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봤다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의 의미

by 헌책방 2022. 6. 28.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의 의미


'식구'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족(家族)은 뿌리를 같이하는 친족, 특히 혈연 관계에 있는 이들을 묶어 부를 때 쓰고, 가정(家庭)은 혈연, 혼인으로 성립된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 자체 혹은 그들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부를 때 쓴다. 때문에 내가 속한 가족이나 앞으로 이룰 가정에 속하는 이들은 아닌, 그러나 친밀한 관계를 맺어 집단을 이룬 이들을 지칭할때, 가족과 가정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적확하지 않다는 감각이 있다. 반면 음식을 나눠 먹는 입들이 모인 모임, 그 특별함을 말하는 단어 '식구(食口)'에는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누군가와의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함의 되어 있다. 그럼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작품을 통해 그리기 즐기곤 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 공동체를 '대안식구'가 아니라 '대안가족'이라 지칭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는 운명적으로, 혈연으로 묶인 혈족만큼이나 그들 사이가 밀접함을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자리잡고 있는 현대에서는 가족에 대한 정의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꽤 긴 시간 단골로 매일 드나들던 바가 있었다. 그곳에서 참 좋은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었다. 같은 가게의 단골 손님들이라는 느슨한 연대 속에서 사회에서 얻기 힘든 관계에서의 성취감과 안락함을 느꼈고, 쉬이 누군가를 가족, 식구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던 나도 단골들의 모임을 식구,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1년 남짓한 교류를 끝으로, 나를 비롯한 핵심 구성원들이 거처를 옮기고, 모이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가족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래도 마음의 고향이랄까. 장소에서 받는 위로와 장소에 켜켜이 쌓인 시간들에게서 얻는 온기 덕분에 소중한 사람들과 그곳을 자주 가고는 했다. 자연스레 그 모임을 친구들에게 소개해줬고, 어느 날 그 친구 중 한명이 '가족' 중 일원에게서 성적 언어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사자를 찾아가 따져 물으려 했지만 피해자가 일이 커지기를 원치 않는 듯 했고, 따져 묻는 뾰족한 말들은 (아마 일시적으로) 가슴에 묻게 되었다. 인간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서 가족 구성원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폭행을 휘두를 수 있다는 사실에 짙은 환멸을 느꼈다. 이 일은 가슴에 원한으로 맺혀서 아직도 가해자에게 전화를 걸어 가족과 식구라는 말을 친하게 지낸다고 쉽게 해서는 안되고, 그런 명명을 내린 이상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한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현대인에게 가족이란 무엇인가. 아이가 태어나면 장성해 새로운 식구들을 만나 가족을 형성할 때까지 숙명적으로 혈족과 밀접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족의 본래적 의미인 뿌리를 같이 하는 친족 관계는 물론 가족에 포함하되, 혈족이 아니더라도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계도 가족의 의미에 포함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브로커> 와 같은 작품을 통해서 사회적으로나 영혼 내적으로 치명적 결함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유사 가족 형태를 이루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고, 가족의 새로운 의미에 대하여 제안한다. 마음 아픈 것은 새로운 가족 형태를 이룬다 하여 치명적 결함이 완벽히 치유될 가능성은 없다고 분명히 선을 긋고 있고, 그것이 날카로운 현실 감각이라고 여겨진다는 점이다.

 

 

<브로커>는 베이비 박스에 버려진 아기를 몰래 데려다 아기를 필요로 하는 부부에게 파는 브로커들과, 아기를 베이비 박스를 버렸다가 브로커들이 아기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가, 아기에게 좋은 가족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아 동행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행각을 경찰들이 뒤쫓는다는 것까지가 이야기의 골자가 된다. 일행은 부적법, 부적절한 목적으로 동행하면서 타인에게 일반적인 가족인 것으로 인식되고, 어쩔 수 없이 오해 앞에서 가족처럼 연기하면서도, 내심으로 서로 가족임을 강력히 부정한다. 하지만 점차 아기를 통해 돈을 번다는 부적절한 목적보다 아기의 행복을 위해 아기가 입양될 가정을 물색하는 것으로 여행의 목적이 -그나마 덜 악질적인 형태로- 변모하면서,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들의 내적관계도 가족의 형태가 될 수 있지 않을까를 각자 고민하게 된다. 아기 엄마 소영(이지은)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버지처럼 진정한 의미의 부모가 되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되고,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브로커들도 점점 마음이 동요 되어 아기를 중심으로 유사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은 얼핏 보면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러나 예의 감독의 다른 작품들처럼 희망은 회전관람차가 땅을 떠나 한 바퀴 돌아 허공을 가르지르고 다시 땅에 닿을 만큼이나 짧고 허망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라고 말하고 이내 네? 하고 되묻자, 아니야. 라고 대답할만큼 짧은 바람일 뿐이다.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가족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물으면서도 그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노력은 시작 되기도 전에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 짧은 기적 속에서도 손톱만큼이라도 여전히 치명적일지라도 인물들은 앞으로 힘겹게 한발짝을 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관람차 안에 앉은 동수(강동원)와 소영이 가족이 되어 함께 아기를 키우면 어떨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순간이다. 함께 가족이 되자는 동수의 말은 소영에게 이성적 매력을 느껴서 하는 프로포즈가 아니라, 보육원에서 자란 어린시절의 자신과 자신을 버린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아기와 소영에 각각 병치시킨 결과다. 따라서 동수가 눈물 흘리는 소영의 눈을 가려주고 용서하는 행위는 소영을 용서함으로써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로써 동수는 아직도 어둡고 비관적인 미래를 용서로 한겹이나마 벗겨낸다. 동수와의 대화를 통해 소영은 자신이 아기를 키워낸다는 가능성을 현실화하고자 마음을 굳히게 된다. 

