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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헤어질 결심 - 박찬욱] 무너지고 깨어짐의 시작. 그리고 끝.

by 헌책방 2022. 7. 5.

[헤어질 결심 - 박찬욱] 무너지고 깨어짐의 시작. 그리고 끝.

시작하기 전에.

작품에 대한 강력한 스포가 들어있습니다.
감상 후 적은 글의 양이 워낙 많아 정리에 시간도 걸렸고,  여기에 영화 유튜버 영민하다 님과의 네시간여의 대화가 더해져 양이 더 방대해졌습니다.
적다보니 완벽하게 구성,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작품의 핵심과 닮았다 싶게도.
미완결인 상태로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는데, 그것은 다른 포스팅에서 계속 됩니다.
~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는 내용의 DM들에 제 나름대로 생각을 전하고 또 받으면서 했던 생각들은 따로 정리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오래걸릴 것이야

 

살다보면 최선을 다해도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열정이 넘치고, 한 번 목표로 삼은 바는 놓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목표의 이루어지지 않음이 다시 도전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도 아직 더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또. 살다보면 놓고 싶지 않은 것을 놓아야할 때도, 헤어질 결심을 먹어야할 때도, 돌아서야할 때도, 더 이상 최선을 다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 작은 슬픔에도 눈물이 많은 편인데, 돌아보면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가장 적게 울었다. 그 날 내 모습은 이별 앞에 초연했다고, 흔한 방식으로 축약할 수 있다. 그 이별은 테크니컬하게는 그에게도 나에게도 잘못은 없었고, 순전히 관계 외부의 문제가 원인이었다. 굳이 그 원인의 책임을 그와 나 중에 하나에 지워야만 한다면, 그것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우리가 줄리엣과 로미오가 된 이유는 줄리엣의 혈족 때문이었다. 독배를 함께 들어주지 않는다고 로미오를 탓할 줄리엣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그의 고백에 어떻게 사랑을 포기할만큼 지칠 수 있냐고 차마 묻지 못했다. 사랑할 때 주변에서 자존심도, 의견도 없는 내 모습을 탓하면 속으로 대답한다. 그깟 자존심 부리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대단하고, 의견이 무시되어도 내 의견은 여전히 가치 있다고. 그저 확고부동하게 높은 나의 가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존감을 흠집 낼 수 없고, 그저 내 의견이 옳음이나 최선에 가깝다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방의 의견을 기각할 수는 없다. 그의 사랑이 그런 처절한 방식이 아니더라도 괜찮았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나는 우리 사랑이 영원할 수 있기 위하여 내가 그를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 그를 보내주고 싶었다. 이 사랑을 위해 더 큰 것을 포기해주지 않는 그에게 서운해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위해 제시했던 의견이 무참히 기각 되어도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별의 순간마저도 내 마음은 사랑이었고, 단단한 헤어질 결심과 그것의 실천을 이루었다고 그 순간을 기억한다.
 


모든 사람은 혼자다. 서로 완벽히 일치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서로 완벽히 다르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은 혼자다. 그래서 사랑의 모습도 그것을 일군 사람마다 다르고 혼자일 수 밖에 없다. 박찬욱 감독은 그의 작품 중 나의 최애작인 <박쥐>와 차애작인 <아가씨>, 그리고 새로운 최애작이 된 <헤어질 결심>을 통해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어쩔 수 없음과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만큼 사랑은, 사랑의 주체들이 앞둔 상황과 그들의 영혼에 따라 그 모습이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의사소통이 여러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면서 진의에 대한 오해가 발생하는 것처럼. 사랑 또한 그럴 수 밖에 없음을, 나아가 인생 또한 진실을 가리는 왜곡과 싸워 진실을 똑바로 바라 보는 순간의 연속임을 이야기한다. 작품의 환경과 배경이 그래서 매우 중요한데, 시야를 가리는 안개라는 환경, 부산-이포-호미산과 바다 순으로 이어지는 공간적 배경, 논어에서 발췌한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知者樂水)라는 모티프, 그리고 소품이자 환경이 되는 애플사의 스마트워치, 스마트폰, 그리고 담배가 그것이다.

