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197

[밤으로의 긴 여로(Long Day's Journey into Night) - 유진 오닐] 무적(霧滴) 속, 무적(霧笛). [밤으로의 긴 여로 - 유진 오닐] 무적(霧滴) 속, 무적(霧笛). Long Day's Journey into Night 엄마가 동생이 한 명 더 태어날 거라고 예고한 날을 잊지 못한다. 당시 엄마 나이로서는 이미 노산이었던 데다가, 그로부터 2년 전 쯤 임신 후 안정기에 들어섰을 때 갑작스러운 유산을 겪은 적이 있어서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동생을 기다리던 나와 루나에게도 그 일은 일생일대의 충격이었다. 엄마가 병원으로 실려갔을 때 하필 아빠가 출장 중이어서 내가 보호자로 병원을 따라갔었다. 속절 없이 무너지는 엄마 곁을 지키면서 다시는 동생 생길 일이 없겠구나 생각했었는데, 그런 일을 겪고도 동생이 태어난다니 믿기 어려웠다. 지금은 두 분이 의 60대 한국인 편을 찍고 있지만, 그때는 부모님의 애정.. 2022. 8. 9.
[가꾸는 이의 즐거움 - 이유리] 행운목처럼 [가꾸는 이의 즐거움 - 이유리] 행운목처럼 행운목에 꽃이 피면 좋은 일이 생긴대. 행운이 와서 행운목이라는 거지. 거실 한복판에서 행운목이 하얀 꽃을 여물렸다. 죽은 듯이 가만히 서있던 행운목이, 갈색 줄기 속에서 남몰래 키워 온 펄떡거리는 생명을 세상에 여봐란 듯이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예닐곱 살쯤 됐었던 그 해,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었을 여러 이야기들 중에 무엇이 행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저 작은 나무토막 같던 시절부터 몇 년을 공들여 키운 행운목이 드디어 꽃을 피우자 엄마 얼굴도 그 하얀 꽃처럼 화사하게 빛났던 장면만은 어제 일처럼 선연하다. 그때는 엄마가 화분을 들여다보고 그 여린 잎들을 보살피며 식물을 키우고 가꾸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과 같다고, 나래와 루나를 키우.. 2022. 8. 6.
[파이트 클럽 - 데이비드 핀처] 송사리 튀김 [파이트 클럽 - 데이비드 핀처] 송사리 튀김 여기 뭐 해장국 맛집이야? 아니 일단 가봐야 돼. 가봐야 알아. 껍데기 맛집이야. 뭔 소리여 이게.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신촌에서 보기로 했더니 둘 다 삶에 찌들었는지, 만나서 갈만한 식당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신촌 인근의 유일한 술집이자, 익히 아는 맛을 새롭게 내서 사랑에 마지않는 대전 해장국 링크를 보냈다. 운 좋게도 후덥지근함을 뚫고 낮술을 즐기러 온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K와 연애 초기에 여기서 M오빠랑 진탕 술 마시고, 목포까지 KTX 타고 밤을 뚫고 달렸었다. 이 귀찮은 거 싫어하고 끝까지 술 먹기 좋아하는 내가. 참, 여기 K랑 같이 온 적도 있었는데, 걔도 너처럼, 해장국 맛집이야? 아재는 국밥을 사랑.. 2022. 8. 5.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 7편 - 김초엽] 모호의 명확성에 대하여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등 7편 - 김초엽] 모호의 명확성에 대하여 주변의 모든 이를, 심지어 떠나가고 떠나온 이들까지 사랑하지만, 특히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며칠 전 날짜가 바뀌는 새벽의 틈에 지금 당신의 마음을 얘기해 주세요. 하고 카톡이 왔다. 종종 삶과 관계, 사랑과 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단골 바 겸 식당 사장님이었다. 어쩐지 마음이 짓궂어져서 일기를 찍어 보냈다. 작은 방에 에어컨을 켜면 삽시간에 사방이 얼어붙는다. 책장 위에 다닥다닥 붙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책들의 표피에도 오도도 소름이 돋는다. 아 비로소 여름이구나. 이기적인 인간은 생각한다. 유치한 일기를 찍은 성의 없는 사진으로 답변을 대신하자, 그가 오늘은 슬픔에 잠기는 날이라고 고백했다. 사랑은 양.. 2022. 8. 2.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의 터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 - 시몬 드 보부아르] 자유의 터 엄마는 이십오 년 동안 전업주부였다. 외 증조할아버지는 선비이자 지역에서 마지막 남은 서당의 훈장님이었고, 외할아버지는 공무원이자 부동산 투자에 탁월한 안목을 지닌 분이었다. 물론 엄마는 그 시절 여느 가정에서 흔했던 풍경처럼, 외삼촌과 세 명의 여동생들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했지만, 당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서울에서 잠시 일했던 순간을 빼고는 생계를 위해서 일해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스물 일곱이 되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교육을 갔다가, 어깨에 빵과 우유가 가득 든 상자를 짊어지고 선배들에게 그을린 팔을 내밀며 척척 간식을 배분하는 청년을 보았다. 얼굴이 낯 익어 청년에게 혹시 자네 나를 아는가. 했더니 청년이 학창 시절에.. 2022. 7. 29.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 김초엽] 해변 끝의 카프카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 김초엽] 해변 끝의 카프카 야이. 너 이 xx oo 완전 꼰꼰대네. 아 선배님, 저 꼰꼰대는 맞는데요. 후배한테 xx, oo이 뭐예요? 교양 없게. 아니 그리고 그 xx가 남자 선배랑 여자 선배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이 문제지, 내가 선배라고 무조건 대우해달라는 것이 아니라니까? 나보다 나이 많아도 후배니까 무조건 군기 잡겠다. 뭐 그런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내 눈을 빤히 보더니. 많이 세졌네. 막둥이 놈이. 하면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웃을 문제가 아니라면서 샐쭉이다가 그를 따라 웃었다. 내가 권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진정한 꼰대라면, 그에게 대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후배에게는 권위적으로 행동하고 선배에게는 대드는 내로남불형 인간이거나. 후자.. 2022. 7. 2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