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여, 침을 뱉어라 - 김수영, @ 서촌 체부동잔치집 별관]
그대가 시라면, 침을 뱉어라.
4월이면 다들 꽃놀이를 가지만, 나는 그러지 못한다. 꽃놀이를 가려면 전국의 어디든으로 떠나 흙을 밟아야하는데, 흙을 밟으면 닿는 쇠붙이의 그 서늘함이 심장을 얼어 붙게 한다. 4월 16일. 8년전 나의 생일은 눈물이 채웠다. 차가운 바다에 슬픔이 가득 가라앉았다. 4월 3일.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피지 못한 꽃망울이 흐트러지던 날들이 있었다. 4월 19일. 개표 조작사건에 반발하며 부정선거 무효를 부르짖던 학생들과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켰고, 외침은 종종 몽둥이 아래 짓이겨졌다. 눈물 많은 나는 그래서 늘, 우연(偶然)히 꽃을 만날때야 그 아름다움을 구경할 수 있다. 씩씩하게 어제를 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많은 친구들 덕분에 실컷 그 달큰함을 구경할 수 있어 다행이다. 꽃을 보지 못하고 그 봄을 보냈던 이들에게 그 알록달록한 사진이 보내지고 있다고 믿는다. 떠난자들의 뷰파인더가 되지 못하는 것 또한 내 이기적인 연약함의 문제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주말에 받은 환대에 보답해서 전시회를 선물하고, 커피를 대접했고, 함께 환대 받았던 친구는 일을 갔다 돌아와 저녁을 샀다. 형님이 설렁탕이면 되어요. 해서 설렁탕을 먹으러 서촌에 갔다. 차로 서촌의 좁다란 길로 들어서는데 온 사방에 벚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여기는 도성의 서쪽, 서촌입니다. 하듯이. 바람에 맞춰 반가움의 인사가 흩날렸다. 주차한 곳에서 식당이 뒤섞여 있는 좁은 골목길까지 걸으면서 짧은 꽃놀이를 했다. 우연. 발음도 예쁜 이 말은, 배우자, 우수, 조우 같은 짝을 이루는 아름다운 말에 쓰이는 짝 우(偶)와, 이치에 맞고 마음에 맞는대로 이루어지고, 혹시 헤매더라도 자연스레 그리 된다는 뜻의 그러할 연(然)이 결합하여 로맨틱한 뜻을 빚는 단어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사람, 짝과 자연스레 만나 순리대로 이루어지는 인연이 되게 한 순간이, 그 찰나가 모두 '우연'인 셈이다. 시간이 지나서일까, 우연이 만든 사람들과 함께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내 삶에 시시때때로 나타나 순리로 이끄는 마법인 우연, 그 자체 때문이었을까. 우연히 마주한 벚꽃길에서 몇년 만에 꽃놀이의 즐거움을 느꼈다. 꽃을 노래하는 시집에 꽃잎을 갈무리하고 싶어서 남몰래 몇송이를 주워 가방에 담았다.
김수영 시인은 꽃 같은 얼굴을 한 글로, 매서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눈>
김수영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그는 뜻을 꿰어 글을 잣는 모든 시인들에게 말한다. 기침을 하라. 가래라도 뱉어라. 시에게 침을 뱉게 하라. 살아 있는 모든 시들에게 이야기한다. 시여, 침을 뱉어라. 그는 아무도 하지 못했던 말을. 그것을 뱉어야 한다고 고요히 울부짖었다. 펜으로 절절하게 호소했다. 한국에서 모더니즘 시가 자리잡아 꽃 피울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또 참여를 독려했던 시인 김수영은, 1960년 4월 19일 혁명 발발 이후 현실과 정치를 외면하지 않는 참여정신으로 시 뿐만 아니라 시평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며 활동했다.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 400번으로 <시여, 침을 뱉어라>를 필두로, 김수영 시인이 196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기고했던 시평론들을 모아 펴냈다. 때때로 평론에서도 모더니즘이 느껴지고,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냉소적이며, 불편한 생활양식, 예컨대 아내가 있는데도 새벽까지 사창가를 돌아다니며 섹스를 한다던가, 다소간의 폭력적인 행동 같은, 거부감을 주는 면모들 때문에 전체적으로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살지 못했던 혁명의 시대의 시들을 읽고, 또 따로 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가치가 무겁다. 