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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비가 오니까 너도 오는구나. 이별 후에 유독 새벽이 길어졌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편인데, 베개에 불면이 숨어 있었는지 박명 사이로 자꾸 뒤척임이 스민다. 지난밤 꿈에는 너의 모습이 말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와 까만 밤과 새벽 틈 사이에서 눈을 떴다. 투두둑, 발코니 철제 난간에 정신없이 빗방울이 내려 춤추고 있었다. 너와 나란히 앉아 이별을 말할 때 함께 보았던 하늘에 걸린 회색 장막에, 삼천 개의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날 차마 내리지 못했던 그것들이 빗방울이 되어 펼친 손위로 나렸다. 처마 끝에 매달려 나리는 빗속으로 오목하게 손바닥을 반쯤 쥐고, 목놓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도 너의 맘대로 꿈속에 왔듯이. 내 맘대로. 주책맞게도 빗방울 소리를 손에 담.. 2022. 7. 19.
[칵테일, 러브, 좀비 - 조예은] 빨간약과 파란약 [칵테일, 러브, 좀비 - 조예은] 빨간약과 파란약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갈 당신 앞에 알약 두 알이 놓여 있다. 신이 어리둥절해 하는 당신에게 알약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파란 약을 삼키면 확고부동한 운명을 타고 나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라도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된다. 빨간 약을 삼키면 행위에 따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신은 늘 친절하지만은 않아서 복잡한 이 선택의 이면에 있을 상황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의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현재 네오의 삶은 노예의 그것과 같으며, 다만 빨간약을 먹으면 진실에 가닿을 수 있다고 이야기할 뿐, 거대한 진실에 대하여 다른 어떤 힌트도 제공하지 않는다. 신도 모피어스처럼 정보 제공에 박하다. 네오는 단숨에 빨간약을 선택하.. 2022. 7. 14.
[토르: 러브 앤 썬더] 신은 죽지 않았다. / 쿠키 2개, 영화 리뷰, 후기 [토르: 러브 앤 썬더] 신은 죽지 않았다. 믿음은 순전히 믿음을 행위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믿음(믿을 신 信)은 인편(사람 인 亻)에 맡겨 말씀(말씀 언 言)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 서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이 편지가 담고 있는 정보(말씀)를 신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면서 믿음에까지 그 의미를 확장하게 되었다. 정보는 독해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쓰여지지만, 텍스트 특성상 실시간으로 변하는 독해자의 생각에 맞춰 대응, 설득할 수는 없고, 따라서 독자는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에 따라 정보가 사실인지 판별하고, 그것을 믿을지 여부를 결정할 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순전히 믿음을 결정한 자의 책임이자,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마치 사랑처럼. 따라서 배신감(背信感)은 신뢰를 준 사람.. 2022. 7. 7.
[헤어질 결심 - 박찬욱] 무너지고 깨어짐의 시작. 그리고 끝. [헤어질 결심 - 박찬욱] 무너지고 깨어짐의 시작. 그리고 끝. 시작하기 전에. 작품에 대한 강력한 스포가 들어있습니다. 감상 후 적은 글의 양이 워낙 많아 정리에 시간도 걸렸고, 여기에 영화 유튜버 영민하다 님과의 네시간여의 대화가 더해져 양이 더 방대해졌습니다. 적다보니 완벽하게 구성,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작품의 핵심과 닮았다 싶게도. 미완결인 상태로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는데, 그것은 다른 포스팅에서 계속 됩니다. ~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는 내용의 DM들에 제 나름대로 생각을 전하고 또 받으면서 했던 생각들은 따로 정리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오래걸릴 것이야 살다보면 최선을 다해도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열정이 .. 2022. 7. 5.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의 의미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의 의미 '식구'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족(家族)은 뿌리를 같이하는 친족, 특히 혈연 관계에 있는 이들을 묶어 부를 때 쓰고, 가정(家庭)은 혈연, 혼인으로 성립된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 자체 혹은 그들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부를 때 쓴다. 때문에 내가 속한 가족이나 앞으로 이룰 가정에 속하는 이들은 아닌, 그러나 친밀한 관계를 맺어 집단을 이룬 이들을 지칭할때, 가족과 가정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적확하지 않다는 감각이 있다. 반면 음식을 나눠 먹는 입들이 모인 모임, 그 특별함을 말하는 단어 '식구(食口)'에는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누군가와의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함의 되어 있다. 그럼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작품을 통해 그리기 즐기곤 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 2022. 6. 28.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 황보름] 엉망이어도. 봄날의 곰만큼.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 황보름] 엉망이어도. 봄날의 곰만큼. 2020년 12월. 많이 아팠다. 하루 중에 울지 않을 때가 없었다. 부장님이 자리를 지날 때마다 말했다. 설프로, 힘들면 퇴근해. 쉬어도 괜찮아. 어디 많이 안 좋은 것은 아니지? 어머니는 괜찮으신거지? 매번 고갯짓으로 대답하는데도 그는 근성 좋게 눈물 흘리는 직원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9월, 몇 년 간 골치였던 위에서 뭔가가 발견 됐다고 엄마에게 전화하자, 엄마는 즉각 삼성병원으로 달려 왔다. 암센터 앞에서 엄마는 멈춰섰다. 너 암이야? 아니, 나는 암 아니고, 암 걸린 것도 아니야. 그런데 엄마 종양은 암센터에서만 제거할 수 있대. 2개월 간 가족 전부가 이 거짓말 작전에 투입 되었고, 배신감에 몸을 떨던 엄마는 결국 고집.. 202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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