 

 

 


안개는 1부에서는 노래로 등장하고, 2, 3부에서는 시각적으로 묘사된다. 안개가 본격적으로 짙게 표현되는 2부에서의 이포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의 무진을 떠올리게 한다.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 속에 묻히다, 안개를 피우다와 같은 안개를 활용한 관용구가 모두 시야를 가리고, 비밀을 미궁 속에 그대로 묻어 놓으며, 상대방에게 진의를 숨기기 위해 교묘한 수단을 사용하는 등 왜곡, 숨김과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안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이자 주요환경이 된다. 안개는 불안한 연인의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사랑의 향방,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를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눈에 안약을 넣어가면서까지 시야를 밝히는 해준과, 해준에게 말씀보다 사진을 보겠다고 말하는 서래의 특성과 그 때문에 그들이 맞게 될 미래의 가늠자가 되고, 서래의 뜻대로 비밀은 영원히 바다에 묻히고 그녀가, 그녀의 사랑이 미제(미결 사건)인 상태로 캐비넷에 갇히지도 않고, 영원히 남아 있게 됨을 암시한다.

 

 


크게 3곳으로 나뉘는 작품의 공간적 배경과 3부라는 작품의 구성이 서래와 해준의 사랑이 교차하는 과정을 맞물리는 것도 작품이 단단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서래는 죽음을 앞두고 해준과의 마지막 대화를 하면서 당신이 사랑을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그때부터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서래는 사건을 해결하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품격 있는 형사인 해준이 자신이 붕괴된 상태라고 이야기하며 중요 증거품인 스마트폰을 바다에 버리라고 말하고 떠나자, 그것이 사랑한다는 고백의 절규임을 깨닫고, 이를 사랑한다는 말로 알아듣는다. 그녀는 그 사랑으로 인해 그가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지 않고 묻어 버릴 만큼 붕괴 되었음을 알고 함께 소리 없이 절규한다. 이 시점이 1부와 2부를 절개한다.

 

 

그러니까 부산에서의 그들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까지가, '당신이 사랑을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에 해당한다. 2부는 부산에서 이포로 공간적 배경이 바뀌며, 서래 입장에서는 2부가 붕괴 된채로 떠나간 연인 해준을 위해,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서 두번째 남편과 재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사랑은 시작 되자마자 헤어질 결심을 먹으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래는 그를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누군가를 죽일만큼 해준을 사랑하게 되어버렸고, 두번째 남편마저 죽은 살인 사건 현장 한 가운데에서 해준을 만나 묻는다. (사랑해서 그랬던 것인데)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속도 모르고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하고 묻는 자존심이 먼저인 그 철없는 모습마저도 사랑해서, 그녀는 붕괴 된 그가 더 이상 붕괴 되지 않고, 이 사랑을 영원으로 봉인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장고 끝에 서래가 해준을 이끌고 지금은 주인이 바뀌었지만 서래의 선조의 땅이었던 호미산에 오르며, 작품은 3부로 접어든다. 거기서 서래는 해준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유골과 딸 서래에게 존엄사를 부탁했던 어머니의 유골을 뿌리게 하고, 해준에게 붕괴 후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며 키스를 나눈다. 그녀가 평생 지고 다녔던 영혼들이 영면에 이르는 것을 보고, 재혼으로도 실패한 헤어질 결심을 죽음으로 맺으리라 다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는 말은 성립할 수 있는가.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기(利己)의 충족을 위해서 하는 행위이지 이타(利他)적인 마음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니까 사랑은 각자가 사랑으로 더 행복해지고자 하는 것이지 고통을 감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위해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포기한다면 그는 꼭 그만큼 혹은 그보다 더 행복해져야 한다. 서래는 그가 자신 때문에 붕괴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뿐더러, 또다시 붕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자신의 사랑을 위해서, 그리하여 자신을 위해서 헤어질 결심을 먹었을 것이다. 짧은 순간도 에로틱한 신체적 접촉을 나누지 않았던 연인에게 맞닿는 것으로 서래의 결심이 지닌 견고함이 드러난다. 

