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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봤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아쉬가르 파라디] 비극의 점층과 균열

by 헌책방 2022. 5. 4.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 아쉬가르 파라디] 비극의 점층과 균열

눈꺼풀에 든 멍은 오래 간다. 중학교 1학년생이었을 때, 중학생이나 돼서 운다고 이웃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하면서도, 참으로 오랜만에 울면서 집에 갔다. 사실 내내 울지 않고 학교에서 오후를 잘 보냈었는데, 엄마에게 가는 집 계단 위에서 괜히 더 서러워져서, 참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시골 깡촌에 있는 여중학교에 다녔지만, 선행학습을 마친 친구들의 진도를 따라잡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았다. 흔한 속셈학원, 수학학원 한번 다녀본 적 없이 중학생이 되었고, 고등학생 언니들이 푸는 문제도 척척 푸는 친구들 틈에서 뒤쳐짐의 괴로움에 몸부림쳐야했다. 다른 친구들보다 본격적인 공부를 늦게 시작했다는 초조함 때문에 밤낮 없이 공부했고, 덕분에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다. 그날도 의자를 길게 붙여 그 위에 누워 정신 없이 낮잠을 잤다. 일순간 눈이 뜨끈히 아파서 눈을 떴더니 시야에 얼굴들이 보였다가 호다닥 사라졌다. 지금도 그 이름들을 잊을 수 없다. 그들은 자고 있는 내 눈꺼풀을 잡아당겨 흔들어 멍들게 했다. 모든 비극이 그렇듯이 심리적 폭행을 포함한 이 린치들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는 혼자 힘으로 잠을 줄이며 공부하고, 늘 1등 성적표를 가져다주는 기특한 큰 딸의 고통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당장 가해학생들의 집으로 전화가 돌려졌다. 다음날 학교에 엄마아빠와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모였다. 폭행사건은 용서로 일단락 되었지만 한번 뚫린 구멍은 좀처럼 막아지지 않았고, 점점 커지기까지 했다. 내내 밝고 유쾌하게 생활했지만, 그들이 가까이만 오면 레이더처럼 눈꺼풀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2학년이 되자 같은 학교에 루나가 입학했고, 골목대장이었던 동생 덕에 학교생활은 완벽히 정상화 되었다. 눈꺼풀에 든 멍은 참 오래 시퍼렇게 남아있었다. 사라질때까지 오래 남아서 주변부까지 퍼렇고 불그스름하게 물들였다.

 

지난주에 영화 추천 AI Y님께 영화 추천을 부탁드렸다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추천 받았다. 작품은 작은 비극이 종국에는 그 원인도 생각나지 않을만큼 더 많은 비극들을 낳으며 정신없이 증식하고, 주변에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에서 태어나는 다른 비극들을 흡수하여 자기 자신의 몸집도 점층적으로 키우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추천 받은 영화를 보면서 이유 불명의, 내 눈꺼풀을 뒤덮었던 시퍼런 멍에 대하여 생각했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이자 시아버지이자 할아버지, 딸을 경직적인 사회에서 구출하고 정상적인 사회에서 교육할 방법은 이민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어머니, 치매 걸린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맡기고 이민갈 수 없다고 주장하며 이 사회에서도 아이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고 믿는 아버지, 그리고 그저 살던 그대로 가족이 행복하기를 소망하는 청소년 딸. 경제력 없는 남편, 자신과 가족, 타인의 실존보다 신앙이 중요하지만 무능력한 남편 때문에 신앙심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가정주부로 취업한 아내, 부부의 싸움을 곧이 곧대로 목격하며 성장하는 어린 딸. 두 가족의 비극의 서두는 각자, 또 때로 교차하면서, 겉잡을 수 없을만큼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결국 주변까지 잠식하며 불행으로 침몰한다. 마치 아버지, 나데르 차의 깨진 앞 유리창처럼. 금이 가고 금 주변으로 다른 작은 금들이 생겨 점차로 구멍은 커지고야 만다. 그리고 한번 뚫린 구멍은 유리창을 들어내 바꾸지 않는 이상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가, 협동으로 별거 중에 생긴 문제적 상황을 극복했다는, 강력한 재결합의 추동에도 불구하고 이혼으로 귀결되는 이유다. 씨민과 나데르는 딸 테메르의 장래 문제로 이민에 대한 의견차이를 보이며 이혼을 신청했고, 판사 앞에서도 그 차이가 좁혀지지 않자 별거를 선택한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서로에게 한 마디만 먼저 건네면, 한발짝만 물러나면, 충분히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고, 여러 차례 그런 기회 앞에 서지만 그러지 못한다.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이 싸움의 원인인 딸이 애원하고 사정해도, 대화해보겠다는 약속 한번 지키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딸이 강력하게 부모의 이혼을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이혼을 성립시키고, 딸로 하여금 누구와 함께 살 것인지 선택하도록 하기에 이른다. 결국 가족은 이혼을 조정하는 재판정에 모이고, 부모는 딸에게 잔인한 선택의 순간을 내민 것에 반해, 딸은 누구하나 상처 받는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는지 부모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부모가 아니라 테메르가 누군가를 상처줄 수도 있는 일에 더욱 세심하게 신경 쓸 줄 안다는 사실이 이 작품의 가장 뼈 아픈 지점 중 한 군데다. 명분과 신념, 그리고 고집까지 갖춘 이들이 빚은 비극을, 그 비극이 점층되는 기간동안 비극과 비극 사이의 균열에 끼어 신음하면서도 내내 최선을 다해 상황을 해결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어린 테메르가, 마지막까지 책임 지는 셈이다. 

