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 미셸 자우너] 오래된 사유는 없지만 영원한 사유는 있다.
내가 떠올리는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나는 뛰고 있다. 다섯살 쯤 되었을까. 아빠가 청자켓으로 루나를 둘둘 말아 껴안고 옆에서 달리고 있다. 회색빛 도는 연청자켓에 시뻘건 피가 철철 흐른다. 엄마는 울면서 넘어지면서 뛰고 있다. 루나는 고집 센 아이었고, 태생이 대장부였다. 홀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배운 후로는 도움 받아 계단 위를 오른 역사가 없는 아이였다. 그날 우리 가족은 단골 경양식 식당에 가고 있었다. 인기 많은 식당이라 아빠는 일찍 가서 자리를 잡았고, 엄마와 나와 루나는 느릿느릿 해실해실 웃으며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 장면을 떠올릴 때 늘 오르페우스의 비극을 생각한다. 계단 끝에 거의 다달아 달큰한 돈까스와 후추가 톡 쏘는 스프를 먹을 생각에 기뻐 돌아본 순간, 오르페우스의 에우리디케처럼, 루나가 공중을 뒤로 날고 있었다. 이어 엄마가 아빠를 소리 질러 부르고, 적극적인 시민의식을 대표하는 도시답게 길을 오가던 광주 사람들이 기민하게 대처했다. 한 청년이 뛰어 들어가 얼굴도 모르는 아빠를 찾아냈고, 엄마와 주변 사람들이 루나를 안아 터진 머리를 감쌌다. 가족을 계단에 두고 온 아빠는 뛰어 나와 돌처럼 굳어 있는 큰딸을 주워 옆구리에 끼고 혼비백산 핏방울을 좇아 내려갔다. 아빠는 큰 딸을 아내에게 맡기고, 둘째 딸을 감싸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딸을 안고 뛸 힘이 없어 손을 꼭 잡고 달렸다. 달리는 내내 주말 충장로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앞길을 터주었다. 한 청년 무리가 함께 뛰면서 아저씨 태워드릴까요? 하자 아빠는 울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뛰겠다고. 주차장으로 갈 시간이 없다고. 루나가 자꾸 눈을 허옇게 뒤집고 까무라쳤다. 새하얗게 질려 MRI 기계로 들어가는 루나를 보면서 동생이 죽은줄 알고 나는 크게 통곡했다. 사유(생각思, 생각할惟)는 흐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이유는 우리 뇌는 끊임 없이 생각하고 있고, 생각은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흘러 떠나가며, 3초에 1개씩 떠오르는 새로운 생각 모두를 우리 뇌에 저장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매일 밤 일기를 쓰고, 예전에 썼던 글이나 일기 한편을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 그러니까 매일 밤 화들짝 놀라고야 마는데,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그 이유다. 인간의 기억력은 기억해야할 것을 선별하고 그 안에서도 핵심적인 가치를 뽑아 저장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다. 그러나 신은 늘 공평해서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고, 촉감으로 닿아, 감각적으로 느낀 것만은 선별하지 않고도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물론 감각으로 남는 것도 대개 강렬하거나 중요한 것들이지만 유효기간과 범위는 사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다. 외가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했던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데 토끼 귀를 만졌을 때 가슬가슬하고 서늘한 감촉만은 생생하다던지, 엄마, 아빠, 루나와 동물원에 가서 생긴 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하마가 방구를 뀌어서 냄새가 온 동물원에 진동했던 순간, 치토스를 아그작 하고 씹었던 감촉, 루나의 눈을 들여다보면 어른거리던 나의 모습 같은 것들은 어렴풋하게 기억난다던지 하는 이유는 감각이 사유보다 우리 안에 더 오래 남기 때문이다. 어릴 때 어떤 것을 배우고, 누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거기에서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감각에서 오는 충격은 생생하다. 루나는 그 후로도 머리통이 많이 깨졌다. 그 사건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해들은 이야기들은 루나의 머리통이 깨졌다는 중요 사실만 남기고 디테일이 쉬이 잊혔다. 그러나 그 날, 충장로에서의 시뻘건 피냄새와 아릿한 죽음의 촉감, 루나의 최애 청자켓을 물들인 맹렬한 빨강만은 생생하다.
