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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파이트 클럽 - 데이비드 핀처] 송사리 튀김

by 헌책방 2022. 8. 5.

[파이트 클럽 - 데이비드 핀처] 송사리 튀김

여기 뭐 해장국 맛집이야? 아니 일단 가봐야 돼. 가봐야 알아. 껍데기 맛집이야. 뭔 소리여 이게.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신촌에서 보기로 했더니 둘 다 삶에 찌들었는지, 만나서 갈만한 식당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신촌 인근의 유일한 술집이자, 익히 아는 맛을 새롭게 내서 사랑에 마지않는 대전 해장국 링크를 보냈다. 운 좋게도 후덥지근함을 뚫고 낮술을 즐기러 온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K와 연애 초기에 여기서 M오빠랑 진탕 술 마시고, 목포까지 KTX 타고 밤을 뚫고 달렸었다. 이 귀찮은 거 싫어하고 끝까지 술 먹기 좋아하는 내가. 참, 여기 K랑 같이 온 적도 있었는데, 걔도 너처럼, 해장국 맛집이야? 아재는 국밥을 사랑하지. 그랬었다. 추억들 샘솟을 만큼 자주 찾은, 정말 좋아하는 식당이라는 뜻이었는데, 그가 지겨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응. 껍데기 맛있다. 조용히 하고 먹기나 해라. 한다. 똑같은 껍데기인데 유독 다른 집과는 다른 껍데기. 이런 음식을 앞에 두면 어렸을 때 외가 식구들이랑 갔던 여름휴가가 생각난다. 외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유명한 약수터가 있었고, 거기서 3분만 더 차를 타고 가면 일제 강점기에 뚫었다는 작은 터널이 있었다. 차량 통행을 금지한 터널이라 아이들은 차에서 내려 터널을 걸어서 통과했다. 짐과 어른들을 실은 차는 산을 한 바퀴 뺑 돌아 접선 지점으로 향했다. 터널을 지나 길을 따라 또 5분쯤 걸어 나가면 밖에 널따란 초지가 있고, 초지 끝에 자갈밭이, 자갈밭 끝에 얄따랗게 눈부신 모래밭이, 모래밭 끝에는 강이 놓여 있었다. 역시 일제가 다리를 세우려다가 실패해서 거대한 기둥이 서너 개, 강의 심장부에 꽂혀있었다. 어른들과 아이들은 초지에서 만나 작은 다리가 빚은 그늘 아래로 걸었다. 짐이 많아서 쬐그만 아이들도 짐을 들었다. 그늘 아래에 텐트를 치고 돗자리를 폈다. 지금은 그 일대를 캠핑장으로 단장해버려서 옛날 모습은 흔적도 찾을 수 없어서 아쉽다. 그렇게 도착한 다리 밑은 꼭 다른 세상 같았다. 다리 아래쪽은 유속이 느리고, 수심도 얕아서, 어른들은 맘 놓고 휴식을 취하고, 아이들은 튜브를 단단히 끼고 물로 뛰어들었다. 산골짜기에 놓인 시골의 강은 여름에도 피부가 차서, 금방 땀이 식고 보라색으로 물든 입술 속으로 이들이 따그닥댔다. 엄마가 입술이 보라색이니까 잠깐이라도 물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 질러도 물을 뿌려대며 웃기만 했다. 내 인생 최고의 튀김을 그 여름휴가에서 맛보았다. 이모부가 참방 대면서 물고기들을 잔뜩 몰아주면 우리 자매와 친척동생들이 통이랑 그물로 고기들을 잡아다 할머니께 드렸는데, 할머니는 거기서 송사리만 골라내서 튀겨주셨다. 세상에. 지금 생각해보면 먹잘 것 없는, 그 작은 민물고기를 튀겨먹었다.
 

