 스타일이 봉분에 난 잔디의 길이랑.. 2022. 8. 27.
[가꾸는 이의 즐거움 - 이유리] 행운목처럼 [가꾸는 이의 즐거움 - 이유리] 행운목처럼 행운목에 꽃이 피면 좋은 일이 생긴대. 행운이 와서 행운목이라는 거지. 거실 한복판에서 행운목이 하얀 꽃을 여물렸다. 죽은 듯이 가만히 서있던 행운목이, 갈색 줄기 속에서 남몰래 키워 온 펄떡거리는 생명을 세상에 여봐란 듯이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예닐곱 살쯤 됐었던 그 해,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었을 여러 이야기들 중에 무엇이 행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저 작은 나무토막 같던 시절부터 몇 년을 공들여 키운 행운목이 드디어 꽃을 피우자 엄마 얼굴도 그 하얀 꽃처럼 화사하게 빛났던 장면만은 어제 일처럼 선연하다. 그때는 엄마가 화분을 들여다보고 그 여린 잎들을 보살피며 식물을 키우고 가꾸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과 같다고, 나래와 루나를 키우.. 2022. 8. 6.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비가 오니까 너도 오는구나. 이별 후에 유독 새벽이 길어졌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편인데, 베개에 불면이 숨어 있었는지 박명 사이로 자꾸 뒤척임이 스민다. 지난밤 꿈에는 너의 모습이 말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와 까만 밤과 새벽 틈 사이에서 눈을 떴다. 투두둑, 발코니 철제 난간에 정신없이 빗방울이 내려 춤추고 있었다. 너와 나란히 앉아 이별을 말할 때 함께 보았던 하늘에 걸린 회색 장막에, 삼천 개의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날 차마 내리지 못했던 그것들이 빗방울이 되어 펼친 손위로 나렸다. 처마 끝에 매달려 나리는 빗속으로 오목하게 손바닥을 반쯤 쥐고, 목놓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도 너의 맘대로 꿈속에 왔듯이. 내 맘대로. 주책맞게도 빗방울 소리를 손에 담.. 2022. 7. 19.
[드라마 : 안톤 체호프 단편선] 얼룩 / 북리뷰, 독서 일기 [드라마 : 안톤 체호프 단편선] 얼룩 창문에 조그맣게 얼룩이 번진다. 저걸 어떻게 닦아낸다. 신문지에 물을 묻혀 닦아낼까, 부드러운 천을 가져와서 닦아낼까. 내내 고민하다가 뒤늦게서야 숙고의 결과로 닦아보지만, 풍경 위로 헝겊이 지난 자리가 오돌돌 하다. 그 흔적을 지우려고 닦고 또 닦다가 엉엉 운다. 내 삶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보기 드물다 할만큼 미련한 인간이다. 최선을 다해도 그 결과가 후회로 남는다는 점에서 능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최선을 다하면 일정 부분이라도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 지독한 낙관주의자며, 능력이 부족한 지독한 낙관주의자임을 스스로 알면서도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들과 고민을 나누지 않는 것이 배려이고, 온전히 혼자 책임지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비겁.. 2022.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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