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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Whatever, Wherever, Whenever

by 헌책방 2023. 4. 21.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 다니엘스(다니엘 콴, 다니엘 쉐이너트)]

Whatever, Wherever, Whenever 

 


하나만. 하나만 줘. 기다란 손톱 밑에 까만 반달처럼 낀 때, 거친 손바닥 위에서 동글동글 까맣게 일어난 굳은살. 턱 밑에 불쑥 나타난 손바닥 앞에서 나는 욕지기를 참고 있었다. 하나만 줘. 붕어빵을 내줄 수는 없었다. 양갈래 머리를 흔들자 거지 아저씨 손바닥에 머리카락 끝이 부딪혔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볼 일을 보고 나온 엄마는 은행 정문을 떡하니 막고 대치 중인 딸과 아저씨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드려. 붕어빵 더 사줄게. 기름을 먹어 얇아진 하얀 봉투를 부시럭 부시럭 구기며 붕어빵 한 개를 꺼내자, 나래야. 다 드리자. 엄마가 사줄게.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저씨의 손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얼른 그 위에 봉지를 올리고, 저 하나만 먹어도 돼요? 했다. 아저씨는 그래, 고맙다. 미안해. 하고, 봉지를 쥔 채 돌아섰다. 

 

집에 돌아와 나는 작게 엎드려 대성통곡했다. 왜 아저씨한테 우리 붕어빵 다 줬어. 엄마는 축축한 양볼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며 말했다. 아저씨는 붕어빵 사드실 돈이 없는 거지, 굶어 죽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날도 춥잖아. 엄마, 그 사람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잖아. 동정은 나쁜 거잖아. 엉엉. 존엄성은 타인의 배려를 있는 그대로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태도, 그런데에서 생기는 거야. 나는 엄마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자 더 크게 울었다. 아저씨는 너에게 감사해하고, 미안해하셨잖아. 슬퍼하거나 자존심 상해하시지 않았어. 아저씨는 존엄을 지키신 거야. 나래 눈에는 거지 아저씨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버지고 아들이야.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인데 우리가 함부로 대해서 되겠니. 그때부터는 십여분 정도, 갑자기 눈물을 그치기 뭐해서 거짓으로 잉잉 댔던 것 같다. 엄마는 탁자 위에 붕어빵 봉지 입을 크게 벌려 올려두셨고, 엉금엉금 기어가 우는 척 옹그려서 붕어빵을 먹었다. 아, 그 붕어빵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붕어빵이었다. 

 

아직도 엄마와 내가 붕어빵만 보면 이구동성으로 "하나만!" 하면서 추억하는 그 겨울날 이후로, 세상에 어떤 존재도 한 가지 의미만 가질 수 없고, 내가 보는 일면만으로 그 존재의 의미를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같은 텍스트도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셈이다. 쉬는 시간 10분이 누군가에게는 짧고, 누군가에게는 시험의 당락을 결정할 만큼 길고. 어떤 장소는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곳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약속한 곳이다. 어떤 일상은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 하찮은 시간의 집합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이루는 소중한 기억들이 깃드는 앨범의 낱장이다. M, N과 함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나와 택시를 기다리는데, M이 아직도 훌쩍이는 내게 이야기했다. 이렇게 펑펑 울면서 재미있게 본 사람한테 할 말인가 싶긴 한데. 나는 정말 모르겠다. 이 영화 보는 눈이라고는 눈곱만치도, 까지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 감독들이 그 부분은 애초에 감수했을 것 같아. 애초에 작품이 어떤 사실에 대하여, 그러니까 무한한 힘과 방대한 지식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사람마다 다르게 생각하고 반응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작품 자체에 대해서도 저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 작품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하고, 이 매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작법을 쓰고 있으니까. M이 음, 또 그럴 수도 있겠네. 아무튼 내가 허용할 수 있는 B급 감성의 끝은 <킹스맨 1>이었던 것 같아. 하자, N이 택시 잡혔어요. 얼른 가서 술이나 마셔요. 했다. 

