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혼자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나의 눈은 엄마를 닮았다.
나의 눈은 아빠를 닮았다. 00연수원 수료식 날, 새로운 길을 걷게 된 아이들의 첫걸음을 축하하고자 많은 어머니, 아버지들이 연수원을 찾았다. 온라인 사전 연수 기간에 미국으로 갑작스럽고도 긴 여행을 떠나버리는 바람에 벌점이 생겼었고, 어떤 직업적 사명감이나 조직에 대한 애착 없이 순전히 이 벌점을 벌충하려고 반장역할을 자청했지만, 막상 두 달이라는 긴 시간동안 동기들과 동고동락하고나니 수료식 날은 온통 눈물이었다.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 자신의 실존에 몰입하다보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을 얼굴들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우리 엄마, 우리 아빠 좀 찾아줘." 했더니, 동갑내기 동기 한명이 정말 엄마 아빠를 모시고 왔다. 훗날 수많은 엄마, 아빠들 틈에서 어떻게 엄마, 아빠를 찾아냈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너랑 정말 똑같이 생겼더라." 했다. 동그랗고 큰 눈, 촘촘하고 긴 속눈썹, 유일하게 내 얼굴에서 자랑할만 한 나의 눈은 엄마를 닮았고, 주먹코, 동글동글한 얼굴형도 엄마를 닮았다. 아빠를 닮은 모양이라고는 얼굴색과 세모모양의 작은 입술 뿐인데, 신통방통하게도 동기들은 엄마, 아빠와 차례로 악수를 하면서 예의상 어쩔 수 없이 "나래가 엄마를 닮아 예쁘네요." 하다가, 아빠를 보고는 "나래가 아빠를 꼭 닮았네요."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눈빛은 아빠를 닮았다.
당신은 한복에 새초롬하게 노란 빛으로 빛나는 호박을 달고, 소가 먹을 여물을 썰고, 볕바라기를 하고 있으면 할아부지 머리 까까머리라며 당신의 머리를 짚고 빙빙도는, 막내 아들이 낳아다 준 버릇 없는 늦손주들을 깊이 아끼고 사랑하셨다. 내가 사리를 분별할 줄 알게 된 어느 날, 나는 그것이 비단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 영혼이 새까맣게 타버려 바람결에 날아가버렸기 때문임을 알게되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작은 두메 산골 마을에서도 차례로 젊은 청년들과 처녀들을 징발해갔다. 그는 전답을 모두 팔아, 우는 누이 둘을 모두 시집 보내고, 남은 돈을 챙겨 만주로 떠났다. 그는 오직 살고자 했으며, 살 길을 트자 비로소 뜻을 찾았다. 그 뜻 끝에 보상과 위로가 달려있지는 않았지만, 삶은 계속 되었다. 딸을 시작으로 아들을 셋이나 낳고도, 느즈막히 아들이 하나 더 생겼다. 그의 실존은 생존과 동의어였고, 가장이 짊어진 무게는 점차로 막대해졌다. 그는 바구니에 담겨 언제 터질지 모르면서 부풀려지는 풍선 같았다. 전쟁통, 방금 막내 아들을 낳고,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농사를 짓는 일 밖에 없었던 그는 제비새끼들처럼 자신을 바라보며 까악거리는 아이들과 가냘픈 아내를 바라보며, 시시각각 망가져갔다. 돈이 없으니 누군가는 공부를 포기해야하는 흔한 신파 드라마가 집에 깃들었고, 막둥이의 국민학교 등교를 막는 완강한 남편을 피해 아내는, 새벽마다 막내 아들의 신발을 품에 안고 뎁혀, 비몽사몽인 아이를 깨워 학교를 보냈다. 아내가 의견을 따라주지 않자 남편은 아내의 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비규환. 아이들의 눈은 날카롭고 차가워졌다. 오로지 이 부조리를 깨고 나가는 것, 아버지의 그늘 밖에서 자신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아이들의 목표가 되었다. 스스로의 존재 의미는 그 뒤에나 골몰할 일이었다. 어느덧 아이들의 삶은 아버지의 그것을 닮아갔다.
