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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 - 에피] 민들레와 담배 / 에피 작가님께서 우수 리뷰로 선정해주신 바로 그 리뷰!

by 헌책방 2022. 10. 1.

[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 - 에피] 민들레와 담배
 

비가 부스스 쏟아지던 날이었다.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버스에 올라 급히 서울을 떠나며, 내가 아는 당신의 인생을 반추했다. 엄마는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자주 이야기했다. 할아버지가 40년 가까이 공무원으로 재직하시며 오토바이로 출퇴근 하셨던 것, 까맣고 멋있는 오토바이 뒤에 수박, 참외, 참조기, 같은 것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집으로 오셨던 것, 그러다 수박이 톡 도로에 떨어져 쪼개어져 버리면 그것을 노끈으로 동여매 아무렇지 않은 척 부엌에 가져다 두셨던 것, 매일 새까만 머리에 포마드를 얹어 한쪽으로 가지런히 빗고 정리하셨던 것. 나는 직접 보지도 못 했던 것들이 생생히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고 수다쟁이 엄마를 생각하며, 하마터면 웃을 뻔 했다. 할아버지는 RCY라던가, 청소년들이 관공서에서 받는 교육 프로그램을 담당하다가 아빠를 처음 봤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다른 집단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낯익은 얼굴의 청년을 보았다. 자네, 공무원이 됐는가. 네, 맞습니다. 결혼은 했는가? 아직입니다. 할아버지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참한 규수'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방에 당신의 딸을 데리고 나오셨다. 몇 년 후 엄마와 어린 나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민들레를 캐고 있었다. 민들레 달인 약이 그렇게 암에 좋다고 했다. 평생 담배를 입에 물고 살던 당신은 폐암을 진단 받으셨다. 당신은 담배 대신 민들레를 비롯한 약초들로 달인 약을 입에 달고 살게 됐다. 약초들 덕분인지, 할아버지는 양쪽 폐를 각각 반 넘게 절제하는 대수술을 받으시고도 20년 가까이 건강하게 생활하셨다.


   

오래 편찮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삶은 성공적이었다. 아이들의 존경을 받았고, 당신의 커리어도 좋았다. 당신의 삶은 <스토너>의 윌리엄 스토너 교수의 삶과 비슷했다. 죽음을 향해 한 발씩 내디뎠던 할아버지와 속절 없이 무위를 향해 나아갔던 스토너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야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했나? 를 반복하며 자문하는 모습마저도 그렇다. 그들이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내는 동안,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켜보는 이를 더없이 안타깝게 한다. 물론 결국엔 죽음으로 인해 삶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이, 무상함으로 남게 됨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묵묵히 오늘을 살고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에서 내 안타까움과 아쉬움은 성급하다. 그래도 조금 더 일찍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를 물었다면, 할아버지의 죽음 앞에 딸들이 조금 덜 울었을지도 모른다. 에피의 <낙타의 관절은 두 번 꺾인다>를 읽으면서 외할아버지와 스토너를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피는 28살에 유방암 판정을 받고, 평범한 20대 후반 현대인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바꿀 수 없는 날씨에 슬퍼하기보다 차라리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튼튼한 우산을 들고 나가겠다고 마음 먹고, 세상과 얼마간의 시차가 나더라도 자신만의 시간을 걸어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사람과 달리 두 번 꺾이는 낙타의 다리 관절처럼 작지만 직접 봐야 찾을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찾아내며 작은 것부터 변화하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단단한 고정관념을 깨고 싶어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살아남는 것 이상. 삶이라는 긴 여행을 그렇게 살기 위해서, 그녀는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환자가 아니라 자신으로 살고 싶어 하며, 그래서 자신이 누군지 알기 위해서, 호르몬제를 단단히 챙겨 여행 가방을 꾸린다. 때로는 강인하고 질기게 엮인 역사와 그에 상응하는 오래 되고 단단한 지혜 보다 바람 불면 기꺼이 그에 몸을 맡기는 유연함과 유쾌하고 둥그런 긍정이, 삶의 파고에 더 덤덤하고 자신답게 대처한다. 그리고 폭풍이 휩쓸고 떠난 후 엉망이 되어버린 바다 위에 홀로 남았을 때, 유연하고 유쾌하고 둥그런 에피 호가 이미 오랜 세월을 항해한 스토너 호보다 더 오래 항해할 수 있다. 파도가 남기고 간 깨달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마르지 않는 연료가 되고, 다른 폭풍이 올 때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알을 깨고 압락사스 앞으로 날아가는 작은 새가 된다.
   