 

논어 모티프는 3부에 걸친 사랑 이야기 사이로 드러난다. 실제 산, 산을 닮은 옥상, 실제 바다, 산인듯도 바다인듯도 해보이는 벽지, 산의 녹색이기도 바다의 푸른색이기도 한 청록색 원피스, 해변에 듬성듬성 놓인 산모양의 바위 등, 산과 바다가 번갈아, 혹은 관객을 헷갈리게 만들며 함께 등장한다. 이로써 인자요산 지자요수 중 후자를 막힘 없이 자처하는 두 사람이 끊임 없이 흔들리고 깨어지고 있음을 표현한다. 또한, 사랑 이외에도 불륜, 존엄사, 살인, 자살, 폭력과 같은 다양한 혼돈이 등장하면서, 사랑으로 인해 지혜로운 사람도 인자한 사람도 혼란에 빠지고 이상해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 산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하고 흔들리는 상황에서 해준의 수사 파트너(1부에서는 수완(고경표 분), 2부에서는 연수(김신영 분))들이 등장하여 그렇다고 해서 사랑 때문에 벌어진 혼란이 괜찮은 것이 될 수 있는지, 이 상황이 진정 사랑 때문에 정당화 가능한 것인지를 계속해서 묻고, 해준과 관객을 귀찮게 하며 구성이 완성된다. 특히 연수는 직접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준에게 던지면서, 사랑으로 인해 혼돈이 미지의 세계에서 질서의 세계로 정리 되어 편입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옳은 일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비극으로 귀결 된다는 것이 마침내 그 질문들의 답이 된다.

 

안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 공간적 배경을 3부에 걸쳐 크게 나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 인자요산 지자요수라는 논어 안에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구절을 모티프로 산과 물의 개념을 끌어들이고, 그것을 미장센으로 표현한 것,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인물들을 삽입한 것만 생각해도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 친절한 편에 속한다. 심지어 극 중반 홍산오와 그가 사랑했던 여자, 그리고 서래와 해준을, 성을 반전시키며 대비하고, 산오와 서래가 머무는 마지막 공간을 산(옥상)과 바다로, 그들의 마지막을 추락으로 매칭하여 극의 향방을 암시하고, 작품의 마지막이 갖는 의미를 두번이나 각인시켜 준다. 홍산오(박정민 분)는 죽도록 감옥에 가기 싫어하지만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 (물론 그녀 입장도 들어보긴 해야한다.) 서래는 의심의 정황을 만들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살인사건을 수사하러 올, 특유의 냄새 때문에 피를 싫어하는 해준을 위해 남편이 죽어 있는 참혹한 현장을 깨끗하게 정리한다. 홍산오와 송서래는 헤어지느니 죽는다는 지독한 사랑의 클리셰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헤어짐의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헤어짐을 이야기 않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미완결에 부치는 것을 택한다. 그들은 사랑이 지속 되지 못하고 붕괴되거나, 이 사랑으로 인하여 상대가 붕괴되는 것을 원치 않고 따라서 상대를 위하여 헤어져주고자 한다. 그리고 죽음이 선택 가능한 '단일한' 방식임을 안다. '마침내' 사랑은 미완결의 상태로 각자가 지독하게 사랑했고, 그래서 붕괴된 사람들의 가슴에 내려 영원히 사는 꽃이 되어 뿌리로 틈을 파고 든다.

 

마지막 환경으로는 소품인 애플사의 스마트폰, 스마트 워치, 그리고 담배가 있다. 첨단의 시대에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강력반 형사답게, 해준은 관찰하는 모든 것들을 스마트 워치로 녹음하여 기록하고, 범행의 중요 단서들을 용의자가 사용했던 스마트폰을 통해서 확인한다. 해준은 서래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호감을 표시하고, 직접적으로 서래에게 좋아한다고 이야기까지 하지만, 이 중요한 물품, 특히 서래가 첫번째 남편 기도수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스마트폰을 바다 깊은 곳에 가져가 버리라고 이야기하면서 서래의 소원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한다. 서래는 까마귀를 죽여 잡아다주는 고양이에게 까마귀 말고 친절한 형사의 심장(마음)을 가져다 달라고 하고, 고양이는 형사를 죽여 무너지고 깨어지게 한 후 서래에게 그 심장을 가져다 주고 만다. 마치 그가 까마귀인 것처럼.