실존(實存). 어감도 까끌한 이 말은 실제로(實) 존재함(存), 인간이 본질에 앞서 존재함 그 자체,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인가'를 자문함으로써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를 설명할 때 의자와 인간의 비교가 많이 쓰인다. 여기 의자가 있다. 의자는 사람이나 의자를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앉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의자는 앉을 수 없음의 상태 직후부터는 의자의 본질을 상실하고 의자로 실존할 수 없게 된다. 여기 분수대가 있다. 사람들이 산책을 하다가 이 대리석 위에 철푸덕하고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분수대는 일반적인 의자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지만 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철푸덕의 순간 직후부터 분수대는 의자가 된다. 요컨대 사물은 존재의 목적, 본질을 부여 받고, 그로써 실존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은 실존하고, 세계에 현존하고, 생존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식을 터득한다. 선택으로 본인의 숙명을 결정하고, 선택에 따른 결과에 책임지며, 자초한 문제를 해결하면서 자신의 존재 이유, 본질을 얻고, 철학으로 삼는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투박한 방식이긴 했지만, 할아버지 당신이 낳았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 본질을 정립할 수 없고, 그에 따를 수도 없다고 형들에게 배웠고, 깨우쳤으며, 본질에 앞서 실존하고자 했다. 세계위에 자신의 실재를 인지하고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따로 선채로 어떻게 살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날카롭고 깊은 검은 눈동자를 딸들에게 물려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딸들의 본질을, 삶의 목적을 자신이 정함으로써 딸들에게 자신의 그것과 똑 닮은 눈빛을 물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어린 딸들을 실존주의자, 부조리에 저항하는 자들로 키워냈다. 삶은 거대한 모순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장 폴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하면서 페미니즘의 상징, 페미니스트들의 바이블과 같은 작품들을 써낸 작가로 유명하다. 1920년대 조선후기에, 파격적인 결혼 방식을 선택하며 경성을 뒤흔들었던 나혜석 화백에 견주면 그의 존재감을 실감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혜석 화백이 생애 전체를 걸고 이야기하였듯, 그녀는 여자, 아내, 어머니이기 전에 사람이었다. 하나의 독립한 인간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역시 사르트르의 아내이기 전에, 페미니스트이기 전에 인간이었고, 자신이 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고, 사르트르보다 더 대중에 가까운 언어로 풀어낸 실존주의자였다. 그녀는 <모든 사람은 혼자다>를 통하여 "존재의 사실성은 무상적"이며, 사람은 예견된 죽음을 앞두고 살고 있을지라도, 죽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행위 그 다음은? 이 목적 그 너머는? 을 반복해서 묻다가, 돌아와 쉬지, 하는 대답이야말로, 목적과 이유 없이 무상하게라는 방식이야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발걸음이야 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다시, 우리는 죽는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섬광처럼 사라질 것이나, 그 전에 생존하고, 실존하고, 오늘을 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에센스를 얻을 것이다. 순전히 스스로의 힘과 결정으로.
로우북스에서 추천해준 <모든 사람은 혼자다>는 매우 좋은 작품이지만, 사르트르의 저서에 비해 좀 더 명확한 문법을 선택하고 있을 뿐 상당한 집중력과 고통을 요한다. 구체적이고 현실에 가까운 예를 들어서 논의를 진행하지만 문단 끝에 놓인 물음표가 종종 물음표 앞뒤를 살피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우북스의 큐레이팅에 감사하고 감동을 느꼈던 것은 물음표 앞뒤를 확인하는 더딘 독해 속에서 독자는 실존주의를 그야말로 실천하게 되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능청스럽게도 물음표를 통해, 나는 무엇이고 이 물음표에는 어떻게 대답하는 인간인가를 자문하게 한다. 물음표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이 현존함을 느끼고, 현존에 질문을 던져 주체적으로 실존을 완성하도록 한다. 물음표에 어떻게 대답하여, 자신의 본질을 규정할지는 그 후에 나 있을 일이다.
언제 볕 따사로운 시간이 현존했었냐는듯이 어두캄캄해져버린 밤, 솨아아, 졸졸졸 같은 이따금의 소음 속에 앉아, 시린 엉덩이를 부비며 앉아, 그녀의 물음표를 되새김질 했다. 무엇의 이름으로? 나는 실존하고 있는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지, 시가 한대가 무척 그리웠다. 이제 날이 따뜻해 밤에도 하얀 숨결을 볼 수 없으니, 시가 한대면 충분히 숨결이 보일 것 같았다. 나의 눈빛은 아빠를 닮았다. 하지만 나의 눈은 엄마를 닮았다. 그 다음에는? 그리고 나서 아무것도 없더라도, 무상하게 세상을 사랑하는 엄마. 내일 생일! 참 좋은 계절이다. 연녹색의 새순이 물결을 이루고. 봄꽃이 만발하고. 생일축하해. 하고 어여쁜 이모티콘 세개를 붙이는 어머니. 엄마. 부조리 속에서, 폭력 속에서, 아픔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든 것에 자신이 정한 본질의 이름표를 다는 배우자 옆에서, 그녀는 꿋꿋했다. 다 큰 딸의 머리를 빗겨주며 "우리 딸 애기 때랑 똑같다." 하는 사람. 생각이 많아 터질 것 같은 딸의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그저 사는거야. 그 대신 니가 정하면서. 아빠 말에 너를 가두지 마. 그저 너는 너의 삶을 사는거야. 그 뒤에는 뜻이 따를거야. 니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를거다." 하는 사람. 60세. 4년차 청각장애인 지원센터를 다니는 직장인. 수화통역사에 도전하며 흰머리와 무슨 색깔로 염색한건지 보라색 머리칼이 가득한 머리로 환히 웃으며 "떨어질 것 같아. 그런데 또 보는거지. 괜찮아. 안되어도 하는거지. 재미있다! 밥 먹으러 가자." 하는 사람. 아마 그녀는 실존주의가 무엇인지, 자신이 지독한 실존주의자인지 평생을 모르고 살지도 모른다. 종종 신세를 한탄하는 자신의 눈에 순수와 얼마나 큰 꿈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지. 그러니 나의 눈빛은 아빠를, 나의 눈은 엄마를 닮았다. 시가가 피우고 싶다. 생각하며 나는 일어나 방에 들어와, 밤을 닫았다.
롯데 호텔 제주의 전경들. 좋은 책을 읽고 나름의 사유를 했던 곳이라, 잊지 못할 장소가 되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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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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