20년도 더 된 이야기고, 그 아름다웠던 휴가 이후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그리고 다른 국가들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음식을 맛봤지만, 튀긴 음식 중에는 그 송사리 튀김을 당해낼 맛이 없었다. 꽉 끼어서 오동통한 뱃살이 덩그라한 수영복을 입고, 보라색 입술로, 강가에 쭈그려 앉아 덜덜 떨고 있으면, 아빠가 나를 그대로 들어 올려 햇빛이 드는 모래톱에 방석처럼 튜브를 깔고 그 위에 앉혀주셨다. 동생들도 차례로 모래톱에 꽂혔다. 그럼 할머니가 와서 작은 소쿠리를 내밀었다. 소쿠리 가득 노란 튀김들이 있었다. 여름 볕이 비추는 얇고 투명한 튀김옷 사이로 우리가 잡은 송사리가 보였다. 엄마, 초장 좀. 그러면 엄마가 초장을 갖다 주셨고, 우리는 초장에 튀김을 찍어 먹었다. 얕은 노동의 대가는 달고, 인중에 맺혀 입으로 흘러드는 땀은 짜고, 튀김은 바삭하고, 송사리는 고소했다. 어느새 입술에 붉은빛 번들번들한 혈색이 돌았다. 맛있다. 쪼끄만 아이들이 모래톱에 꽂혀 송사리 튀김을 먹으며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모습을 이모들이 사진으로 남겼다. 내가 기억하는 미식의 첫 기억이다. 외할머니는 이 기억 이전에도, 이후에도, 외가에 놀러 온 손주들에게 빙어 튀김, 더덕 튀김, 두릅 튀김 같은 귀한 튀김 퍼레이드를 선보였지만, 송사리 튀김에 비견할 수 없었다. 유치원에서 간식 시간에, 급식 시간에-당시 내가 다녔던 병설 유치원은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유치원 생들도 함께 식사했다. 때문에 입맛이 상당히 일찍 성숙했다.-, 튀김을 자주 먹었기 때문에 익히 아는 맛이었다. 그러나. 물론 환경, 기분, 분위기 탓도 컸겠지만, 분명 그 송사리 튀김은 어딘가가 달랐다. 물론 어린 나는 튀김 중에도 송사리 튀김을 먹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고, 새롭다 쯤으로 단순하게 정리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미식적 충격 이후로 익히 아는 맛, 흔한 레시피, 겉보기에 특별할 것 없는 음식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야말로 미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대전 해장국에서 껍데기와 소맥을 마시며 이 새로움이야말로 미식이라고 생각하는 나이가 됐다.
 

 

 

 