 

요컨대 본 작은 어떤 사실에 대하여 인간은 저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만한 전개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이 '결과적 다름'은 우리가 모두 서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라는 데에서 기인하며, 따라서 이 다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논리적 결투에 의하여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감정적으로 기우는 방향에 따라 직관적으로 다른 한쪽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다정함에서 찾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본작의 좋은 점을 꼽으라면, 모든 것을, 모든 부분을, 동시에 꼽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이 다정함이 단단하고 따뜻하게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은 서로 다른 많은 마음들로 가득하고 그리하여 복잡하고, 먹고사는 일은 지독히 질기게 일상을 파고들며, 그래서 우리에게는 서로의 다름을 껴안아 줄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적 각박함은 심지어 자신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아도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인생은 여전히, 내적으로는 자신의 수많은 자아를 인식하고 자신의 본질적 자아를 만나 화해하는 과정이고, 외적으로는 느슨한 연대를 결성하여 자신이 소속한 세계의 나아감을 도모하는 시간이다. 인간은 일생동안 타인과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다. 이 운명이 운명으로 결국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은 에블린과 웨이먼드 같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정함이다. 본 작은 고독하고 고단하게 살림을 꾸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의미와 꿈을 잃어가고,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에게 각박해져 가던 에블린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다정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점차 변화해 가는 과정을 통해 심오한 인간 실존의 과정을 은유한다. 그리고 이 따뜻한 메시지가 작품의 작법, 감독의 화법, 작품의 구조, 작품이 선택한 장치들과 상응한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본 작은 멀티 유니버스는 비단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계관이 아님을 다양한 방식으로 암시한다. 점프 버스로 본 작의 주요 시간대로 소환되는 에블린들, 조이들, 그리고 웨이먼드들은 선택의 순간 시간대가 분기되면서 비로소 존재하게 된 다른 유니버스의 존재들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 안에서 욕망, 후회, 안타까움, 실망, 환희, 기쁜, 성취감 등의 감정의 형태로 현존하는 다양한 자아상이다. 본 작은 점프버스를 그리는 과정에서 출연 배우들의 필모그래피 혹은 <화양연화>, 이소룡, 성룡, 이연걸의 작품들, <라따뚜이> 등 다양한 작품들을 오마주 내지 패러디하는 방법을 채택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멀티버스를 체험하게 한다. 이로써 멀티유니버스라는 작품의 내적 배경이 갖는 환상성이 상쇄된다. 물론 세무서에서의 격투씬의 경우, 본작의 세계관, 중심 메시지와 분리하여 보더라도, 이소룡, 성룡, 이연걸을 오마주 하는 액션 구성과 키 호이 콴(웨이먼드 역)의 고난도 스턴트가 결합하여 인상 깊은 액션으로 남는다. 동시에 점프버스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조부 투파키(조이)가 숏폼 앱 위에서 엄지 손가락으로 화면을 스와이프 하듯이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으로 우주를 넘나 든다는 설정은, 현대인이 알고리즘을 통해 확인하는 자신의 취향이 다양한 자아상의 표피 혹은 일부임을 암시한다. 기본적으로 알고리즘은 화면에 내가 이미 아는 자신의 취향을 표기하지만, 늘 그렇지만은 않다. 바꿔 말하면 알고리즘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는 취향을 추천할 때도 있고, 이 주변적 취향을 현재 자신이 자각하고 있고 주된 스탠스를 결정하는 데에 관여하는 주된 자아가 아니라, 주변적 자아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정신없이 화면이 흘러가는 와중에도 셀프 빨래방의 풍경, 세탁소에 찾아온 여성 손님이 차고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 까딱거리는 조부 투파키의 고갯짓 같은 설정들이 뚜렷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런 작은 현실감이 작품 내 멀티유니버스와 점프버스가 손바닥만 한 핸드폰만으로도 가닿을 수 있는 수많은 세계와 순간적으로 일상에 침투하는 그 수많은 다른 세계 때문에 발견하는 자신의 다양한 자아를 모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에블린이 다른 우주에 남거나 무한의 베이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최종적으로 머물기로 결정했고, 그리하여 스크린에서 주 무대가 되는 우주에서의 에블린은, 에블린의 본질적 자아로 해석 가능하다. 일반적이지 않은 행위를 해야 점프 버스를 할 수 있다는 설정과 점프버스를 하기 위해 행해야 하는 미션들의 양상은 현대인이 콘텐츠를 소비하고 해석하는 방식 혹은 주로 소비하는 콘텐츠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버트 플러그, 스틱형 립밤 삼키기, 악당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신발 거꾸로 신기 같은 엽기적인 행위는 비단 B급 유머 코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자극적이어야만 소비될 수 있는 현대 콘텐츠들의 숙명과 자극적인 콘텐츠를 선호하는 현대인의 자아를 꼬집는 설정이다. 그러나 결국 자극적인 텍스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내적 갈등과 정보의 홍수 때문에 겪는 정신적 방황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답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는 본질적 자아의 발견 혹은 생존으로 이어진다. 조부 투파키는 모든 우주와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었고, 멀티 유니버스의 무한한 힘과 지식을 손에 넣자 객관적 진리에 대한 믿음과 도덕관념을 상실하고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진다. 그러나 에블린은 다중 우주 속의 가능성과 정보를 자유롭게 쓰게 되었지만, 그 모든 실망과 거절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고, 그 사고들과 비극들을 경유해야 했던 자신도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실존적 존재로 거듭난다. 알베르 카뮈는 허무주의의 특징이 삶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모든 것에 통달하고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았던 본작의 에블린은 미래와 과거를 모두 아우르는 눈을 가지게 되고도 소중한 것을 만나기 위해 마음 아픈 미래를 걷는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루이즈를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통달의 경험을 통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르며, 결과를 만드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운명이 운명이 되는 데에 필요한 행위를 행하는 인간의 손에 달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무상한 몸짓으로 남더라도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행함으로써 운명에 수동적인 객체라는 자신을 선택적 숙명의 주체인 자신으로 바꾼다.  

