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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18

[불편한 편의점 - 김호연] 사라진 오래 남는 것들 / 북에세이, 북리뷰, 독서 일기 [불편한 편의점 - 김호연] 사라진 오래 남는 것들 사람의 기억은 이상하다. 이것까지 저장하니까 용량이 부족하지. 살펴 보면 한숨이 절로 새게 하는 가벼운 기억이 꽤 많다. 예컨대 펌프하면서 땀을 비오듯 흘렸던 전학 간 경수의 얼굴이라든지, 불콰한 얼굴로 오는 애들마다 새우깡 몇개를 나눠주시던 술꾼 세광슈퍼 아저씨라든지, 닭도 튀기고 슈퍼도 하는 오성슈퍼 냄새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오성슈퍼는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부엌에 꼬꼬 소리가 가득했고 수많은 생명의 죽음을 암시하는 커다란 칼과 도마로 쓰는 새까매진 나무 밑둥이 어쩐지 서늘하게 했지만, 닭을 튀기는 달콤하고 기름진 기름 냄새가 가득해서 따뜻하기도 했다. 닭 주문이 들어왔는지 사장님이 닭을 잡고 있는 순간에는 눈을 질끈 감고, 과자가 가득한 매대 사.. 2022. 6. 8.
[아가미 - 구병모] 땅 위에서도 물 속에서처럼 / 북리뷰 feat. 연남방앗간, 파주 지혜의 숲 [아가미 - 구병모] 땅 위에서도 물 속에서처럼.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는 순간,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발화를 청취한 모든 사람에게 그 발언은 발화자의 공식적 입장이 된다. 오랜만에 친구 B를 만났다. 그와 나 사이에 주된 토픽은 거의 늘 연애였기 때문에, 현재 만나는 연인이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지내는지, 같은 타인과 나누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는 질문이 오가는 것이 자유로운 편이다. 심상한 질문에 그는 남자친구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아요. 비슷한 정도. 라고 대답한다. 짧은 대답 이면에서 B의 두려움을 느꼈다.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정말 B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는 셈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말의 힘이 세다는 사실이 종종 뻑쩍지근하게 뼈저리는 일이 쌓이면서, 별 것.. 2022. 5. 27.
[전주국제영화제 밀란 쿤데라 세션] [농담 - 야로밀 이레시]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 - 밀로슬라프 슈미드마예르] 나는 누구인가 [전주국제영화제 밀란 쿤데라 세션] 나는 누구인가 [농담 - 야로밀 이레시]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 - 밀로슬라프 슈미드마예르] 삶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때였다. 오랫동안 닫아 놓았던 기억의 궁전이 되살아나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나약함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었고, 부단히도 나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왔던 짧은 인생에 사정 없이 금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듯 이명으로 울렸다. 자려고 누우면 밤이 내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서 잠들지 못하고, 살아있으려고 앉으면 깨어나야 마땅한 시간이 지나도 눈을 뜨지 못했다. 겨우 밥을 씹어 삼켜도 속절 없이 모두 게워올렸고, 옷에 담겨 다니는 것처럼 보일만큼 몸이 쪼그라들었다. 바람이 불면 살갗을 찢어버릴듯이 털이 곤두섰다. 무.. 2022. 5. 19.
[아무튼, 술 - 김혼비] 어쨌든, 술 (술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feat.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 / 북리뷰 맞습니다. [아무튼, 술 - 김혼비] 어쨌든, 술 (술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은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그들의 지식의 양을 늘리려는, 부모들의 술수라고 생각했다. 내가 뭔가를 많이 보고싶은가? 넓게 보고싶은가? 뭘 보고싶은가? 하는 고민도 없이 그것이 뭐든 보이는게 좋다는, 무언의 압박이랄까. 여전히 앎은 그 양보다 질과 깊이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변함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와, 아는만큼 보인다더니, 이 말이 진짜구나- 하고 실감하는 때도 많아지고 있다. 며칠전에는 이 깨달음을, 입으로 옮기기도 했다. 어디에 눈을 둬도 즐길거리가 가득한 서울에서도, 막상 햇살 좋은 날 집 밖으로 나서 누군가를 만나면 함께 갈 곳이 많지 않다. 먹은 밥을 또 먹을 수도 없고, 마신 커피를 또 마실 .. 2022. 5. 3.
[달리에서 마그리트까지 - 초현실주의 거장들 :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전] 예술의 숙명 / 전시회 후기, 리뷰 [달리에서 마그리트까지 - 초현실주의 거장들 : 로테르담 보이만스 판뵈닝언 박물관 걸작전] 예술의 숙명 회랑 가득 땀방울이 넘실거렸다. 마스크 안에 묵직한 더위에 숨이 막혔다.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는 K는 머리부터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괜찮아?" 내 질문에, 착한 K는 땀을 닦으며 난 정말 괜찮은데? 하는 표정을 보인다. "괜찮아. 너는?" 한다. 나는 안 괜찮았다. 성큼 다가운 여름 앞에서, 때 늦은 두터운 자켓을 입고. 초현실주의가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회랑에 서서 더위를 견디고 있는지, 현실감각이 아릿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K는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비현실적인 소재와 극히 현실적인 표현방식 앞에서 "우와 이거 진짜 사진 같아!", "우와 저것봐 진짜 그림이 맞아?" 같은 감탄을 쥐어 .. 2022. 4. 27.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상상력을 잃으며 —나래미온느와 머글 아빠— / 영화 리뷰, 후기, 용산 아이맥스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 상상력을 잃으며 —나래미온느와 머글 아빠— 누가 해리포터를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응, 해덕이야-하고 대답해야할지, 아니, 책은 몇 번 읽었는데 해덕까지는 아니고-라고 해야할지, 헷갈린다. 살면서 해리포터 세계관을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들 중에 원작 책을 영화화한 작품을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 안 보기까지 한 사람을 한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 나 자신만 빼고. 지금은 영화관이 들어섰지만 내가 밤새 몰래 불을 켜고 해리포터를 읽던 시절에는 우리 동네, 아니 우리 군에 영화관이 없었다. 영화가 개봉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몇 날 며칠 아빠를 조르고, 꼬드겨, 아빠의 회색 현대 뉴 엑셀 a.k.a. 4333을 타고 광주에 갔다. 인터넷 영화 .. 2022.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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