작은 송사리는 마음 속에서 가녀린 몸짓으로 점점 더 큰 파동을 새겼다. 송사리 튀김을 좋아하던 통통한 아이가 그때처럼 여전히 영화와 책을 사랑한다. 반복해서 봐서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 볼 때마다, 자신이 변해 있는 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 좋다. 특별할 것 없는 흔한 내용을 담고 있는 데도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순간이 좋다. 튜브 위에 앉아 베어 물었던 달큰한 송사리 튀김을 잊지 못하는 탓이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은 볼 때마다 새롭고, 기시감이 드는 장면도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송사리 튀김 같은 작품이다. 어렸을 때는, 그러니까 내가 이 작품을 처음으로 봤던 20살 언저리쯤에는 작품을 계층 문제를 다루는 블랙 코미디이자 인간의 파괴적 본능에 대한 탐구 물이라고 생각했다.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주인공(에드워드 노튼 분)은 사고가 난 차량이 있으면, 차량을 리콜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사고차량과 현장을 검증하고 조사하는 업무를 맡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그는 어느 날 출장 중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 분)과 인연을 맺게 된다. 바로 그날, 그는 모종의 사건 때문에 오갈 곳이 없어진 채로 타일러에게 전화하고, 펍에서 만나 맥주를 마신다. 맥주를 먹고 나와서 타일러는 주인공에게 자신을 때려달라고 하고, 이는 주먹다짐에 이른다. 이 폭력적 행위에서 해방감을 느낀 주인공은 타일러와 자주 맞붙게 되고, 관객들도 하나 둘 다음 차례로 싸움의 주인공을 자처한다. 그들은 결국 단골 술집 지하에 파이트 클럽을 꾸린다. 버스를 탄 주인공과 타일러는 구찌 홍보물에 등장하는 속옷만 걸친 남녀의 탄탄한 몸매를 보고 자기 계발(啓發)은 자위행위에 불과하다는 대화를 나눈다. 지하에 모인 파이트클럽 멤버들은 자기 계발이 아니라 자기 파괴 행위를 통해,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모델들의 몸매 못지않게 점점 탄탄해진다. 이 대비는 럭셔리 문화의 표상인 구찌와 차상위 소비 문화인 싸움의 직접적 비교를 통해 계층 간 향유하는 문화와 생활수준의 격차를 표현할 뿐 아니라, 동시에 파괴적 본능을 타고난 인간이 자기를 개발(開發)하며 타인을 파괴하는 것과 자기 파괴 중 그 어떤 방향으로 본능을 표출한다고 해도, 결코 파괴 자체는 부정적인 현실의 타개책으로 전혀 기능할 수 없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작품을 두어번 더 보고 난 20대 중반 때쯤에는 20대 초반의 감상에 더해 현대인이 겪는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소통의 부족, 그로 인해 개인이 겪는 고독감, 만물의 상품화와 물질 만능주의, 그에 따른 몰개성, 바빠질수록 더 빈곤해지는 현대 문명의 아이러니에 주목했다.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은 손톱을 다듬고, 귓속을 정리하고, 종종 트리트먼트로 머리칼에 영양을 공급하는, 간단한 자신을 돌보는 행위 들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주인공의 직업 특수성상 잦은 출장을 묘사하며, 여행을 할 때나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쓰는 일회용 제품들이 점점 더 바빠지는 일상에도 침투하면서 현대인이 자신을 돌보는 시간을 빼앗기고 있음을 지적한다. 아니, 우리 삶이 점점 여행처럼, 출장처럼 되어가고 있음을 돌아본다. 영화는 효율성이 최고고, 시간 낭비는 죄라고 말하는 얼굴을 비스듬히 조명한다. 주인공은 서류들을 복사하면서 생각한다. 아무리 선명하게 인쇄된 글자도 복사를 반복하면 흐려진다고. 가치와 신념 또한 마찬가지다. 획일화된 가치를 강요하고 종용받는 사회에서 인간의 고유한 라벨도 확대 재생산되면서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최근에는 본 작을 다시 보면서, 그간의 감상이 강렬히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그간 봐오지 못했던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파이트 클럽>은 또한, 러브스토리다. 영화는,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문자답한다. 주인공은 불면의 삶을 살고 있다. 판에 박힌 듯한 일상 속에서 닳아질대로 닳아져, 더 이상 깨어있지 못한다. 어느 날, 그가 의사에게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하자 의사는 수요 고환암 환자의 모임이야 말로, 희망이 없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모임을 찾았다가 희망이 전혀 없는 삶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느끼고, 희망을 포기하면서 자유를 느낀다. 잠도 푹 잔다. 때로는 무형의 감정도 물성을 필요로 한다. 실존의 감각이 시가로 그려지는 숨의 흔적을 필요로 하듯이. 그는 모임을 통해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를 받고, 거짓말까지 해가며 얻은 위로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모임에서 확인한 구체적인 희망을, 매일, 폐기한다. 그리고 그처럼 위로를 필요로 하는, 가짜 환자 말라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등장은 거짓말하면서 각종 **치료 모임에 참석하는 주인공의 양심을 자극한다. 한편 타일러와 주인공은 파이트 클럽의 공동 운영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타일러의 낡아빠진 집에서 함께 산다. 그러나 바로 그 집에서 우연한 기회에 타일러와 말라가 통화를 계기로 성관계를 하게 되고, 주인공이 괴로워할 만큼 타일러와 말라는 자주 섹스를 한다. 왜 말라를 좋아하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타일러는 말라의 타락엔 위선(僞善)이 없고, 주인공은 타락한 척할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셋의 기묘한 동거 끝에, 주인공은 말라에게 더 이상 집에 찾아오지 말라고 통보한다. 말라도 거칠게 욕을 하고 떠나버리지만, 그는 이미 같은 종족이었던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아득한 표정을 짓는다. 타일러는 그들을 어린애들이라고 욕한다. 인연은 질기다. 주인공과 말라의 연은 거기서 끊기지 않고, 그는 파이트 클럽이 벌이는 위험한 일들로부터 말라를 떼어놓기 위해 말라에게 돈을 주고 떠날 것을 요구한다. 말라는 버스에 올라타 주인공을 돌아보며 넌 내게 악몽이었어. 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벌어질 것은 벌어지고 만다. 파이트클럽은 타일러의 뜻대로 신용회사를 무너트리고 모든 것을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게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파괴 작전을 펼치고,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맞닥뜨리자 대대적인 붕괴 앞에서 연인은 손을 꼭 맞잡는다. 주인공이 최악의 실수와 합리화 불가능한 폭력과 그로 인한 붕괴 속에서 책임 앞에 서자, 그녀의 연인이 손을 붙잡고 그의 곁을 지킨다. 요컨대, 본 작은 사랑은 양심이자, 지표자, 삶의 이유이고, 연관된 모든 이들을 무력화시킬 만큼 강력하며, 진솔된 소통에서 태어나고, 그로 인해 자란다고 이야기한다. 본 작이 말하는 사랑은 때로는 악몽 같이 끔찍하다가도 문제를 극복하는 모든 과정의 중요 요소가 되며, 끝끝내 최악의 선택이 현현하는 붕괴의 순간에도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타고 태어난 파괴적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단일하고 가장 유효한 방법이 바로 사랑이다.