 

담배는 담배를 피우는 자와 피우지 않는 자,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를 금연을 시도하는 자로 등장인물들을 나눠 어떤 사람이 서로 비슷한가를 판단하는 기준자가 되고, 사랑이 진행되는 양상, 사랑의 증명을 표현하기도 한다. 해준의 아내 정안(이정현 분)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 해준에게 금연을 강요할 정도로 담배를 기피한다. 서래의 두번째 남편 호신은 서래에게 담배는 나가서 피우라고 이야기한다. 반면 서래와 해준의 수사 파트너들은 담배를 피운다. 그리고 해준은 한 때 담배를 피웠지만 금연 중이다. 이로써 해준은 정안과의 사랑을 금연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취향 내지는 의사가 억압되는 과정과 연결 지어 느낄 수 밖에 없게 된다. 서래는 스마트 워치에 대고 자신의 연인처럼 자신의 감정을 녹음하여 영원에 남기는 버릇을 갖게 되는데, 호신이 자신에게 나가서 담배를 피우라고 말하자 당신은 요리하면서도 담배를 피우게 해주고 재도 떨어주는데 저새끼는 그렇지 않다고 스마트워치에 녹음하며 담배를 매개로 사랑의 정도를 판단하기도 한다.

 


작품 초반 이포로 운전하던 해준은 졸음운전을 하게 된다. 그는 동료에게 불면증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장면은 집으로 오라는 서래의 말에 해준이 투덜대면서 서래의 집으로 가면서도 졸지도, 느리게 운전하지도 않는 장면과 대비되어 해준과 정안의 사랑이 권태 상태임과 해준과 서래의 사랑은 멈추지 않고 전진할 것임을 표상한다. 반면 해준은 서래와의 사랑은 흡연과 같은 것, 금연에서 벗어나는 것, 그러니까 부담감과 결정의 강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상태에 놓여 상대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랑으로 느끼게 한다. 이 대비는 해준과 서래의 대화는 서로를 마주보고 이야기하고, 시선을 다양한 방법으로, 그러나 꼭 교차하도록, 혹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화제를 입에 올리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반해, 해준과 정안의 대화는 정안이 뒤에서 해준을 끌어안는다던가, 정안이 의자에 앉아 있고 해준이 뒤에서 이야기한다던가 하는 방식으로 교차하거나 같은 것을 바라보기 보다는 엇갈리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또한 담배는 품위, 품격과도 관련이 있다. 해준의 품위는 직업적 자부심에서 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그의 일상에까지 묻어 나오면서 그 자체를 품위 있는 캐릭터로 만든다. 그는 살인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굴고, 질곡동 사건 등 장기 미제에 집착하며, 잠복을 비롯한 수사활동을 위해 주머니가 여럿 달린 옷을 따로 제작해서 입기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서래의 품위는 꼿꼿한 자세, 당당함, 특히 자신이 벌인 일의 당위성, 그것을 프로답게 해냈다는 직업적 확신, 자신감에서 오는 듯하다. 반면 해준의 아내 정안은 원전에서 근무하는 공학박사이자 엘리트지만 사랑마저 이과적으로 접근 분석하고, 따라서 남편에게 일주일에 한 번 꼭 섹스를 해야한다고 이야기하거나 동료의 입을 빌어 정력에 좋다는 자라를 권하는 등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만큼은 다소 천박해 보이기도 한다. 서래의 첫 번째 남편 기도수는 물론이고, 두번째 남편도 각각 공무원, 주식 애널리스트라는 소위 잘나가는 직업과 그 필드에서의 성공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는 특히 그들의 배우자를 대할 때 품격 없고 천박하게 행동한다. 이로써 정안, 기도수, 임호신 모두가 직업적 측면에서는 품위 있는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는 상황이므로 해준과 서래의 품격, 품위의 근원이 직업적 자부심에서 온다는 가정은 타당성을 잃는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품위의 근원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면, 해준과 서래는 서로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이 붕괴 되어도, 자신의 존재의미를 규정하는 일이 깨어지고 부서져도, 스스로를 멈추지 못할 만큼 서로를 지독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른 이들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로써 담배는 붕괴의 끝에 사랑이 있는 자, 붕괴의 시작 앞에서 사랑이 멈추는 자를 가르고, 전자를 품격이 있는 자로, 후자를 품격이 없는 자로 판가름하는 가늠자가 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작중 내 사랑은 가장 대표적으로는 상대방의 흠결을 인정하고, 그것을 채워주는 형태로 묘사된다. 특히 해준이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는데, 정안은 그를 데리고 클리닉에 가서 남의 손에 그를 맡기는 한 편, 서래는 그에게 당신에게 내 잠을 뚝 떼어주고 싶네요. 건전지처럼. 하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호흡을 나눠주며 그가 잠들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해준은 늘 끼니를 아이스크림으로 부실하게 떼우는 서래를 위해 고급초밥을 시켜주고, 또 나름대로 생각하기에 중국식에 가까운 요리를 해주기도 한다. 이 밥을 먹이는 행위가 반복되는 것도 서래가 존재만으로 해준을 재우는 모습이 반복되는 것만큼 인상적이며, 그들이 사랑이 얼마나 항상성 높은 것으로 발전하고 있는지를 탁월한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을 섹스, 정력 증진과 같은 미봉책으로 유지하려고 시도하는 정안의 모습과 대비 된다. 결국 해준과 정안은 이포에서 살림을 함께 하며 주말부부에서 벗어나서도 더 이상 팔베개를 하고 알몸으로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혼자고, 서로 다르며, 이 다름은 서로가 진심으로 서로의 다름을 편견 없이 인식하고 사랑할 때 비로소 다른 채로 괜찮은 것이 된다.

