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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전주국제영화제 밀란 쿤데라 세션] [농담 - 야로밀 이레시]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 - 밀로슬라프 슈미드마예르] 나는 누구인가

by 헌책방 2022. 5. 19.

[전주국제영화제 밀란 쿤데라 세션] 나는 누구인가
[농담 - 야로밀 이레시]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 - 밀로슬라프 슈미드마예르]


삶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때였다. 오랫동안 닫아 놓았던 기억의 궁전이 되살아나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나약함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었고, 부단히도 나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왔던 짧은 인생에 사정 없이 금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듯 이명으로 울렸다. 자려고 누우면 밤이 내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서 잠들지 못하고, 살아있으려고 앉으면 깨어나야 마땅한 시간이 지나도 눈을 뜨지 못했다. 겨우 밥을 씹어 삼켜도 속절 없이 모두 게워올렸고, 옷에 담겨 다니는 것처럼 보일만큼 몸이 쪼그라들었다. 바람이 불면 살갗을 찢어버릴듯이 털이 곤두섰다. 무상에 닿으려던 순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새벽녘 어두운 대기를 뚫고 억겁에 가까운 시간을 달려 망막에 닿는 별빛이었다. 어디에 닿을지도 모르고, 어딘가 닿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아 암흑으로 스러지게 될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빛을 내는 그것들이 나를 살렸다. 별의 실존을 확인하며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묻기 시작했다. 그 빛의 의미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떤 의미인지. 매일밤 패딩을 입고 벤치에 앉아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 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생은 거대한 은유이자, 모순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어떤 관념의 은유이기 때문에 인간은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들로 둘러싸여 살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실체 없는 메타포 속을 걷는 우리가 그저 존재하는 것 자체만으로 스스로의 실제로(實) 존재함(存)을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나는 무엇인가. 그럼으로써 인간은 주체적인 방식으로 실존을 이룩한다. 청춘이 그러하듯 우리가 실존에 부여한 의미는 저마다 다를 것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거대한 메타포의 어디에 가닿아 있는지, 자신의 실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결정하고 부여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 묻는 사람에게 세상은, 비로소 무위를 예정하고 침몰하는 난파선이 아니라 딱딱한 실체를 가지고 바다 위에 실존하는 거대한 방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갑판에 나와 바람을 쐬면, 시가를 피우면, 속이 찌르르해지는 위스키를 마시면, 스쳐지나가는 모든 은유의 조각들이 인생을 뒤바꿀만큼 의미 있는 무위로 손끝에 닿을 것이다. 끝내 무상해질 몸짓이지만 그 작은 조각들을 소중히 모아 인생의 변곡을 힘껏 겪는다. 최근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다시 읽었다.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추천 받았다. 전주국제영화제에 갔다. 작품에서 인간의 실존을 깊게 다루고 삶의 무의미함을 폭로했으며,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인상적인 인터뷰를 남기고,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미니 세션의 주제가 된 작가 밀란 쿤데라에게로 작은 은유들이 나를 떠밀고 있음을 느꼈다. 방주가 힘차게 맞아야 마땅한 파도의 꼭지점 앞에 있음을 깨달았다. 실존과 타인의 실존에 대한 철학, 실존주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을 사랑할 수 밖에 없지만, 10여년전의 어린 나는 카프카의 텍스트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덮으며, 쿤데라가 구가하는 선풍적 인기에 고개를 갸우뚱한 이후로 그의 작품을 열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10년만에 그를 다시 읽었다. 변곡을 맞았다.

 

결론적으로 <농담>을 다시 읽으면서, 지난 10년 동안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던 은유의 조각들을 수집해 온 무식한 우직함과 무위를 향한 항해가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삶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다는 것을 이해할만큼, 조금씩 지금의 자리로 나아왔음을 느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밀란 쿤데라, 문학과 영화 사이라는 이름으로 미니세션이 진행 되었고, 오프라인으로 주황색 옷을 맞춰 입은 지프지기들이 6개월 동안 갈고 닦은 친절한 미소로 안내한 상영관에서 1967년 발표된 밀란 쿤데라의 <농담>을 1968년 야로밀 이레시가 영화화한 작품, <농담>을 관람했다. 나는 영화관에서 예고편이 나오면 눈을 감고, 유튜브에서 영화 예고편을 광고로 접하는 것이 싫어서 프리미엄 결제를 한 사람이다. 이 상영작에 대한 사전 정보도 원작 <농담>과 출판사가 쿤데라가 자신의 작품과 자신의 생애를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고려했는지 형식적으로 책 날개에 한 두줄 적어 놓은 밀란 쿤데라에 대한 피상적인 정보, 그리고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읽은 짧은 인터뷰 뿐이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21세기 들어서 만들어졌고, 일부러 흑백으로 촬영하였으며, 5~60년대 체코를 연상하게 하는 배경은 철저한 고증에 입각한 결과라고 착각했음을 고백해야겠다. 회사에서 A와 이 영화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작품이 만들어진 시점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만 시간을 뛰어넘는 탁월함에 전율했다. 이 외에도 영화 <농담>은 구할 수만 있다면 감상해볼만한 가치가 차고 넘친다. 쿤데라는 야나체크를 존경했고, 쓸 데 없는 부분은 모조리 들어낸 구조적 명료성과 다성, 대위법을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들고 왔다. 영화는 70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800여 쪽의 두꺼운 작품을 함축하되, 반드시 그대로 옮겨야 하는 부분은 작품을 그대로 옮기고, 다른 부분은 유연하게 처리한다. 또 다성적 구성의 특성을 차용하되, 인물들의 목소리가 다성적으로 구성된 소설과 달리, 주된 테마는 루드빅으로 삼고 현재와 과거가 다성적으로 엮여나가도록 한다. 그야말로 서사(敍事)는 공유하되 플롯(plot)은 달리한, 재구성의 성공적 사례다.