무엇보다 그의 글들은 펜을 든 사람은 감성에 젖고 서글픔과 시름에 침잠하기 보다 그것을 뛰어 넘는 힘을 벼려 허리춤에 차야함을 외치며, 예술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60년의 세월을 넘어서도, 텍스트의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의 갈 길이 다채로워지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골목 초입에 체부동잔치집 별관이 있었다. 할아버지 한분이 홀로 해장국에 막거리를 한 병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예쁜 소녀 두명이 앉은 테이블에도 소주 두 병이 놓여 있고, 김수영처럼 심각한 얼굴을 한 여성분도 혼술을 하고 있었다. 우리 음식이 나오자 이윽고 5~60대로 보이는 등산객들이 떼로 몰려와 음식과 막걸리를 잔뜩 시키고 신나게 대화했다. 흩날리는 벚꽃으로 몽롱해진 내자동 거리의 집집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수많은 우연들이 그들을 짝(偶)지워 마땅히 걸어야할 4월의 꽃길 속을 걷도록, 그러하도록(然) 이끌었을 것이다. 나란한 테이블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알록달록 꽃 피워 앉은 모습에서, 가만히 오늘을 느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출 것인가. 번번이 부산하게 찢겨지고 흩날린다고해서. 우리는 물러날 수 없다.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 우연이 만들었을 연인들, 친구들이 벚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찍어주고, 뭐라뭐라 즐거이 떠드는 모습을 보면서. 어제에서 걸어 나와 오늘을 살고 내일로 걸어갈 이유를 찾았다. 우연히. 목소리가 닿는 모든 귀에 이야기하고 싶다. 바닥에 흩날리는 꽃잎을 바구니 한가득 담아 사방에 뿌리며 외치고 싶다. 꽃놀이를 떠나라고. 어제 떨어진 꽃잎은 가장 사랑하는 시집에 살포시 끼워 넣고, 오늘을 걷고, 내일로 가자고. 눈물은 삼기고 어제를 넘을 힘을 모으자고. 지나치는 모든 이와 어깨동무라도 하고 손을 잡고 싶었다. 말하고 싶었다. 100년전 태어난 시인의 이름을 빌어, 그 외침을 빌어, 그 시를 빌어, 속으로 삼겼던 외침을 외치자. 펜으로 글을 잣자. 그대가 시라면, 침을 뱉자. 하고.
글에 등장하는 환대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 글을 읽어주세요.
2022.04.13 - [놀러갔다] - [그랜드 머큐어 앰배서더 호텔 앤 레지던스 서울 용산, 슈피리어 스위트] 환대(歡待)의 의미 / 럭셔리 호캉스 리뷰, 후기
그 맛이 기가 막히고 분위기도 좋았던 체부동 잔치집 별관
서촌의 풍경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
더불어 책, 영화, 드라마, 전시, 음악 등 각종 문화생활을 더 풍부하게 즐기고 싶은 힙한 현대인 당신을 위한 큐레이션을
카카오뷰 채널 헌책방이 무료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채널 추가 해주시면 문화생활도 트렌디하지만 깊게 즐기는 데에 도움 되는 인사이트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 새벽에도 켈리최 회장님 유튜브에서 보내주는 동기부여 모닝콜 영상을 확인하고,
확언 다섯번 쓰기 챌린지를 실시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고, 저마다의 꿈을 저마다 목표한 속도대로, 꼭 이루시길 바라요.
나의 모든 행동은 되고자 하는 내 이상적인 모습에 힘을 실어줍니다.
Every action I take is a vote for the type of person I wish to become.
'책읽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든 사람은 혼자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나의 눈은 엄마를 닮았다. (0) | 2022.04.25 |
---|---|
[패싱 - 넬라 라슨] 무위의 번영, 닿지 못한 영화를 꿈꾸다. feat. 책캉스, 북캉스 in 롯데 호텔 제주 (0) | 2022.04.20 |
[소마 - 채사장, feat. 백년의 고독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킹스베이케이션 King's Vacation] 밤의 오목함에 한가득, 재즈가 고였다. (0) | 2022.04.14 |
[H마트에서 울다 - 미셸 자우너] 오래된 사유는 없지만 영원한 사유는 있다. / 처음으로 e북으로 완독한 작품! 책 후기, 북리뷰! (0) | 2022.04.06 |
[단순한 진심 - 조해진 feat. 호라이즌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단순한 진심과 가족의 의미 (0) | 2022.04.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