 

인생은 허무하고 무상하고 우주적 관점에서 보잘것없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보통 사람들이 살아낸 찰나의 순간이 모여 영겁이 된다. 여기에 인형 눈알로 상징화된 다정함과 유쾌한 낙관주의, 주변인들과 맺은 느슨한 연대감이 더해져서 그녀가 인형 눈알을 이마에 붙인 다정한 워리어로 거듭나게 만든다. 죽은 아내에 대한 상실감으로 망가져 갔던 세탁소 단골 아저씨는 다정한 인형눈알 에블린의 향수 냄새 공격에 위로받고 자신의 본모습으로 돌아간다. 에블린은 조이의 주변적 자아를 표상하는 조부 투파키가 허무주의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끝내 손을 잡아 도넛에서 끌어내 껴안아준다. 그 순간 에블린이 세무서 직원을 때리지 않고 잘 빠져나옴으로써 분기된 멀티 유니버스의 에블린 또한 떠나는 조이를 붙잡아 껴안아 준다. 인간이 스쳐 지나오고 끝내 기각된 부정적(아니 부 否, 정할 정 定, 밝을 적 的)인 주소들이 모두 부정(아니 부 否, 정할 정 定)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내린 모든 절망과 좌절 또한 현재의 인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인간이 갖는 부동의 기정사실이자 결말인 죽음마저도 현재의 인간의 형성에 기여한다. 우리는 죽을 것이나, 오늘을 살 것이다. 그것도 치열하게. 현재의 인간을 인간은 수많은 자아를 가지고 있고, 그 수많은 세계가 모여 만든 복합적 우주가 인간이다. 

