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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인셉션 - 크리스토퍼 놀란] 일상은 운명보다 위대하다

by 헌책방 2023. 6. 9.

[인셉션 - 크리스토퍼 놀란] 일상은 운명보다 위대하다



어린 시절 내 꿈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파가니니, 베토벤 같은 악성( 樂聖)이 되고 싶었고, 스즈키, 하농, 체르니 같은 기본 교재로 연습할 때 유독 심하게 짜증을 부렸다. 서울로 콩쿠르에 나갔던 날, 턱에도, 여린 손가락 끝에도, 굳은살 한 점 박히지 않은 하얀 아이가 1등을 거머쥐는 것을 보면서, 나는 평생 2등에 머물 것임을 깨달았다. 음악가로서 원대한 업적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선택한 꿈은 검사였다. <어 퓨 굿 맨>, <에린 브로코비치>의 주인공들처럼 억울한 사람들을 구해주는 법률가가 되고 싶었고, 큰 사건만 도맡아 해결하는 대단한 검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대학에 진학하던 해에 로스쿨이 도입되었고 가까스로 2학년 때 법학과를 복전하는 데에 성공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되더라도 이 땅의 대부분의 검사는 24시에 퇴근하고 7시에서 9시 사이에 출근하며 거대한 악을 척결하는 검사가 되는 일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 이후에도 검사를 꿈꾸었지만, 귀 뒤에 자랐던 종양과 사법시험이 생각보다 더 좁은 등용문이라는 사실이, 내 꿈을 좌절 시켰다.

 

우리 사회에 큰 역할을 하고 싶다, 원대한 일을 해내고 싶다는 당찬 꿈들은 현실과 금방 타협했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오랜 꿈을 현실과 타협한 스스로에게 지독하게 실망했고, 깊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 그 무렵이었다. 생각은 힘이 세다. 무의식의 심해에 뿌리내려 삶의 향방을 결정하고, 인간이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어디로 걸을 것인지에 깊이 관여한다. 본작의 주인공 코브는, 이 점을 이용하여 의뢰에 따라 누군가의 꿈에 침투하여 무의식 깊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뿌리 깊은 생각을 훔쳐 오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그리고 기업가 사이토의 꿈에 침투하여 비즈니스상 기밀을 훔쳐 오려다가 사이토에게 계획을 들키고 결국 프로젝트에 실패한다. 코브와 아서는 사이토의 역제안, 그러니까 그간의 작업과는 반대로, 누군가의 꿈에 침투하여 무의식에 어떤 생각을 심자는 의뢰에 따라, '인셉션'에 도전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토록 복잡다단하고 논쟁의 소지가 많은 과학적 소재로, 비효율적이라고 할 만큼 간단하고 친절하게, 일상의 소중함과 일상의 파괴가 모두에게 미칠 악영향에 대하여 설명한다는 점이다. 그는 <인셉션> 이후 메가폰을 잡았던 <배트맨> 시리즈, <인터스텔라>, <덩케르크>, <테넷>을 통해서도, 원대한 이야기를 빌려 일상의 소중함에 대하여 이야기해왔다. 원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에 목말라 있던 나는 본작을 통해서, 결국 인생을 만드는 것은 사소한 하루, 일상들의 모음이며, 우리는 더 위대한 인간이 됨으로써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발견하고 필요하다면 개척함으로써 실존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본작과 사랑에 빠지게 된 여러 이유 중에 하나다.

 

본작은 인셉션이라는 서사의 토대가 되는 복잡한 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꿈의 해석>을 비롯한 프로이트의 저서들, 라캉의 세미나와 강의들을 정리한 책들, 그리스 로마신화, <매트릭스>, <13층> 등 20세기 말의 영화들 등, 마찬가지로 장대한 서사를 가진 작품들의 일부를 본작의 모티프로 활용하거나 오마주 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프로이트는 그의 작품을 통해 꿈의 주인이 처한 외부적 환경이 변화하면 꿈이 이를 반영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꿈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고안된 '킥'과 코브의 팀이 처한 상황이 꿈속의 중력에 영향을 끼치거나 산사태 등 천재지변으로 나타나는 장면 등이 이 작품 내에서 프로이트의 주장을 반영한다. 프로이트는 또한 <정신분석학>, <히스테리 연구>, <자아와 이드> 등의 저서에서 무의식은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꿈과 실수 등을 통하지 않고서는 의식화하지 않고, 자아가 불안하면 여러 형태로 방어기제가 나타나고 초자아가 히스테릭해지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이는 본작에서 코브의 무의식이 아내 맬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여전히 강도 높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으며, 따라서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에 가둬두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마리옹 꼬띠아르가 연기하는 Mal의 배역명이 영어로 명사, 동사, 형용사에서 나쁜, 잘못된 것을 나타내고, 프랑스, 스페인어로도 악의, 불길한, 곤란, 장애 등을 뜻한다는 점이 코브의 히스테릭한 자아 상태를 집약한다. 요컨대 코브의 무의식 안에서 맬은 실제로 그의 아내 혹은 그녀와의 깊은 사랑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무의식에 현실이 실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주입시켰고 그리하여 그녀가 자살했다는 과거 때문에 그의 무의식이 겪고 있는 죄의식을 비롯한 부정적 영향들과 자아가 불안해지면서 드러난 히스테리를 상징한다.