 

물론, 본 작은 데이비드 핀처 특유의 넓고 깊은 스펙트럼과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여러번 봐도 새롭게 발견되거나 하도 많아서 이전에 발견했어도 새롭게 발견한 것 같은 착각을 선사하는 세심한 디테일들 때문에, 말라라는 캐릭터 자체와 말라가 표상하는 사랑 그리고 사랑의 힘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여전히 눈에 띈다. 특히 인간의 폭력적 본성, 악의 평범성에 주목할만하다. 주인공은 재앙을 앞두고 난 눈을 떴어(My eyes are open)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작품 내내 깨어있으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눈을 감고 잠들려고 했으나 그 또한 실행하지 못했다. 그가 편히 잠드는 순간은 예의 희망을 포기하는 순간뿐이다. 게다가 그의 어두운 본성을 표상하는 타일러와 만난 이후로는 눈을 떠도 감은 것과 마찬가지인 시간이 연속된다. 주인공과 타일러, 그리고 화면에 비치는 파이트 클럽의 멤버들 모두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주인공과 타일러는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나 평범한 펍에서 맥주를 나눠 마시며 관계를 맺는 과정도 꽤 평범하다. 처음에는 해방감을 위해 놀이처럼 주먹을 휘두르고, 그 규모도 둘 뿐이지만, 규모는 점점 아주 조금씩 늘어나고 천천히 사방에 배어나간다. 나중에는 파이트 클럽과 타 지역에 있는 지부들까지 타일러의 통제 없이도 차근차근 미션을 수행하고, 규모를 늘리고, 통제력과 결집력을 단단하게 높여 간다. 이런 지점들이 폭력은 사소한 계기로 촉발되어 사방으로 천천히 확산되며, 작은 규모로라도 한 번이라도 조직적으로 기능하면 점점 스스로 몸집을 불리고 주변을 잠식해 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이 거대한 폭력의 잠식을 목격하고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 보다는 희망을 선택한다. 그는 손에 돈을 쥐어주고 버스에 태워 보내며 애써 헤어짐을 말했던 말라가 잡혀 오는 것을 보고, 스스로 결국 진짜 눈을 뜨는 것은 폭력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휘두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에 맞서 싸우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악의 평범성 끝에도 사랑이 매달리는 셈이다.