 

본 작은 비극적인 사고와 먹고사는 일의 현실적 압박감이 갖는 영속성과 연속성, 그리고 이것을 다 살아내도 결국 우리는 죽음에 이른다는 허무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다정함이고 그것을 해내는 것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을 관객이 자각하게 한다. 본작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라따구리를 머리에 얹고 요리하는 요리사마저도 지극히 평범하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과 비슷하기도 하다. 심지어 손가락이 핫도그인 세계에서의 에블린과 디어드리가 보여주는 생활양식, 취미, 사랑의 방식, 경제생활은 우리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그저 손가락 모양이 우리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싸우고 화해하고, 증오했다가 사랑하는 그들을 보면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그래,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지" 하는 한탄은, 어떻게 해도 비슷하니까 대충 살자는 허무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하므로,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그들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실존적 자문의 시작에 가깝다. 우리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몹시나 사랑했던 시절, 스크린에서 슈퍼히어로를 보면서 느꼈던 대리만족과는 차원이 다른 체험적 감상이 본 작의 특징이다. 본 작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일련의 사고와 비극에 휩쓸리는 설정을 제시함으로써, 그들과 비슷하게 평범한 보통 사람인 관객으로 하여금 작중 상황에 몰입하게 한다. 나아가 영화가 끝나고 다정함과 연대, 그리고 사랑이라는 해법을 확인하고 나서도, 긴 여운을 겪는다. 에블린의 삶을 곱씹으면서 부지불식간에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는 누구이고 싶은가. 나는 어떤 의미이고 싶은가. 나는 누구인가. 와 같은 질문을 마주하는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기에 같은 것을 보고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이 다른 생각들은 양립할 수 있으므로 누군가의 답이 틀렸음을 반증할 수 없다. 세상에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한 존재는 없다. 알파 유니버스의 에블린은 점프버스를 통해 다른 우주의 존재를 증명했고, 다른 우주의 또 다른 자신과 일시적으로 연결해서 기억, 기술, 감정까지 공유하는 방법을 찾아낼 만큼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녀도 버스점프에 특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던 딸 조부 투파키를 혹독하게 훈련시켰고, 결국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파멸로 내몰았다. 그러니까 웨이먼드가 멀티 유니버스 전체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신했던 알파 유니버스의 에블린마저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세상에 완벽함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름이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지지한다. 본 작은 원을 거울, 베이글, 인형 눈알, 디어드리가 영수증 가격 위에 그어댄 동그라미 표시로 다양하게 변주하여, 이를 증명해 낸다. 

 

영화 초반부, 둥근 거울에는 에블린 가족이 노래방 기계를 켜놓고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비친다. 그러나 잠시 후 행복한 순간은 증발해 버리고, 거울 안에는 고단한 에블린만이 남는다. 영수증을 정리하는 에블린의 뒤에 놓인 이 거울에, 이혼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눈치 보는 웨이먼드의 모습이 비친다. 거울에 비치는 것은 순전히 현실 그 자체며, 왜곡 없는 진실의 전사(구를 전 轉, 베낄 사 寫)다. 디어드리가 세무 문제로 노래방 기계를 문제 삼고, 영수증에 짙은 동그라미를 반복적으로 그리는 행위는, 동그라미를 치는 것이 시험지 위에서 '맞음'을 상징하는 현실과 괴리가 있다. 이 행동으로 인해 상기한 거울 속에 비침으로써 가장 행복한 순간과 그 순간을 지탱하는 수단이었던 노래방기계는 한꺼번에, 동그라미 때문에, 순식간에 부정당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당한다. 자신의 꿈과 가족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 거울을 통해 전사된 진실이 부정당하자 에블린은 웨이먼드의 제안대로 이상한 행동을 해보기로 한다. 에블린은 첫 점프를 앞두고, 디어드리 사무실에 놓여 있는 둥근 거울을 쳐다본다. 거울은 상을 투사(꿰뚫을, 투과할 투 透, 비출 사 射) 하는 것이 아니라 반사(돌이킬, 돌아올 반 反, 비출 사 射) 한다. 거울을 쳐다보는 행위는 현실의 자신의 의미를 체크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점프버스로 인하여 자아의 충돌, 분열을 겪는 상황을 묘사할 때, 에블린의 얼굴을 담고 있는 거울이 깨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베이글은 웨이먼드가 알파버스를 묘사하는 첫 장면에 'HAIL BAGEL'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는 팻말에서 이미지보다 글자로 먼저 묘사된다. 베이글은 흔하고 그래서 가치 없는 공산 식품이고, 따라서 조부 투파키는 자신이 느낀 허무주의를 베이글에 투영(던질 투 投, 그림자 영 影)한다. 현대인들의 인생은 공장에서 찍어낸 베이글처럼 천편일률적으로 재생산되고 있고, 인생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베이글 위에 올려 먹는 크림치즈처럼 일회성으로 낭비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전투를 앞둔 웨이먼드의 허기를 채웠던 것은 베이글이고, 보통 사람들이 전쟁 같은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것도 크림치즈 얹은 베이글이다. 인형 눈알은 웨이먼드가 세탁기, 빨래 가방에 붙이는 용도로 쓰이다가, 마지막 전투에서 에블린이 자신의 미간에 붙이는 것으로 묘사된다. 웨이먼드는 에블린에게 빨래도 2층에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이때 에블린이 찾고 있는 빨래가 들어있던 가방에도 인형 눈알이 붙어 있다. 웨이먼드는 일상 속에 스며드는 위트와 가볍지만 다정한 농담들이 모여, 인생을 바꾸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에블린은 현실적 각박함 때문에 이를 애써 모르는척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다정함의 힘의 상징으로 인형눈알을 택함으로써, 자신이 웨이먼드의 가치관에 공감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요컨대 작품은 '원'이라는 형태를 중심으로 비슷한 모양을 가진 장치들에 작품 바깥의 현실에서의 통념과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장치들끼리도 상이한 의미를 갖도록 함으로써, 다수의 생각이 늘 옳을 수 없고 동일한 대상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중에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 없고, 설사 그 생각이 만고불변의 진리라 할지라도 다른 어떤 생각을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 누군가는 죽음이 있어서 생이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죽음이 있어서 생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인생이 가벼운 것으로 여겨지고, 다른 인생들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눈에 하찮은 것으로 비친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가치하고 허무한 것은 아니다. 인생이 가볍고, 흔한 일상으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그 인생을 살아내는 누군가가 그런 일상도 소중하게 여기고, 자신의 의미를 구축하는 데에 귀하게 쓰고 있다면. 이대로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미 충분히 가치 있다. 