 

그리스 로마신화는 꿈의 설계자로 초빙된 아리아든과 코브의 팀이 꿈의 설계를 미로 설계로부터 착안했다는 점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아리아드네는 크레타의 공주였지만, 테세우스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걸고 이방인 테세우스가 자신의 친척인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디오니소스가 다스리는 섬에 그녀를 혼자 두고 가버리고, 결국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와 혼인한다. 엘리엇 페이지가 연기한 건축학도 아리아든은 코브에게 탈출할 수 없는 미로를 그려주고, 미로 같은 꿈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끝까지 원조한다는 점에서 아리아드네와 같다. 또한 라캉이 원초적 욕망이라고 설명하였던 코브의 무의식의 끝, 림보, 맬에 대한 욕망까지 들여다본 유일한 팀원이지만, 작품 끝까지 코브로부터 심정적인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캐릭터의 결말 면에서도 아리아드네와 유사성을 보인다. 그리고 코브가 아리아드네에게 꿈을 디자인할 때 기억력에 의존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는 장면, 인셉션 작전에 투입된 팀원들이 토템으로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장면을 통해,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진짜 현실인지 확인하는 것이 존재 의미에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각인시킨다. 우리의 기억은 완전히 정확할 수 없고, 해석을 거쳐 저장되는 만큼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꿈을 디자인할 때 기억력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역으로 꿈을 해석하거나 꿈에서 빠져나올 때도 기억력에 의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작의 아리아든과 그리스 로마신화의 아리아드네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현실감을 유지하고 현실로 되돌아갔을 때 자신의 위치를 안정화하기 위하여, 상황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과의 연합을 도모한다. 또한 현실이 '실제로 현실'인가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본작에서 가장 중요한 갈래가 되는 점은 <매트릭스>의 영향이라고 할 것이다.

 