 

주인공이 폭력적 자아에 저항하고, 결국 자신의 본모습이 무엇인지 자각하고 그에 합일하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인간은 다양한 자아를 타고 나고 그 자아들은 계속 변모한다. 그리하여 인생은 어떤 자아가 주된 자아가 될 것인가를 결정 혹은 확인하고 그것과 합일하는 과정이다. 많은 이들의 해방구가 되었던 파이트클럽도 종국에는 같은 흉터, 같은 스타일, 같은 말을 하는, 개성 없고 게다가 폭력 지향적인 사람들의 모임으로 전락한다. 그들이 도망쳐 떠나온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곳이 된다. 파이트클럽 초창기에는 주인공과 타일러가 유명인 중에 누구와 싸우고 싶냐는 대화를 나누며 각각 헤밍웨이와 스타트렉의 윌리엄 셰트너를 꼽았다가, 나중에는 각각 간디와 링컨을 꼽는다. 그들은 기성세대와 기득권에 저항을 꿈꾸며 폭력을 선택하지만, 결국 폭력에 잠식되어 추구했던 가치가 변질되는 결과를 맞는다. 주인공은 여러 번 복사한 서류처럼 자신의 인장이 점점 희미해지는 현실에서 도망쳤다가, 도망친 곳에서도 자신들이 희미해지고 있음을 자각한다. 추락이나 충돌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추락과 충돌이 끝났다고 해서, 삶이 덩달아 끝나지는 않는다. 삶에는 내가 누구인가,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한 대답으로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다. 타일러는 비행기에서 주인공에게 관심만 가지면 무엇이든 폭탄의 재료가 된다며, 네이팜탄은 오렌지와 휘발유로 만들어졌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인생은 그 폭탄의 재료를 탐구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재료들이 폭탄으로 쓰이지 않고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그 또한 타일러가 진정한 삶이라고 주장한 고통이며, 주인공에게 누구나 매일 상상 속에서 변화를 꿈꾸지만 실천하진 못해. 넌 조금씩 변해 가고 있어. 라고 언급한 변화다. 결국 주인공은 사랑과 배움과 투쟁 속에서, 자신은 어떤 폭탄을 만들어 어디에 쓸 것인지, 방아쇠를 어디에 당길 것인지, 어떻게 변모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그리고 엉망진창인 채로, 선택한 자아로 남는다. 

 

본 작은 데이비드 핀처가 비교적 근래에 발표한 작품 <나를 찾아줘>, <소셜 네트워크>와 같은 유려함은 부족하다. 그러나 스타일리스트의 면모를 과시하면서도, 암시적으로나마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감독의 역작으로 꼽을만한 작품이다. 개봉 당시 대중과 평단에서 전체적으로 애매모호하다는 이유로 외면 받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명작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송사리 튀김'스럽다. 배우들의 호연도 작품이 끊임없이 회자되며 새롭게 읽히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헬레나 본햄 카터는 사랑 그 자체로 역할하며, Oh my god, your face! 와 같은 대사로 연인의 턱이 반쯤 날아간 심각한 상황에도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존재함을 역설한다. 브래드피트는 대중을 압도하는 매력으로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아직 폭력적임을 주장하고, 나름의 대응책으로 폭력을 내세우고 정당화한다. 우리는 필요도 없는 비싼 차와 옷을 사겠다고 개처럼 일하고 있다. 우리는 목적을 상실한 역사의 고아다. 경제 공황에 시달리지 않지만 정신적 공황에 고통받고 있다. 는 취지의 연설은 결코 거짓은 아니다. 에드워드 노튼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면모로 폭력의 불편한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착각 내지는 환각이 아닌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한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공감받고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현실에 순응하는 비폭력적인 삶이 적절한 대응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도, 파이트클럽이 제시한 유토피아도, 이상적이라고 부르기 힘들만한 상황에서 관객은 길을 잃는다. 멋있다고 브래드피트 편을 들 수도 없고, 공감 간다고 에드워드 노튼 편을 들 수도 없다. 그러나 인생에 정답은 없다. 절대적으로 옳은 길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답 없는 질문 속을 걸을 수밖에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인공처럼. 입 안에 총알을 박는 고통으로 투쟁하는 일뿐이다. 