본작은 어떤 작은 별은 술주정뱅이가 살고, 어떤 작은 별은 끝없이 자신이 소유한 별을 세느라 삶을 잡아먹힌 사업가가 살고, 어떤 작은 별에는 지혜로운 사막 여우가 사는, 결국엔 평범한 작은 별들이지만 우주의 심연을 지나 누군가의 망막에는 잊히지 않는 반짝임으로 닿기 마련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증명한다. 동화처럼 쓰였지만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 <어린 왕자>처럼, 본작 또한 쉽게 읽히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인덱스로 표시해 놓은 한두 줄 분량의 짧은 몇 문장들은 모토로 삼아도 좋을 만큼 인상 깊다. 볕에 반짝이는 사막의 모래 알갱이들 사이로 핀 꽃 한 송이처럼, 전반적으로 따스하고 잔잔하게 반짝이는 글 사이로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글귀들이 예쁜 고개를 내민다. 작가 에피가 정성스럽게 써내려 갔을 글과 사진은 꾸밈 없이 투박하고, 그래서 평범하다. 그러나 따스하게 반짝인다. 에피가 보낸 삶의 일부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특수한 모습이었지만, 그녀가 그 시간을 통과하고 남긴 글들은 투박하고 평범하다는 것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삶은, 시간은, 그 모양과 색깔과 촉감을 삶의 주인이 어떻게 살아내고 생각하느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녀의 글은 보통 사람들과의 삶과 닮아 있는 보통의 것이라 우주의 심연을 건너 온 작은 별빛 보다 더 선명히, 가까이에서 빛난다. 마치 반딧불이처럼. 


  

스토너가 흐릿해지는 사위에 갇혀서도, 나는 무엇을 원했던가? 나는 누구인가? 를 자문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의 삶 내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존을 이룩하고, 또 잃음을 반복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토너는, 외할아버지는 영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패배자도 아니었다. 위대한 의미를 지향하지 않았지만 작은 선택 하나도 신중히 행하고, 그런 선택들이 모여 결국 자신의 삶을 자신의 뜻대로 일구게 되었으며, 삶의 항로를 타인의 시선과 상관 없이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승리자고 자아와 합일에 이르는 데에 성공한 사람들이다. 인생은 자아와의 합일을 위한 거대한 과정이다. 무(無)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살기를 멈추지 않고, 주변의 훼방에도 아랑곳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침착함과 무심한 노력들, 그것들이 모여 귀결시킨 그들 인생의 결말은 성공적이고 아름다웠다. 아마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답하기 위하여 여행하는 에피 또한 그녀의 삶의 당당한 승리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차기작이 세상에 나온다면 꼭 읽고 싶은 이유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아니, 어떤 인생의 밖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그 원근과 관계 없이, 그 인생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판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에피의 아픔도, 홀로 서있을 스토너의 묘비도, 외할아버지를 비롯한 그 누군가의 어떤 삶도. 함부로 비극이라 부르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안타까워하지 않겠다고, 그저 다를 뿐이라고 받아들이겠다고.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될 나날들 속에서도 묵묵하게 전진하는 몸짓들을 응원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나 또한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보는 사람이기를 멈추지 않겠다고.