나아가 본작은 관객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현재(나타날 현 現, 있을 재 在)가 진정으로 존재하는지, 관객은 진정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인지를 묻는다. 코브가 맬의 무의식의 금고를 열고 멈추지 않는 토템을 빙글빙글 돌려놓은 것처럼, 본작은 관객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심는다. 팽그르르 춤추는 토템을 던져놓는다. <매트릭스>의 감상자가 네오가 선택해야 했던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을 지켜보며,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인생은 거대한 모순이고, 허무한 농담과도 같다. 아서에 따르면 토템을 직접 정하고 만든 사람만이 토템의 정확한 무게중심을 확인할 수 있고, 따라서 추출자, 설계자, 약사 등 같은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팀원이라 할지라도 타인의 토템을 만질 수 없다. 어원적으로 토템은 각 부족 및 씨족 사회,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살았던 원주민 사회에서 신성시되는 상징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코브가 자신이 진정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품 속에서 꺼내는 팽이 모양의 토템은 본래 맬의 것이다. 사회의 질서에 관여할 만큼 신성한 상징물로 타인의 기준을 차용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초조하게 팽이를 돌려보는 코브의 과거들은, 행위만으로 모순 그 자체가 된다. 코브의 팀은 본격적인 킥에 앞서 노래가 꿈에 흘러나오도록 꿈 밖의 현실을 조성한다. 그리고 이 때 사용하는 노래는 늘 <Non, je ne regrette rien>, 번역하자면 <아니, 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아>라는 제목의 샹송이다. 코브는 꿈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지만,나는 전혀 후회하지 않고, 그 이유는 새로운 내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노랫말을 들으며 꿈에서 깨어난다. 거대한 아이러니. 코브의 고유한 토템은 현실을 가늠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코브는 맬과의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놓쳐버린 것을 후회하지만, 결국엔 후회하지 않고 나가야함을 깨닫고 결국에는 킥을 타고 꿈에서 깨어난다. 과연 나는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인지 대답하려던 관객은 그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사유( 思惟)에 직면한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해변에 혼자 선 고독한 카프카를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는 인간은 무의식을 통제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무의식이 벌이는 사유와 행위에 대하여 인간이 무제한적인 면책권을 누릴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루키는 무의식을 바다에 비유하며, 우리가 그 바다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에 대하여, 자신의 본질적 자아를 찾기 위해 집을 떠나 세상에 홀로서기에 나선 소년 '카프카'의 여행을 통해 여실히 드러낸다. 거친 무의식의 바다에서 겨우 빠져나와 해변에 발 디딘 코브를 생각한다. 본작에서도 코브의 무의식에서든, 사이토의 무의식에서든, 림보(무의식의 바닥, 혹은 저편)은 거친 바다 끝의 해변으로 표상된다. 어쩌면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그의 안에 무게중심의 추가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누구의 토템으로 현재를 가늠하든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파도가 거칠게 일렁이는 험상궂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cove, 작은 만의 모습을 생각한다. 코브는 아무리 거센 태풍이 몰아치고, 사정 없이 꿈이 무너져내려도, 늘 한곳에서 움푹 파인 채로, 바다를 작은 가슴으로 안는다. 제 가슴을 깎아 내면서도 태풍의 눈을 안아내는 작은 cove와, 무의식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앉은 초자아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cobb의 닮음새가 어느덧 잔잔해진 윤슬 위에 일렁인다.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10대가 되어, 카프카는 집으로 돌아갔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고독했던 사내(cove)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코브가 돌린 맬의 팽이는 회전을 멈췄을 것이다. 코브의 꿈은 금기를 깨고, 늘 기억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이들의 얼굴과 아빠와의 만남에 기뻐하는 몸짓은 희망에 대한 기억이 없었던 그의 기억과 무의식이 창출해 내기 어려운 이미지다. 그러나 토템이 회전을 멈추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현실을 살고 있냐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지 스스로 결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현실의 무게중심과 존재의 의미는 운명의 주인의 내부에 있다. 실존은 결코 토템에, 누군가가 들이댄 잣대에 달려있지 않다. 아이들을 만난 코브에게는 더 이상 토템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놀란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의 화법과 그가 진정성 있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방식으로 선택한 원대한 시퀀스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장대한 이야기 끝에 늘,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본작을 포함한 그의 작품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SF 적 모험과 인간의 가능성과 현실적 한계를 사이에 둔 목숨을 건 사투 끝에, 이야기를 주도한 모든 이가 자신이 발 딛고 선 좌표를 인지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으며, 위대한 이야기를 만드는 최소단위인 일상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장면으로 귀결한다. 엔트로피의 역행을 이용해 시간의 흐름을 뒤집는다는 설정을 내세운 놀란의 역작 <테넷>은 단지 자신의 아이를 더 품고 싶어서 스스로의 소멸의 위협 앞에 서는 한 어머니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어머니는 깨닫는다. 자신이 없다면 아이를 안아 줄 엄마도 없다는 사실을.

 

영화 밖의 보통의 세상에서 보통 사람들이, 보통의 삶을, 보통 이상의 치열함으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놀란의 작품은 영화 안팎에서 보통의 삶은 보통 이상의 치열함으로 버틸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산다는 것은 인셉션만큼이나 엄청난 기적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기적을 행하고 있다. 인생은 거대한 모순과 같다. 세계는 커다란 메타포와 같다. 인간은 이 거대한 모순을 어떻게 살아낼지, 어떤 일상으로 채워낼지에 대답하며, 수수께끼 같은 메타포를 하나씩 해제한다. 현재는 모순을 견디며, 비로소 현화한다. 원대한 미래를 미리 살기보다 충실한 일상을 살아내는 것이 더 위대하다. 위대한 연주는 체르니, 하농, 스즈키 같은 기본을 연습하는 소리에서 시작된다. 사회를 파괴하는 거악의 척결은 현장에서, 작은 사무실에서, 작은 피해에도 귀 기울이며 서류더미와 싸우는 작은 몸짓에서 시작한다. 물론 현실에 타협하며 내 손으로 꿈을 좌절 시켰던 순간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생, 일상(날 일 日, 항상 상 常)이 위대하다는 사실만큼 우리가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 시대(때 시 時, 대신할, 교체할 대 代)적 배경, 나아가 주어진 운명보다 더 위대한 존재임을 명징하게 증명하는 명제가 또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꿈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있는 힘껏 오늘을 살자. 거꾸로 그것이 우리를 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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