 

1부에서 해준, 정안 부부의 대화 속에 잠깐 등장한 아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들의 존재마저 말끔히 지워진채로, 해변에 홀로 남은 해준은 철저한 붕괴 된다. 작품은 모든 이에게 한 톨의 희망도 남겨두지 않는다. 감독님의 전작 <아가씨>의 결말을 생각하면 <헤어질 결심>의 결말이 처절하고 일말의 희망도 없는 것이 더 두드러진다. 산오와 그의 연인도, 해준과 서래도, 그들의 사랑도, 철저히 붕괴된다. 산과 바다가, 이타(利他)와 이기(利己)가, 사랑과 이별이, 쌓아올림과 붕괴가 헤어질 결심 속에서 몸부림치며 혼돈으로 귀결한다. 연극적인 내용과 구성에, 지극히 연극적인 미장센들이 이 혼돈을 뒷받침한다. 철썩이에게 맞을 때, 누군가를 죽일 때, 서래는 단발머리에 빨간색이다. 심지어 철썩이의 어머니를 죽이러 간 서래는 빨간 장미 꽃다발을 들고 가기도 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헤어질 결심을 먹었을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래서 이 사랑이 계속 되면 좋겠어서 흔들릴 때, 그녀는 파란색이기도 초록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짝이는 단추를 매달고 반짝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픈 사랑도 반짝이고 아름답다. 어떤 사람은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어떤 사람은 슬픔이 잉크처럼 천천히 번진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담배 연기 한 점 없는 청정한 공기 속에서 시들어 가기도, 담배 연기처럼 슬며시 스며들어 중독 되기도 한다. 상대방을 이용하려다가, 수사하려다가, 그렇게 서로의 심연을 바라보다가 물들어 가기도 한다. 사랑은 갑자기 찾아오고, 우연을 빌어 일어났다가, 우연이 의미를 얻어 쌓여 운명이 되기도 하지만, 이별은 적어도 한쪽, 혹은 양 당사자의 헤어질 결심으로 마침내 성립한다. 아니 드디어, 아니 때로는 끝내. 

