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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토르: 러브 앤 썬더] 신은 죽지 않았다. / 쿠키 2개, 영화 리뷰, 후기

by 헌책방 2022. 7. 7.

[토르: 러브 앤 썬더] 신은 죽지 않았다.

믿음은 순전히 믿음을 행위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믿음(믿을 신 信)은 인편(사람 인 亻)에 맡겨 말씀(말씀 언 言)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 서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이 편지가 담고 있는 정보(말씀)를 신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면서 믿음에까지 그 의미를 확장하게 되었다. 정보는 독해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쓰여지지만, 텍스트 특성상 실시간으로 변하는 독해자의 생각에 맞춰 대응, 설득할 수는 없고, 따라서 독자는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에 따라 정보가 사실인지 판별하고, 그것을 믿을지 여부를 결정할 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순전히 믿음을 결정한 자의 책임이자,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마치 사랑처럼. 따라서 배신감(背信感)은 신뢰를 준 사람의 행위에 주로 기인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 감정의 일부는 믿은 사람이 책임져야 한다. <봄날은 간다>, 떠나고 여름이 오지 않으면 그것이 봄일리가 없다. 상우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묻다가, 이내 곧 헤어지자. 하고 덧붙인다. 은수는 동틀녘, 아무도 없는 어둑한 도로 위에서, 서울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강릉으로 오는 상우를 기다리다, 달려가 안긴다. 그 모습을 보고 이 사랑이 변하지 않으리라고 믿은 것은 상우다. 따라서 달려가 안기는 사랑을 했던 은수가, 그들이 헤어져있던 한 달 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었던 것은 명백한 배신이지만, 사랑에 충실한 은수를 보며 그녀가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상우도, 이 손 떨리는 배신감에 일부는 책임이 있다. 그래서 헤어짐을 말하는 그에게, 그래 헤어지자. 하고 대답했다. 우리 사랑은 어떤 높은 장애물도 거뜬히 뛰어 넘을 정도로 강하고 단단할 것이라고 믿은 것은 나였고, 그런 내가 배신감에 덜덜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탓해야하는 것도 나였다. 


 

몇 년 전까지는 누군가 종교를 물어보면 염주를 보여줬다.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느껴지는 고즈넉함을 사랑했다. 처음에는 순전히 종교는 기능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 깊은 믿음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성당에서 바이올린을 켜기도 했고, 수요예배를 드리는 거대한 교회 한구석에서 말씀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러 가면, 엄마가 해주던 이야기처럼. 부처님께서 한 귀퉁이에 올려 놓은 빈자의 작은 바나나도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신다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염주는 내 믿음의 상징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은 누군가 종교를 물어보면 스스로에 대하여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라고 짧게 대답한다. 짧은 시간 함께 했지만, 목숨만큼 소중한 존재가 있었는데, 한 순간 부지불식간에 잃은 적이 있다. 신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마음과 손이 빈약한 자마저 사랑하신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로소 <사바하>의 박목사가 읊조린 조용한 절규를 이해 했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어찌하여 당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그렇게 울고만 계시나이까. 부처께서는 나에게 믿으라. 하신 적이 없지만, 나는 <반야심경>을 읽고 108배를 올리며 제멋대로 그를 믿었다. 그리고 나는 내게도 책임이 있는 그 배신감에 떨며, 종교를 잃었다. 토르의 어드벤처 4번째 이야기 <토르: 러브 앤 썬더>는 인간이 희망을 품고 싶은 마음에 제멋대로 신을 믿고, 믿었던 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배신감을 느끼는 고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똑똑하게도 토르 주연의 단독 영화에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고르 캐릭터를 처음으로 삽입한다. 또한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ost와 토르의 일부 의상을 비롯한 극 전반에 흐르는 농도 낮은 락 스피릿을 첫 시퀀스에 등장하는 <매드맥스>와 닮은 환경과 연결 시킨다. 워보이들이 전투 중 사망하면 발할라에 들게 된다고 믿는 것도 초반의 사막 장면 때문인지 계속 상기 된다. 아포칼립스와 발할라가 가깝다는 사실은 늘 아이러니하다. 이런 짧은 도입부만으로 고르가 믿음을 잃고 큰 배신감에 시달리다가, 마침내는 신 도살자가 되어버리는 과정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물론 상당 부분은 크리스찬 베일의 연기력 덕택일 것이다.
 