 

작품은 칸의 선택을 받은 송강호를 비롯한 모든 배우들의 호연을 품고 잔잔하게, 그러나 가끔은 시원시원하게 전진한다. 이 점은 물론 직설적인 전달을 좋아하는 관객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하겠으나, 몇 장면에서는 전달하는 바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세련되지 못하다거나, 심지어는 나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부둣가에서 아이의 가격을 두고 흥정하는 주인공들과 젊은 부부의 대화는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모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던 소영이 아이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부각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나 생각해봐도 그 방식이 좋지 못했고, 장면을 이루는 대사는 순간적으로 작품의 질을 낮추기까지 한다. 배우 이지은이 작품 내에서도 종종 보여주는 차가운 분노를 이용했더라면, 소영이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한 이 이야기 속에서 그 첫걸음이 더 단순명료하면서도 시리게, 그리고 뾰족하게 가슴에 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일시적이나마 가족을 이룬 이들이 호텔 방에 불을 끄고 누워 서로의 소중함을 드러내놓고 말로 표현하는 후반부 장면도 모든 사람은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감독의 굳건한 의지를 느끼게 해주면서도, 관객에 따라 달리 해석 가능한 작품의 의미를 한씬만으로 축약해버린다. 물론 작품 자체가 아기를 돈으로 흥정, 거래하는 추악한 범죄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작품의 시작이자 가장 큰 흠집이기 때문에, 아기를 팔기 위한 이 여행은 거대한 메타포일 뿐이고 실제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은 소중하다'는 사실임을 전제하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선택들에서 그간의 작품을 통해 감탄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방식과의 깊은 간극이 느껴져 아쉬웠다. 무엇보다도 일견 작품에서 다루는 브로커의 일이 진짜 괜찮은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는 점에서, 작품은 소재로부터의 논란에서 내내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일구고 싶다는 생각은 극히 단순하고 그 단순함 덕분에 반짝이면서도, 그 이면은 무겁고 어둡다. 아직도 사랑만으로도 완전하고 충만한 가족을 일구고 있다고 순진히 믿지만, 가족을 이루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할만큼 세상은 믿을 수 없이 냉혹하다. 가족을 이루는 길에는 함께 하기 위해 물질적인 조건이 갖춰줘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때로는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이 자신을 부정하기도, 상처주기도, 인간이라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하기도 한다는 내밀하고 정형화하기 어려운 문제들도 산재해 있다. 그 안에서 깨지고 버티기에 여린 영혼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물 흘린다. 그러나 <브로커>에 등장하는 5명의 주인공들이 가족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온 가족(혈족과 사회에서 이루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집단을 포함)에게서 받은 상처와 회복 불가능한 회의감을 고려해 봤을 때, 가족의 의미는 다시 단순해진다. 사랑으로 인하여 함께 할 수 있다고 강력히 믿고,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주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사과할 용기로 서로를 대하며, 내재된 본능과 충동을 이겨낼만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를 그렇게 다독이고 함께하는 것. 그것을 비로소 가족의 성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이자, 상현(송강호)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를 금세 철회한 이유다. 속상하게도 일면식도 없던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뤄가는 기간은 길었지만, 그것이 해체 되는 것은 단 한 순간이었다. 약속의 순간들이 증발하는 것 마저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지극히 실존적인 자연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단순한 진심이 현실이 되는 것은 늘 요원하다. 야속하게도. 그래서 더 반짝인다. 

 

남친몬 아닙니다 ㅇㅅㅇ

사진에 등장하는 ㅎㅅㅎ은 위 기재한 업장과 무관합니다. 

또한 상기한 업장의 명예를 위해 다소간의 각색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타코가 진짜 맛있는 흠스홈! 상수역에서 약속 있으면 강추입니다>_<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www.instagram.com/seol_vely
댓글로 신명나게 이야기 나누는 중이에요.
여러분께서도 독서 후에 남은 감상을 다른 사람의 감상으로 새롭게 느끼고 다듬고 채우는 과정을 함께하세요!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독서는 발전합니다>_<

 


+
더불어 책, 영화, 드라마, 전시, 음악 등 각종 문화생활을 더 풍부하게 즐기고 싶은 힙한 현대인 당신을 위한 큐레이션을
카카오뷰 채널 헌책방이 무료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채널 추가 해주시면 문화생활도 트렌디하지만 깊게 즐기는 데에 도움 되는 인사이트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헌책방

오늘, 당신에게 추천할 책과, 문화생활 이야기

pf.kakao.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