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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 데이비드 O. 러셀] 개기월식 / 영화 리뷰, 후기, 그리고 셰퍼드페어리 전시회

by 헌책방 2022. 11. 10.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 데이비드 O. 러셀] 개기월식

언니. 순수함과 순진함의 차이가 뭐야? 사람들이 나는 순수하지만 순진하지는 않지 혹은 순진하지만 순수하지는 않지 찡긋 ㅇ_< 하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P는 종종 메신저에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내가 백과사전도 아니고, 인생 한참 더 산 스승님도 아닌데 까지 입력했다가 메시지를 지웠다. 물론 내게도 그런 문장이 낯설지 않다. 그러나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순진과 순수 중에 어떤 쪽에 부합하는지 생각해 본 적 없으니 잠깐 골똘해진다. 글쎄. 순수(순수할 순 純, 순수할 수 粹)는 불순물 없이 깨끗한 상태를 두 번이나 강조해서 지극하게 깨끗하다는 뜻이겠고, 순진(순수할 순 純, 참 진 眞)은 깨끗하고 진실한 상태라는 뜻이겠네. 보통은 순수가 정결함이랑 연결 되고 순진이 세상 물정에 어둡고 밝음과 연결 되니까. 문맥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예컨대 세상 사는 셈은 빠르지만 정념(정 정 情, 생각 념 念)에 낯선 타입이라면, 순진하지는 않지만 순수하다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는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이겠네? 응, 맞네. 하도 순순 거렸더니 머리가 더 순(純)에서 멀어져 복잡해지는 것 같다. 생수를 들이키며 창 밖을 봤더니 나목 사이로 보이는 높은 하늘에 구름이 걸려있다. 미세먼지 국가답지 않게 구름이 선명하다. 오늘 밤에 개기월식이 있다지. 마치 밤에 예정된 개기월식의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해를 달게 삼킨 구름 테두리가 반짝반짝 빛난다.


저 순수하고도 순진한 순간이 실버라이닝(Silver Linings)이다. 그러고 보니 순진하지도 순수하지도 않고 그다지 순하지도 않은 인물들이, 운명적인 사랑을 통해 철학적 고민이나 복잡한 전략이나 노력 없이도 서로를 인정하는 데에 성공하고, 결국 순수에 도달하는 이야기가 있다. 감상하기에 제법 가벼운 로코물이 아카데미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주인공 제니퍼 로렌스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했으며, 썩토 92를 기록한 <실버라이닝 플레이북(Silver Linings Playbook>이다. 플레이북(Playbook)은 스포츠팀의 전략이나 각본의 플롯을 그림으로 표현한 책을 의미한다. 본작의 서브플롯인 주인공 팻(브래들리 쿠퍼 분)의 심리 상담과 팻의 아버지(로버트 드 니로 분)가 불법 도박에 투신할 만큼 광적으로 좋아하는 풋볼 리그에서 '전략'이 반복적, 직접적으로 관객에게 노출 되기 때문에, 본작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라는 제목만으로도 희망으로 도달하기 위한 어떤 필승 전략이 이야기 뒤편에 숨어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선사한다.

 

 

주인공 팻은 아내의 불륜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아내의 불륜 상대를 폭행하여 -아마도 심각한 수준으로 추정되는-상해에 이르게 하며, 그 후 극심한 조울증을 앓게 되고, 그 순간 현장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자신과 아내의 결혼식 행진곡을 들을 때마다 극심한 공황장애를 겪기도 한다. 엄마 손에 이끌려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온 팻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운동을 시작하고, 자신을 피하는 이웃들에게도 좋은 이웃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리고 이웃들이 모두 그를 외면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을 여전히 친구로 받아주는 로니의 집에 저녁식사를 하러 갔다가, 로니의 처제 티파니(제니퍼 로렌스 분)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의 결핍과 남들과는 다른, 그러나 서로는 공유하고 있는 특수한 '결'을 발견한다. 하지만 팻에게 다가가는 티파니와는 달리, 팻은 티파니에게 신경이 쓰일수록 아내만을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티파니는 자신의 언니이자 로니의 아내인 베로니카가 팻의 아내 니키와 친구인 점을 들어, 팻의 편지를 니키에게 전해주겠다고 하며 그 대가로 함께 댄스대회에 나가자고 제안한다. 둘은 춤을 추면서 조금씩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이 가까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고, 트라우마와 상처를 극복하고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된다.

 