 

해준이 서래를 찾아 울며 헤매고, 서래는 스마트폰, 즉 사랑을 품고 추락한 바다에서. 두 사람이 그린 아득한 포물선이 한 순간 만났다가 엇갈려버린 공허 속에서. 나는 적게 울었던 사랑의 마지막 순간을 생각했다. 그 사랑과 이별은 나를 철저히 붕괴시켰고, 실낱 같은 희망도 남지 않은 너른 바다에 혼자 남게 했다. 나는 그가 사라져버린 곳을 찾지 못해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해준이기도, 그를 위해 사랑을 품고 바다 속으로 침잠한 서래이기도, 그들을 바라보며 울며 포말을 남기는 파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은 계속 된다.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가 버티지 못해 멀어져가며, 그 붕괴를 선물한 내 인생의 구원자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의 인생에 갑자기 나타나 그를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하고 차분히 헤어짐을 얘기한, 그의 인생을 망치러 간 그의 구원자였다. 무너짐과 깨어짐의 시작이 이 여름 어디쯤이었다. 그 구원 때문에, 청록색으로 흔들리는 원피스 소매 끝에 매달린 반짝이는 작은 단추 때문에, 나는 고개를 흔들고 뭍으로 나왔다. 붕괴의 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미결인 상태로 남은 이 사랑이 영원으로 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 뿐이다. 세찬 바닷 바람에 정신 없이 나부끼는 미제 사건의 겉표지를 문진으로, 단단히 눌러 지키는 일 뿐이다. 헤어질 결심으로.



남은 문장들

한 분이 <헤어질 결심> 리뷰의 글자수를 세어 주셨는데 자그마치 1만 1천자가 조금 넘는 결과가 나왔다.
나도 쓰면서 이건 너무 길다. 싶었고, 그래서 문장을 여럿 덜어내었는데 그 중에 아직 완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몇 문장을 모아봤다.
휘갈겨 자필로 쓰거나 메모장에 쓴 문장들인데, 조악하기도 하고 글 안에서 맞는 자리를 찾지 못해서 헤매다 뒤에 남았다.
그게 애처로워서 버리지 못하고 남은 문장들이라고 따로 모아놨다.

남아 있는 문장들을 모아 기록으로 남긴다는 유익한 착점은 종종 남아 있는 말들을 기록하는

http://www.instagram.com/keem.deam 의 피드에서 착안했다.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오르는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등장 순서대로 적혀 있다. 그래서 서래가 꽤 아랫줄에서 등장한다.
여기에서 착안해 나의 부족하지만 애처로운 남은 문장들도 짧은 문장부터 긴 문장까지 문장 길이에 따라 배열해보았다.


달려가.

내 마음도 모르고.

설화 같은 이야기에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써머, 서래, 해준이었다.

사랑은 오감으로 하는 것이다. 향기, 숨결, 시선, 소리, 손끝으로 한다.

처음부터 운명적인 사랑은 없다. 그러나 만들어진 운명이라 하여 운명이 아닌 것은 아니다.

너는 침잠했고, 나는 배회하면서 울었다. 나는 추락했고, 너는 어둠 속에서 안개 속을 디뎠다.

서래의 선택은 이기적이나, 사랑 외에 해준에게 남을 미제 사건들을 없애버렸다는 점에서 이타적이기도 하다.

해준은 서래의 옷에 대해서, 서래는 해준의 옷과 구두, 머리스타일과 수염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서로에게 핸드폰을 바다에게 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사랑한다는 들리지 않을 외침을 안개 속에 부르짖는 것과 같다.

서래의 죽음은 영원히 그들의 사랑을 지키려는 시도이자 동시에 자신을 없애서 또다시 붕괴하고 품격을 잃으려는 해준을 지키려는 시도였다.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일어나 빠져 나올 수 있는 얕은 구덩이에 앉아 서래는 밀물을 맞는다. 그토록 그녀의 결심은 단단하다. 그것이 파도를 울부짖게 한다.

박정민님이 연기한 배역의 이름이 홍산호인가요? 산오인가요? 산호면 좋겠어요. 이름이라도 옥상에서 떨어진 바닥이 아니라 바다랑 어울릴 수 있게. 산호초처럼.