 

이유 있는 신념과 고집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비극이 단초가 되는 경우도 많다. 씨민도, 나데르도, 라지에도, 라지에의 남편도, 자신의 신념이 상처 받을 때마다 다혈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다가도 한 발 물러서면 생각을 고쳐 먹고 차분해진다. 특히 나데르는 진정으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는 병원에서 치매 걸린 아버지의 상해 사실에 대한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서 이를 근거로 가정부이자 간병인으로 일했던 라지에를 고소하고자 한다. 그는 병원에서 의사가 멍을 포함한 타박상을 확인하게하고자 아버지의 옷을 벗겼다가, 이내 곧 마음을 바꿔 도로 옷을 입힌다. 의사가 그 이유를 묻자, 아버지 몸에 난 상처들이 라지에의 유기 때문인지 불분명하다고 설명한다. 이 장면이야말로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내포한다.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부당한 상황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자신이 밀쳐서 라지에가 유산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그는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 주변을 포섭하기도 하면서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버지의 고분고분하고 힘없는 몸뚱이 앞에서, 자신의 신념과 고집이 정의롭거나 정당한 가치의 추구라고 불릴만한 것일지라도, 그 것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과, 타인을 위해서라는 대외적 명분 이면에는 이기심과 자기보호라는 내부 아젠다가 상존함을 희미하게 자각한다. 부부는 딸의 장래 때문에 싸우기 시작하지만, 이런 희미한 자각이 모여, 비극의 끝에서야 그간 자신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싸워왔음을 깨닫는다. 어떤 면에서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시원섭섭할만도 한 비극이 늘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 싸움에서 희생되는 것들은 늘 연약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씨민과 나데르의 딸 테메르나, 라지에의 딸 소마예처럼. 테메르의 선택을 기다리는 씨민과 나데르의 사이로 엔딩 크레딧이 흐르고, 둘은 손만 뻗으면 악수하고 화해를 나눌 수 있는 거리에서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하고 그저 초조하게 자리에 앉아있다. 이 열린 결말은 둘이 고집을 꺾고 비극의 점층을 줄이고 그 틈에 낀 테메르를 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암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 내내 변하지 않았던 씨민과 나데르의 관계와 비극의 시작이자 주변부까지 삼켜먹으며 스스로 몸을 불렸던 비극, 별거 자체를 표상하기도 한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는 2021년 칸영화제에서 <어 히어로>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이란의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가 연출한 작품이다. 무려 2011년 작품이지만, 작품에서 10년이 넘는 작품과 현재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간극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비주얼적으로도 그렇지만 내용 역시 현재, 이란이 아닌 다른 어떤 사회에 대입해도, 비극적이게도 훌륭하게 호환된다. 가정 내의 비극이 울타리 밖으로도 터져나와 사회의 일부를 균열시키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든, 언제든, 생길 수 있는 일이고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반복되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극중 첫장면, 복사기 유리면 위로 여러 사람의 여권 혹은 신분증이 스쳐지나도록 한 연출과도 연관이 깊다. 비극의 점층과 사회와 자신, 타인과 자신의 균열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민과 같은 도피를 택하거나, 혹은 갈등의 상대방과 충분한 논의와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노력 없이 그저 결별을 택한다. 누구도 삶의 작은 부분, 찰나의 순간 때문에 찾아오는 비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남녀주인공 연기자들의 은곰상, 골든 글로브 외국어 영화상, 전미 비평가 협회 각본상 등 화려한 수상실적이 충분히 납득갈만한 좋은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고, 성차별, 종교, 계층, 계급간의 갈등과 감정의 골의 역사, 선입견, 선입견이 갈등하지 않고 있는 평온한 상태에 미치는 영향, 경제 침체, 신앙심, 강박, 수단의 정당성 등 사회 전체와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제 의식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도 의미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담담하고 생활감이 묻어나는 연기도 좋다. 끝으로 갈수록 서로간의 갈등이 전혀 없는 관계는 찾아 볼 수 없고, 누구하나 거짓말하지 않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파국으로 치닫는데, 이 과정이 담담한 방식으로 그려져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테르메와 소마예 역할을 맡은 아역들의 연기도 돋보인다. 어른들의 비극이 어떻게 점층되든 상관 없이 그 분열의 틈에서도 비무장지대를 찾아 함께 즐겁게 놀다가도, 어른들 틈에 섞여들면 금세 서로를 차갑게 쳐다보는 모습이 아릿하게 긴 여운을 남긴다. 이란 영화를 감상할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에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19세기 이란으로의 대대적인 프랑스 문화 유입의 흔적과 페르시아어가 불어로부터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어 흥미롭기도 했다. 이를테면 이란에서 고맙다는 말로 프랑스어의 merci를 쓴다는 점도 직접 들으면 새롭게 다가온다. 