<토르: 러브 앤 썬더>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말 분명한 영화다. 아마 타이카 와이티티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귀결시킬지 정해놓고, 결말이라는 화분 안에서 토르가 어떤 여정을 통해 뿌리에 닿을지 굵은 줄기를 세우고, 잔가지를 꽂아 연결해서 캐릭터들이 정해진 결말을 위해서 어떻게 움직일지 구체적으로 정하는 방식으로 작업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제목이 작품의 전체 내용을 꿰뚫는 것은 물론이다. 사랑은 우리 세계를 이루는 그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하고 천둥 번개와 같이 갑자기 오기 때문에, 상처 받기 두렵더라도 늘 마음을 열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르는 딸이 죽는 아픔을 겪는다. 바로 다음 순간 고르는 자신이 믿는 신이 자신을 추앙하는 자들을 전혀 굽어보지 않는다는것을 깨닫게 되고, 신에게서 지극히 이기적인 말들을 듣고 상처를 받는다. 그는 어둠의 힘이 깃든 칼로 자신이 믿던 신을 찔러 죽이고, 모든 신을 죽이겠다고 다짐한다. 토르는 가오갤 패밀리와 함께 전 우주를 돌아다니며 구호활동에 전념하다가 아스가르드의 아이들이 고르에게 잡혀가자, 고르를 저지하고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이 간단한 줄거리에 심오한 메시지를 더 추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감독은 사랑이 제일 힘이 세고, 진짜 중요하다. 로 밀고 가기로 하고, 따라서 단순한 플롯을 캐릭터의 힘으로 끌고 나간다. 그래서 화려한 캐스팅이 더욱 현명해 보인다. 나탈리 포트만, 테사 톰슨, 크리스찬 베일 뿐만 아니라, 가오갤 전 식구가 잠깐이나마 스쳐 지나가고, 맷 데이먼, 루크 헴스워스(크리스 큰 형), 심지어 러셀 크로우까지 서브 플롯을 담당하는 캐릭터 캐스팅도 무척 짱짱하다.
 

이야기가 단순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서브 플롯을 끼워 넣었는데, 배우들과 CG가 빚어내는 비주얼 앙상블이 수준 높은데다가 서브 플롯까지 화려하다보니 이야기 자체가 풍부한 것 같은 착시가 들기도 한다. 특히 서브 플롯도 아스가르드가 관광지화 되어 토르 세계관의 주축이 되는 이야기를 연극 무대에 올리는 모습, 토르가 과거(묠니르로 묘사)와 현재(스톰브레이커로 대표) 사이에서 과거에 집착하다가 현재의 눈치를 보는 모습, 토르 일행이 신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구축하기 위하여 신들이 모여 사는 옴니포턴스 시티로 쳐들어가는 과정, 제인이 암 4기를 진단 받고 묠니르에 기력을 의존하다가 마이티 토르가 되어가는 과정 등 다양한 크기와 질감의 서브 플롯을 섞어 이야기가 다채롭게 느껴진다. 연극 장면은 오딘이 아직 살아 있을 때, 로키가 왕 행세를 하면서 연극을 즐겼던 장면과 겹쳐 추억을 자극하기도 한다. 로키는 아마 토르가 고르의 복수혈전 속에서 모험을 하고 있을 때, 시간의 농간 속에서 동분서주 뛰고 있었을 것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안에서 로키만큼 다사다난한 캐릭터도 없다. 아쉬운 것은 대사가 워낙 많고 대사의 상당수를 농담이 차지하다 보니 볼때는 즐겁지만 끝나고 나서 여운이 남는 유머가 없어 오히려 공허감이 자극된다던지, 감독의 생각을 등장인물들이 계속 대사로 주고 받는 것이 그리 세련된 처사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제우스와 토르의 대립과정에서 제우스가 토르를 전라상태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제우스를 수행하던 여신들이 토르의 나신을 보고 쓰러지는 장면, 거대한 염소들이 울 때마다 그 기괴한 울음 소리가 극장에 퍼져 관객들이 동시에 킥킥 댔던 순간은, 지속 가능한 웃음은 아니지만, 매우 가볍고 즐겁긴 했다. 앞서 말했던 토르의 나체씬을 비롯한 19금 코드들도 꽤 즐거웠다. PC에 시달리는 헐리웃의 현상황과는 달리 시달림의 흔적이 많지 않은 점도 가볍게 즐기기에 좋았다. 무지개 색깔을 띄는 비프로스트, 발키리의 양성애 코드, 코르그의 동성애 코드 등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적정히 깔아넣으며 가이드를 마무리한 것이 PC에 시달리는 듯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보다 훨씬 깔끔하게 다가왔다. 