 

충격적 시각 효과와 의상, 메이크업, 소품 등 비언어적 장치 역시 파격적인 메시지와 소재를 담아내는 데에 주효한 역할을 해냈다. 조부 투파키가 전투에서 사용하는 무기가 충격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는 데다가 현란하게 변화하고, 의상과 메이크업 역시 화려하고 강렬한 색채와 형태를 보이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이, 다중 우주를 끊임없이 넘나드는 그녀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시각적으로 설명한다. 기괴하고 스산하기까지 한 조부 투파키의 외형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상당히 오래 잔상을 남기는 반면, 에블린이 다중 우주를 통과할 때, 그러니까 자아가 혼란을 겪을 때 거울이 깨지는 이미지가 삽입되는 것은 직접적이지만 여운은 길지 않다는 점이 둘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도 흥미롭다. 브레인스토밍하듯이 온통 많은 아이디어를 늘여놓았다가, 결국엔 그 아이디어들을 수습해 내는 것도 인상적인데, 조부 투파키의 정체가 조이임을 극초반에 밝혀버린 것도 산만하다고 느껴질 만한 이 작법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데에 상당히 유효했다. 에블린이 조부 투파키를 도넛으로부터 구원할 때, '이쪽 우주'에 있는 또 다른 에블린이 입고 있는 셔츠도 주목할만하다. 이 의상은 에블린이 평소에도 걸칠만한 평범한 격자무늬 롱셔츠처럼 보이다가, 에블린이 가족 앞에서 잘 보이지 않는 흐트러지고 광분한 모습을 보이고 카메라를 등지는 순간 후면에 프린팅 된 'PUNK!'가 비치게 되면서 순식간에 특별해진다. punk는 시시한, 열등한, 젊은 불량배, 애송이를 뜻하며, rock과 나란히 붙어 저항정신 표현의 수단인 punk rock이 되기도 한다. 이로써 현재 다중 우주의 어떤 한 귀퉁이에서 맹렬한 허무주의자로부터 온 우주의 실존과 존재의 의미를 지켜내는 존재는 신도 아니고, HAIL을 외치는 정치가도 아니고, 그저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 그리고 가끔 일이 안 풀릴 때는 지질하기도 한, 어떤 punk가 된다. 