단순한 이 줄거리 속에는, 조울증을 겪고 있는 팻과 수달 간 성관계를 거부한 자신에게 이벤트 격으로 선물할 빅토리아 시크릿을 사러 나간 남편이 죽은 후로 극심한 우울증과 자책을 겪는 티파니 외에도, 편집증과 폭력 충동을 겪는 팻의 아버지, 자녀를 사랑하지만 제압하지 못하고 끌려 다니는 팻의 어머니,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는 팻의 형, 팻을 상담하면서 전략과 이성적 판단을 강조하지만 풋볼 게임을 보러 갔다가 인종차별을 당하고 폭력 사태에 휘말리는 팻의 정신과 주치의, 낭비벽이 심한 베로니카, 주차장에서 분노와 스트레스를 홀로 억누르며 마음이 썩어가고 있는 로니, 불륜 현장에 공교롭게도 팻과의 결혼식 테마음악을 틀어놓는 니키, 불륜 현장을 들켜놓고 당당한 니키의 불륜 상대, 팻의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면서 내기 도박을 부추기는 랜디, 무례하고 무리하게 팻의 정신이상을 인터뷰하려는 이웃 아이, 팻을 정신병자 취급하면서도 티파니를 말로 추행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정신 상태를 의심하게 하는 경찰 등, 평범하게 일상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딘가 조금씩 '보통'이라고 보기 어려운 면모를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런 설정상 특성 덕분에 단순한 줄거리는 부지불식간에 풍부해지고, 관객으로 하여금 '완벽한 정상'이란 어떤 상태이고, 그 기준은 어디쯤에 있으며, 그것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한다. 동시에 관객 또한 별 수 없이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이자, 스스로 안아주고 이해하고 다독여야 마땅한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요컨대 본작은 상처와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사랑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고 결핍을 이해하면서,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는 과정을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낸 작품이다. 팻은 극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일관되게 자신과 아버지가 사랑하는 풋볼 팀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모토이자 미국 뉴욕 주의 표어인 'Excelsior'를 신봉한다. 그러나 그는 티파니를 만나 사랑을 배우고, 자신을 업신여기며 화를 터뜨리는 형에게 그래도 나는 형을 사랑해. 하고 마음을 전달하는 용기를 내는 등 점점 자신 안에 있는 상처를 인정하고 치유에 집중하면서 점차 변화한다. 팻은 자신이 발붙이고 사는 땅과 주변을 사랑하게 되고, 더욱 더 높이 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실에 충실하며 오늘을 살고, 그리하여 오늘을 쌓아 올려 느리지만 조금씩 더 높이, 그리고 멀리 나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 옅은 사랑부터 깊은 사랑까지의 사랑의 그러데이션을 표현한 방식에도 주목할 만하다. 티파니는 다른 남자들과 수많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트라우마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한다. 그러나 상처를 가졌다는 면에서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상처의 세부적인 면면들은 다른 팻을 만나면서, 진정한 사랑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팻은 자신을 실망시키고 자신이 실망시킨 아내에게 속죄하고 온전한 사과를 받고, 망가진 사랑을 고치는 방법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자 한다. 때문에 본능적인 이끌림을 느끼면서도 티파니를 극구 밀어낸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사랑을 하고 싶은지, 춤이라는 솔직한 언어적 표현을 통해서 -의도치 않게- 면밀히 들여다보게 되고, 결국 티파니와 자기 자신에게 진솔한 고백을 건네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된다.

 

아쉽게도 인생에 행복이나 희망으로 가는 필승전략은 없다. 어떤 사연이 있더라도 폭력은 옳거나 이해받을만한 것이 될 수 없으며, 트라우마 때문에 발현될 것이라 할지라도 팻의 폭력적 성향과 티파니의 자기 파괴적 성향 또한 옹호 받을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아마 그들은 아마 오래, 멀리, 조금씩 높이 날며 자신의 마음과 연인의 마음을 보듬으면서 치료행위와 자가 치료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 해피엔딩이라는 끝맺음을 마냥 행복하다고 믿을 수는 없었던 이유다. 세상에 완벽한 해법이 전략이 없듯이, 그들의 상처를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치료법은 없다. 사람은 발생한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거나, 없었던 것처럼 캐비닛 안에 밀어 넣고 영원히 모른척 하며 살 수 없다. 본작의 제목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은 내용과 모순을 빚는다. 그러나 그 모순은 아름답다. 인생은 거대한 농담이자 모순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결과에 수렴하기 위해 살기 때문에, 자명한 그 결과에도 불구하고 삶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순이 돋보인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 슬픈 명제 덕분에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기대어 서로를 보듬는 데에 탁월한 명분을 얻는다. 우리는 이 모순적인 상황 덕분에 느슨한 사랑의 연대 안에서 무너지지 않고 있다. 



개기월식을 보다가 P에게 카톡을 했다. P야. 달 봤어? 몇십 년에 한번,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몇백 년에 한 번뿐인 월식이라던데. 남편이랑 같이 창문 열고 보고 있어. 그래? 남편이랑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봐볼래. 우리는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고, 마찬가지로 순수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은 사회를 살고 있지만, 어쩌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너네 부부라면 가능할 것 같아. 응, 이번 주말에 꼭 볼게. 나도 지난주에 처음 봤어. 고시 공부 할 때는 영화 볼 시간이 없어서 그 시절에 개봉한 영화들은 많이 못 봤거든. 영화 너무 좋더라. 웅, 고마워. 언니 사랑해. 그래 나도. 잘 자! P는 내 메시지에 좋아요를 누르고 사라졌다. 우리에게는 별다른 도리가 없다. 별 수 없다. 사랑하는 것 외에는. 솔직해지는 것 외에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인정 받으며 사랑 안에 사는 것 외에는. 사는 데에 뾰족한 다른 전략이 없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져 사라져도, 희끄무레한 달무리가 여기에 아직 달이 있다고. 달은 아직 여기서 빛나고 있다고. 희망은 있다고 이야기한다. 아, 세상은 아직 나아가고 있다. 달은 아직 거기에 있다. 우리는 조금씩 높게 멀리 날아 달에 닿자. 인간은 이 먹구름 끝에서 더욱 빛나는 단순한 전략, 그림자 끝에서 넘실거리는 단순한 방법,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 묵묵히 투신하는 수 밖에 없다. 사랑으로 순수에 도전하는 모든 자들의 건투를 빈다. 

 

 

*  지난 주말, 동생과 함께 다녀 온 전시회 사진으로 갈무리합니다 *

갈때마다 느끼지만, 롯데뮤지엄에서 하는 모든 전시회는 꽉 차있고 또 생각보다 규모도 커서 좋더라구요!

셰퍼드페어리를 볼 수 있어서 더 좋았어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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