 

본작은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만큼 쉽고, 즐기기 간편한 팝콘무비다. 바로 직전에 영화관에서 관람한 작품이 해석의 여지가 무수하다시피 많은 <헤어질 결심>이었기 때문에 더 가볍게 느껴졌을런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라그나로크의 아성을 갱신하는 것은 요원해보인다. 마블 세계관에서 마법과 과학은 동의어로 쓰인다는 기본적인 전제를 까먹은 것만 같은 장면들이 섞여 있어서 걱정 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작품이, 자니. 잘 지내니. 가 찌질한데다가 사랑이 실패로 직행하게 되는 최단거리 비프로스트이자 웜홀이자 아인슈타인-로젠 다리가 되는게 아니라, 응, 잘 지내. 너는. 을 만나 서로를 사랑해로 마무리 되는, 짜릿한 러브 판타지라는 점에서 그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응원을 보내고 싶다. 이 이야기는 은수와 상우가 끝내 화분을 함께 키우지 않고, 슬금 슬금 돌아보면서도, 끝내 멀어지는 현실과는 거리가 먼 동화다. 현실과 다를지라도. 사랑, 우정, 부모와 형제를 떠나보내고도 다시 사랑을 만나 힘차게 뛰는 토르가 우리가 맞을 미래의 모습이라고 상상하면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르가 딸을 마이 러브. 라고 부르며 지극정성으로 키우고, 부활한 그 딸이 훗날 러브. 그 자체가 되는 설화 같은 결론도 피로한 현대에 괜찮은 위로가 되어준다. 나는 불가지론자일 뿐이지 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니체도, 차라투스트라도 아니다. 믿음을 품을 만큼 책임감을 갖추지 못한 인간이라, 겁나서 망설일 뿐이다. 또 다칠까봐. 박목사가 신이 없다고 믿었다면, 혹은 죽었다고 생각했다면, 어둑한 하늘, 베들레헴의 죽음을 기억하고 슬퍼하는 그 얼굴에 대고, 어디 계시나이까. 하고 부르짖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진난만하고 마음 여린 금수저 출신 토르가 여전히 흥겹고 긍정적으로 어드벤처에 임하면서 헤프다 할만큼 반복되는 웃음 사이로, 맘 아프게도 언뜻 언뜻 상실로 인한 상처와 눈물을 비추던 것이 내내 맘에 남는다. 또 다시 찢어질까봐 두려워서 마음에 빗장을 단단히 걸어잠근 토르를 보며 나는 박목사를, 나를 생각했다. 우리는 토르가 아니지만, 어쩌면 그것이 인생이 아닌가. 사랑이 떠나고, 믿었던 것들이 부서지고, 가슴이 무너져 내려도. 마음을 열어야 한다. 공허한 것보다 아프더라도 삶을 사는 것이 낫고, 사랑은 열려 있는 마음의 틈새로 또 다시 찾아온다. 번개처럼. 천둥처럼. 이 땅에 사랑이 있는 한, 신은 죽지 않았다.

 

너무 즐거운 영화 대화

CGV 효자 아이맥스 볼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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