   

외할아버지는 엄격하고, 보수적이고, 철저히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을 가지고 계셨다. 그 때문인지 딸들은 성실히 병수발을 들면서도 자주 냉담했다. 할머니가 밭으로, 경로당으로 나간다고 자리를 비우시면, 당신은 홀로 방에 앉아 계셨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외로우셨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인생의 끝자락에서야, 할아버지는 백두산으로, 영국으로,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떠나셨다. 당시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여행을 많이 걱정했고 만류했지만, 당신께서는 지금 아니면 안된다는 강력한 한마디를 무기 삼아 매번 만류를 무릅쓰고 떠나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할아버지는 에피가 여행을 떠났을 때와 비슷한 마음으로 캐리어를 싸고 세계로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 인생의 거의 마지막 즈음에 할아버지를 둘러싼 풍경은, 내가 그 전에 알던 당신의 그것과는 달랐다. 첫째 딸이 40대 중반에 셋째 딸을 낳아도, 딸이든 아들이든 장한 일 했다며 수고했다고 등을 두드리셨다. 외손녀들에게 이런 저런 말을 걸기 시작하셨다. 코 끝에 안경을 걸치고 신문과 책을 읽고, 치료 일정을 직접 관리하며 의료진에 적극 협력하셨다. 할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하셨다. 하루라도, 더 살기를 원하셨다. 남은 가족들에게는 그것이 다행스럽고도 마음 아픈 일들이었지만, 마지막 순간들 앞에서 당신이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하고 묻고, 그 원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셨던 것에 대하여 나는 안도한다. 당신의 자식들과 그들의 배우자들, 손주들은, 당신의 죽음을 가여워했고 당신이 이루길 원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들, 뼈아픈 패배들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또 슬퍼했다. 그러나 이제서야 그는 삶이라는 긴 투쟁에서 승리한 사람이고, 나는 무엇을 원했고, 원했던 것이 어떤 점이 잘못되었으며,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고, 그래서 마지막 순간 또 무엇을 원하는가, 에 대답하는 데에 성공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성묘를 갈 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잔디가 무성한 당신의 봉분 앞에 타다만 담배 한 개비를 발견한다. 외삼촌이 금연이라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깨고, 아버지를 찾을 때마다 한 개비를 아버지와 나눠 피운 흔적일 것이다. 가끔은 나도 할아버지와 담배 한 개비를 나누어 피고 싶다. 당신의 승리를 축하하고 싶다. 당신의 무릎 위에 머리를 괴고, 에피 같은 마음으로 당신도 여행을 떠났었는지, 여행을 떠나서 무엇을 봤는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어떤 여행지가 가장 가슴에 남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엄마와 내가 당신을 위해 캤던 민들레처럼 노랗고 말갛게 웃고 싶다. 담배연기 품은 숨 끝에 민들레 씨앗을 멀리 묶어 보내고 싶다. 가이내가 무슨 담배냐고 호통 치시겠으나, 아마 할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은 아직도. 그 성공 끝에 베어 무는 한 개비일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받아 읽은 작품입니다 :) 인스타그램 아이디 : killzzang님 너무너무 감사드려요!

그리고 이 이벤트에 당첨 돼서 본 리뷰를 이벤트 주최자 소운님과 작가 에피님께 제출했는데

두구두구두구두굳구두구두구두구두구

제 리뷰가 우수리뷰에 선정 됐습니다 :) 와아아아아아아

작가님께서 리뷰 맘에 들어해주시는 것이 독자 입장에서 정말 엄청난 감동이었어요ㅠ.ㅠ

 

이벤트 진행하신 소운님께서 작가 에피님과의 회의를 통해 카드뉴스까지 만들어주셨습니다ㅠ.ㅠ

감동의 광광...;ㅁ;

풀버전은 소운님의 인스타그램을 참고해주세요

https://www.instagram.com/p/CjIII9BrXNq/?igshid=NmY1MzVkODY=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www.instagram.com/seol_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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