서래는 138층을 오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뒤를 따라 오르던 해준의 마음은 138층만큼 두터워졌을까. 이대로 죽어도 좋다. 했던 기도수는 기름봉 꼭대기에서 미끄러지며 자신이 남긴 말을 후회했을까.

웃음 포인트도 꽤 많다. 나의 경우에는 논리적으로는 서래보다 한국말을 더 잘 구사해야하는 번역기 tts의 목소리가, 서래가 구사하는 서툴지만 뉘앙스와 온기를 품은 한국말보다 더 서툴게 들려 웃음이 났다.

나는 늘 피곤해하는 너에게 내 남는 에너지를 뚝 떼어주고 싶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말하는 너에게 내 사랑을 뚝 떼어주고 싶었다. 건전지처럼. 그러나 그럴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사랑이었다.

관심, 의심, 그리고 결심으로 이어진다는 예고편상 짧은 요약은 1부에서 3부로 이어지는 구성과도 조응한다. 그리고 이는 또한 우연한 기회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고 서로의 마음을 믿지 못해 멀어지다가 결국 헤어짐을 마음 먹기까지의, 사랑의 기승전결과도 닮아 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과 안개 속에서도 해준은 앞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 노력한다. 계속 인공눈물을 넣어도 각막에 한겹 올라와 있는 듯한, 뿌연 시선으로 맺히는 선입견과, 평균적, 보통이라는 이름의 시선(정안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결코 걷어낼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똑바로 앞을 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박찬욱 감독님의 제작사 이름이 모호필름이라는 것이 의미 심장하다. 모호하다. 서래와 해준 사이에 놓인 두터운 안개만큼.
안개를 비롯하여, 산과 바다, 청록색 모두가 애매모호하다.
닉값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두명이다. 한명은 서래고, 다른 한명은 산오다. 사실상 산오는 서래의 운명을 점지하는 지표기 때문에, 축약하자면 주인공은 서래다. 서래는 해준보다 여러모로 우위에 있다. 언어적으로 서래가 해준보다 우위에 있음은 여러가지를 표상한다. 서래는 사랑하기 때문에 안개 속에서도 연인을 똑바로 볼 수 있고, 그래서 더 품위 있으며, 온 수단을 다해 사랑하고, 죽음 앞에서도 옥처럼 단단히 빛난다.

포스터가 작품을 정확히 표현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슬쩍 겹쳐진 손가락 그러나 어쩐지 아스라히 먼 거리감, 그 골짜기 사이에 놓여 부감을 강조하는 해준 약지에 끼워진 결혼 반지-이는 서래의 집에서 두사람이 가까이에 앉아 이야기하는데도 생활감 없이 이상하게 깊은 부엌이 그들 사이에 놓인 의심이라는 깊은 골을 시각적으로 묘사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잠든 해준과 잠을 떼어줘 잠들지 못한 서래,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우는 햇살, 아니 안개.

서래는 점점 지쳐간다. 인공 눈물로 망막을 씻으며 시체를 똑바로 쳐다보려고 노력하는 해준이 정작 자신은 똑바로 쳐다봐주지 않아서. 믿음직한 남자를 데려왔어. 하는 말에 그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각오로 건넨 키스 끝에 묻은 울음의 향을 해준이 맡아주지 않아서. 붕괴하는 해준 옆에서 소리 없이 함께 무너지고 깨어진 자신을 달려가 안겨도 안아주지 않아서. 해준이 사랑해서 그렇게까지 한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아서. 그래, 그렇게 나도 지쳤었다. 그가 사랑하는 나를 똑바로 바라봐주지 않아서. 믿음직한 남자를 데려왔어. 하는 말에 그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아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각오로 건넨 말들에 묻은 슬픔의 향을 그가 맡아주지 않아서. 무너져내리는 그 옆에서 소리 없이 함께 무너지고 깨어진 나를 그가 안아주지 않아서. 헤어질 결심이 판 구덩이 안에서 숨죽인 나와, 해변에서 햇살을 맞으며 환히 웃는 그가 야속해도, 내 사랑은 계속 되고 있어서. 그가 사랑해서 그렇게까지 한 나를 돌아봐주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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