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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 - 에피] 민들레와 담배 / 에피 작가님께서 우수 리뷰로 선정해주신 바로 그 리뷰! [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 - 에피] 민들레와 담배 비가 부스스 쏟아지던 날이었다.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버스에 올라 급히 서울을 떠나며, 내가 아는 당신의 인생을 반추했다. 엄마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40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재직하시며 오토바이로 출퇴근 하셨던 것, 까맣고 멋있는 오토바이 뒤에 수박, 참외, 참조기,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오셨던 것, 그러다 수박이 톡 도로에 떨어져 쪼개어져 버리면 그것을 노끈으로 동여매 아무렇지 않은 척 부엌에 가져다 두셨던 것, 매일 새까만 머리에 포마드를 얹어 한쪽으로 가지런히 빗고 정리하셨던 것. 나는 직접 보지도 못 했던 것들이 생생히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수다쟁이 엄마를 생각하며,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2022. 10. 1.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왜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왜 삶을 사랑해야 하는가 오랜만에 P를 만나 맥주를 마셨다. 불쑥 그가 물었다. 야, 너 혹시 L 기억남? 그게 누구여. 그 왜 있잖아, 너랑 대학 때 잠깐 친했었는데. 아예 기억 안 나? 남 욕 많이 해서 지친다고 거리 두다 멀어졌잖아. 아! 기억 나. 사실 자세히는 안 나는데, 뭐 친했지. 술도 많이 마시고. 그 사람이 왜? 그 사람이 너 결혼할 사람이랑 헤어졌냐고 물어보더라고? 엥? L이 그걸 어떻게 알고? 글쎄, 나도 그래서 너랑 아직도 연결 고리가 있는 건가. 생각하다가 아닌 것 같아서 물어봤지. 뭐, 궁금한가 보지. 나 슈퍼스타잖아. 어련하겠어. 그래, 그래, 대단하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니 성격 때문에 개 파탄 났다고 했지. 길.. 2022. 9. 23.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 딜레탕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 딜레탕트 우리 집 책장 맨 아래 칸에는 나와 동생의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쓰여있는 A4 파일철들이 있다. 아빠가 사무실에서 거의 강제로, 그리고 가격 면에서는 반쯤 사기를 당해서 디카와 캠코더를 사 온 이후로 아날로그 카메라들은 먼지 구덩이 속으로 밀려났지만, 나와 루나가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외출하는 엄마 손에는 늘 묵직한 똑딱이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엄마는 사진을 인화해서 A4에 풀로 정성껏 깔끔하게 붙인 뒤, 사진마다 사진 속 찰나가 어떤 순간이었는지 정성껏 각주를 달아 놓았다. 나랑 루나는 그 흔적을 열어볼 때마다 흠칫한다. 위에서 내려찍은 우리들의 머리통은 만화 캐릭터처럼 둥글고 거대하다. 그러나 엄마는 그 사진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고 사진 속 순간을 떠.. 2022. 9. 13.
[만두 가게 앞에는 싱크홀이 있다 - 임선우] 매일을 여행 같이 [만두 가게 앞에는 싱크홀이 있다 - 임선우] 매일을 여행 같이 언덕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덩케르크가와 몇 번 와본 적도 없는 공원이 어쩐지 애틋했다. 생애 세 번째 파리여행 중이었고 그때는 겨우 이틀째 체류 중이었으므로 나와 파리의 역사는 겨우 일주일 조금 넘게 쌓여있을 뿐이었지만, 바꿔 말하면 나는 파리 일주일 살기를 체험해 본 셈이었다. 부지런한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벌써 몽마르트르를 오르고 있었다. 더운 숨 끝에 전날 밤 마신 와인 향이 생생히 맴돌았다. 여행자로서의 나의 신조는 한결 같았다. 관광(볼 관 觀, 빛 광 光)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나그네 려 旅)처럼 흘러들어가(다닐 행 行) 사는 것처럼 머물다 원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었다. 습관처럼 비행기에 오르던 시절에는 바쁜 일상에 .. 2022. 9. 5.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이야기는 계속 된다 / feat. 연희동 청수당 공명, 예스24 굿즈 [대불호텔의 유령 - 강화길] 이야기는 계속 된다. 아빠, 어떤 게 할머니고 어떤 게 할아버지야? 아빠는 당신의 어머니, 아버지가 묻힌 쌍분 앞에서 코를 훔쳤다. 그리고 내 질문에 곧, 게가 아니고 어떤 쪽이라고 말해야제, 분도 괜찮고. 우리나라에서는 무덤 앞에서 보았을 때 남자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모신다. 하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얼마나 침묵이 흘렀을까. 아빠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디 그렇게 외우지 않아도 될거여. 잔디를 심은 지 꽤 됐는디. 어무니 쪽은 잔디가 길게 자라고, 아부지 쪽은 잔디가 짧게 자라는 거이 보이제. 두 분 머리 스타일 기억하냐? 나는 속으로 할아버지는 왼쪽, 할매는 오른쪽 하고 되뇌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신 분들의 머리 스타일이 봉분에 난 잔디의 길이랑.. 2022. 8. 27.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 북 리뷰, 북 에세이 feat. 월디페 2022 [기특한 나 - 천선란] 자신 눈물이 다 나네잉. 나래야 정말 잘했다이, 잘혔어. 아빠와 나는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 지르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수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고기를 굽고 있었고, 아빠와 나는 작은 방에 앉아서 같이 채점을 했다. 내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글자 그대로 극혐한다. 아니, 어떻게 아빠랑 수능 시험지를 채점해? 나는 20대가 되기 전까지 만해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에, 그게 왜 궁금하냐? 또는 그것도 생각이냐? 하는 날카로운 반문 대신, 음. 나는 아빠! 라고 대답하는 부류의 딸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아빠랑 껴안고 뽀뽀할 수 있고, 주말이면 아빠 팔을 베고 누워 낮잠 자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아빠와 나는 가장 친한..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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