 

하나만! 아저씨는 언제부터인가 읍내에서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가 존엄을 찾아서 어디로 떠났는지 늘 궁금했고, 나래한테는 붕어빵은 간식이지. 밥도 먹고 붕어빵도 먹으니까. 근데 아저씨한테 붕어빵은 며칠간 힘내서 살 밥이기도 하고, 힘내서 살라는 응원이기도 한 거야. 하고 말해주는 다정한 엄마가 있는 아이한테서 붕어빵 봉지를 받아 겨울을 잘 보내고 계시는지 걱정됐다. 겨울이 지나고 봄의 신록이 눈부시던 어느 날, 광주 백화점에 갔는데 아빠가 운전석에서 갑자기 소리쳤다. 나래야, 하나만 아저씨다! 아저씨는 어떻게 광주까지 걸어갔을까. 나는 다시는 아저씨가 우리 마을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고, 집에 오는 내내 그때 그 붕어빵 봉지를 선뜻 드리지 못해서, 붕어빵을 더 드리지 못해서 미안했다. 그리고 아저씨가 아저씨의 존엄을 지킬 수 있기를, 아저씨를 애타게 기다리는 누군가의 곁으로 돌아갈 만큼 아저씨에게 용기가 생기기를 기도했다. 영화 속에서 다정한 펑크가 세상을 구하고, 현실에서는 이런 다정하고 시시한 이야기가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 나는 특별하다고 내세울 것 하나 없이 평범하고 때로는 그 평범하다 하기에도 부족한 구석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내가, 세상을 이루는 톱니바퀴 중에 하나로, 세상을 버티게 하는 작은 나사 한 알로, 다정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이런 글을 쓰도록 만드는 것이, 붕어빵 아저씨 이야기 같은 다정하고 시시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지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본작에서 열연하며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키 호이 콴의 수상소감을 꼽겠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여정은 난민 캠프에서의 1년에서 시작된다고 회상한다. 그의 삶이 순탄치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통한의 삶을 돌아보던 그의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증명한다. 그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중 한편과 <The Goonies>에 출연한 이후에는 배우 일을 거의 하지 못하며, 40년 동안 주로 스턴트 안무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긴 세월을 지나 오스카를 휩쓴 단 한 줄의 필모 덕분에, 극적으로 인생의 변곡을 맞는다. To all of you out there, please keep your DREAMS ALIVE. 그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손가락으로 렌즈 너머의 누군가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부디 계속 꿈꾸어 달라고. 이런 짧은 연설 한토막이 누군가의 죽어가는 꿈을 되살리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영겁 같은 시간은 전 우주적 관점에서는 찰나일 것이고, 다중 우주를 견디는 영겁 같은 시간은 우리가 살아내는 찰나 같은 오늘들이 모여 만든다. 반대적 관념도 서로 영향을 미치며 양립하는 것이 우리가 속한 세계의 순리다. 에블린은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원래의 세계가 아무리 엉망이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내야 할 것을 지키고, 살아내야 할 오늘을 살아내면서, 다정한 punk로 살기 위해서, 실망과 선택이 가득한 우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는 순리 안에서 운명을 개척하고자 한다. 그간 우리 세계를 이끌어 온 것이 더 우월한 것의 추구였다면, 정답 없는 세상에서, 다름과 다양성이 가득한 이 세계에서, 우리 세계를 이끄는 것은 다름을 다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안아주는 다정한 punk 정신이 될 것이다. 운명과 순리 앞에 미약하지만, 운명이 운명이도록, 순리가 순리가 되도록 하는데에 필요한 행위를 행하는 것은 오롯이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에블린, 루이즈, 키 호이 콴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모든 것은, 모든 마음은, 모든 곳에서, 동시에. 각자의 길 위를 걷고 있다. 그리고 그 걸음을 응원하는 다정한 마음들이 모여. 어떤 것이든, 어디에서든, 언제든. 가능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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