 

멍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듯이 나는 그 일을 잊었지만, 나중에 대학 입학을 앞두고 나고 자란 마을에서 서울로 떠나올 때쯤, 엄마가 그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혹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가 생각해서 무척이나 걱정했다고. 나중에 학생회장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었다고 엄마는 속상하게, 생생하게 그 일을 돌아보았다. 수능이 끝나서 백수처럼 빈 가방에 토익을 대비하는 책 몇가지만 넣어서 등하교하던 날들 중 언젠가에, 길에서 가해학생 중 한명을 우연히 만났다.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에게 혹시 그날을 기억하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미안했고, 다 잊어버리고 대학생활 잘하라는 축복이 잇따랐다. 고맙다고 대답하고 돌아서며 나는 몇년만에 멍들었던 자리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훗날 그들이 나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아무렇지 않게 팔로우할 때마다, 희미하게 욕지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타당한 신념을 지키기 위한 행동들 마저도 비극을 만드는데, 이유 없는 괴롭힘이야 오죽할까. 그 어렸던 이기심 앞에서 푸르르 떨면서도, 잠든 비극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국 나는 아무렇지 않은척 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 싸움에서 희생되는 것은 결국 여린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테메르, 소마예, 그리고 우리 엄마처럼. 요즘에도 엄마는 그때 이야기를 한다. 그럴 때면 여전히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 뛰어하고, 그들을 용서한 것을 후회하고, 딸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엄마의 등을 두드린다. 우리가 했던 용서 덕분에, 우리 세계에 다른 비극도, 더 큰 비극도, 균열도, 더 이상은 없었다고 위로한다. 그러나 종종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수많은 이름들이 복사기 위를 스치던 그 장면처럼, 까매졌다 또 밝아지며 바라보고 있는 액정을 스칠 때, 홀로 가만히, 그 따끔함을 삼킨다. 눈꺼풀은 멍이 한번 푸르게 피면, 살색으로 사방으로 퍼져 사라지고 나서도, 멍이 들기 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오래 남는다.

 

영화보면서 사진을 막 찍어 올릴 수는 없고, 사진은 올리고 싶어서 내용과 관련 없이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올리는 사람

눈꺼풀의 멍은 시간이 지나서 사라지고, 나는 여전히 밝게 잘 지내고 있다. 그러나 멍이 들어본 적 없는 세월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학교폭력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 용기를. 비겁하게 장난이었다고, 변명하는 학생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다면, 본인이 빚은 비극이 앞으로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한번쯤은 생각해보고 지금이라도 용기있게 그만두길 바란다.

전주국제영화제 아직 진행중이니까 아직 안가본 사람들은 꼭 다녀오세요!

좋았던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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