 

온라인으로는 밀로슬라프 슈미드마예르가 2022년 발표한 따끈따끈한 다큐멘터리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를 관람했다. 작품에는 쿤데라의 정식 인터뷰 영상을 포함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목표로 하는 감독의 페르소나가 등장한다. 그는 쿤데라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완벽히 이해한 인터뷰이만 받아들인다는 착점에서 시작하여, 쿤데라와 그의 생각에 대해서 세세히 공부하고, 강의, 인터뷰 등에서 발췌한 몇 없는 음성 자료들과 영화화된 그의 작품들의 일부 장면들을 엮어 섬세하게 빈 곳들을 꿰매어 나간다. 감독은 전세계적으로 사랑 받지만 정작 알려진 바는 거의 없는 작가의 삶과 작품 세계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혀 거의 탐닉하듯하며 공부해나가다가 어느날, 고약한 농담처럼, 작가의 진심에 닿는다. "제가 꿈꾸는 세상은 법에 따라 작가가 정체를 숨기고 가명을 쓰는 세상입니다. 그럼 글에 대한 집착도 현저히 줄어들 거고 작가의 삶에 대한 침해도 줄어들 것이며 문학 작품을 작가 생애와 결부시켜 해석하는 일도 불가능해질 테니까요."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무상함에 닿은 관객은, 결국 무위로 돌아간 인터뷰의 시도에 대한 이 기록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이라는 문제에 몰두했던 쿤데라의 삶과 그의 작품들을 닮아있음을 깨닫게 된다. 진지한 몰입 끝에서 어이 없는 결말과 마주치더라도 몰입의 순간 얻은 것들은 결코 의미 없지 않다. 결국 죽음에 맞닥뜨린다는 정해진 운명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내고 나는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진지한 고민과 사유는 늘 아름답다. 그러나 실존은 무상, 무위함과 맞닿아 있고, 우리 삶의 대부분을 이루는 자기자신과의 그것을 포함한 모든 의사소통은, 완벽한 체결이 불가능하고, 설사 가능하더라도 그것이 완벽한 진담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역시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유쾌함과 농담으로 이루어져있기에. 가끔은 진지한 사유를 무상한 유쾌함으로 전환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물론 우리 삶이 무상한 농담으로 이루어져있다면, 사유라도 진지해야하는 것이 균형을 이룸에 있어서는 탁월한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심연의 끝에서 해수면을 뚫고 감은 눈으로 나렸던 별빛은 참으로 옅었다. 더 눈을 꼭 감으면, 먼지를 흩날리며 주저앉는 기억의 궁전 안쪽으로 더 꼭꼭 숨으면, 더 이상 그 빛이 보이지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다. 그 연약한 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조금 더 보려고, 위로 위로 헤엄쳤다. 그것은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자, 무망한 숙명을 훼손하려는 투쟁이자,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일을 무엇으로 살지 고민했던 오늘들이 모인 결과였다. 심해의 바닥은 고요하다. 옆을 지나는 갈치의 눈알이 섬뜩하다. 별빛이 그의 옆구리를 치고 눈꺼풀을 뚫었을 때, 푸르르. 오랜만에 폐에 웃음이 찼다. 여기 있다고 자신의 존재를 깜빡 깜빡 알리는 그것이 아름다워 웃었다. 닻을 끊고 오래 헤엄쳐 실로 오랜만에 파도의 간질임을 느끼며. 이 변곡의 날카로운 단면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실감했다. 그렇게 농담이 날 살렸다. 그러니 내게는 누군가의 무의미한 농담을 아끼는 삶을 살 책무가 있다. 그것이 오늘 내가 나에게 묻는 '나는 누구인가'의 대답 중 한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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