 

타일러는 밤에 영사실에서 일한다. 가족용 애니메이션 사이에 섬광처럼 지나가도록 포르노 필름 한조각을 꿰매는 것이 그의 취미다. 주인공의 설명처럼, 관객도 모르게 필름은 교체되고 영화는 계속된다. 우리는 영사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언뜻 지나가는 그 폭력적인 장면이 망막에서 잊히기만을 기다리는 관객이 될 것인가. 우리 삶이 영화라면, 찰나라 할지라도 누군가 장난처럼 꿰매 넣은 장면이 아무렇지 않게 영사되도록 내버려 둘 텐가. 송사리 튀김을 먹었던 그날은 사실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한 살 아래 사촌 남동생이 내 튜브를 밀어서 강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영겁 같은 시간 후에 물 위로 떠오르면서 H의 만행을 울음으로 고발할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러나 눈물을 꾹 참고 튜브를 다시 허리에 꽉 매고 뒤뚱뒤뚱 걸어 송사리를 찾으러 갔다. 그날 밤 외가댁 마당에 있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여름 달 아래 밖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그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엄마는 주춤주춤 옷을 여미며 나오는 나를 꼭 안아줬다. 때리고 싶지는 않았어? 외삼촌한테 이르지. 혼내줬을 텐데. 나는 고개만 저었다. 일렀다면 경찰이었던 엄한 외삼촌은 또 H를 흠씬 두들겨 팼을 것이었다. 그 대신 나는 엄마한테 다시는 H가 누구를 괴롭히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마는 마루로 H를 불렀다. 가족이 타고 있는 튜브를 뒤집으면 가족이 아파. 친구가 타고 있는 튜브를 뒤집으면 친구가 아파. 크게 다칠 수도 있어. H가 오래오래 마음이 힘들 거야. H는 서럽게 울며 제 손을 잡고 있는 고모의 팔뚝에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떠올릴 때마다 새로운 장면이다. 외할매가 사랑으로 튀긴 송사리 튀김처럼. (물론 그 후에도 H는 나를 괴롭혔지만 이내 곧 사과했다. 사과하지 않았던 어떤 딱 한순간에 공교롭게도 외삼촌이 그 장면을 보고 H의 따귀를 올렸고, 그 후로 나와 H는 완전히 멀어져 버렸다. 그 순간에도 나는 어린 H를 이르지 않았던 송사리 휴가를 떠올렸다.)  돼지껍데기를 먹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송사리 튀김과 <파이트 클럽>을 생각했다. 우리 삶은 희망과 자유, 폭력과 비폭력, 거짓말과 양심, 위선과 솔직함, 타락과 구원, 파괴와 개발, 위로와 악몽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포옹과 사랑으로 바뀔 수 있다. 참 다행이다. 돼지껍데기와 소맥 뒷맛이 송사리 튀김처럼 고소했다.

 

* 본 작을 넷플릭스에서 관람하였기 때문에 관련 이미지가 없습니다 :) 대신 본문에 등장하는 대전해장국! ㅋ_ㅋ

 

 

* 그리고 고유의 인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서 그런 존재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에 마지 않는 상수의 ㅎㅅ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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