<H마트에서 울다>는 미각을 중심으로 모든 감각을 총동원하여 엄마와 엄마의 가족을 추억하는 여린 소녀의 회고록이다. 미셸은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다. 가족은 유진이라는 작은 시골 동네에서 그들 나름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계를 꾸린다. 그러나 아버지 말마따마 유전인 것인지, 지독한 사춘기가 미셸을 찾아오고, 그녀는 음악을 하겠다고 고향을 떠난다. 그녀는 어느날 저녁, 낯선 땅 뉴욕에서,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게 된다. 이윽고 딸은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끝내 떠나고, 남은 딸은 한인마트인 H마트, 한국 음식, 한국의 흔적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음식은 미각 뿐만 아니라 시각, 후각, 촉각, 통각을 동원해야하는 감상품이고, 식문화는 음식을 중심으로 역사, 시대상, 음식이 출현, 발전, 부흥한 시기에 흥행한 라이프스타일, 시대에 걸맞은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하는 태도라는 의미에서 패션까지, 함유하고 있는 바가 다양한 문화의 일종이다. 따라서 미각, 음식을 통해 엄마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녀와 자신이 엄마와 딸로 함께 했던 세월을 기억하고, 스스로를 위로 한 것은 매우 영리한 선택이다. 작품은 먼 타향에서 한국식 식문화를 이룩하도록 조력자이자, 모든 재료의 산실인, 늘 시끌벅적한 H마트를 경계인으로써 어머니와 자신이 안온함을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의 상징으로 삼아서 뿌리를 흔드는 깊은 상실 후에도 마트는, 세계는 나아가고, 우리 삶도 어제의 사랑의 감각을 원동력 삼아 시련을 딛고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엄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요리하는 행위 외에도 마트를 찾아가고, 그곳에서만 구할 수 있는 음식에 필요한 식재료를 구하고, 더 신선한 채소를 고르는 등의 행위들이 있음을 표현하여, 표면적으로 드러나 피부에 와닿는 감각 이면에 각자의 방식으로 행하는 사랑이 있으며, 사랑을 위해 기꺼이 감수하는 수고로움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기꺼이 행동으로 옮긴 사유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아쉽게도 구조적으로 작품이 균형 잡혀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고, 때문에 중반부에서 집중력에 위기를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은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한국인 혹은 한국에 대한 향수가 있는 독자에게도 유효한 옛 기억을 복원해내고, 무엇보다 소중한 기억을 보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고 유효한 감각은 사랑임을 증명한다. 이것만으로도 작품이 뉴욕 타임스 29주 이상 베스트셀러, 2021 뉴욕 타임스, 타임, 아마존, 굿리즈의 올해의 책, 버락 오바마 추천도서로 선정된 이유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사랑은 우리 삶에 가장 민감한 감각이자, 존재의 무게중심이므로.
오래된 감각은 있지만 오래된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떠나면서 감각을 가지고 떠난다. 한 평생 먹고, 마시고, 맛을 보고, 촉감을 느끼고, 향기를 맡고, 그 색깔을 머금으며 느낀 것은 바람에 흩날리고, 강물에 휩쓸리고, 나무가 된다. 그 후에는 우리가 있던 자리에 사유(思惟)가 남는다. 우리 안이 좁아서 다시 꺼내보고 어루만질 방법이 없어 낭떠러지의 모서리를 붙잡은 마음으로 써내려간 기록은 영원히 남는다. 우리를 터질듯하게 사로잡고 이내 곧 떠나간 생각들은 사실 자기네들끼리 은밀히 모여 세상을 조금씩 바꿔왔다. 여성은 투표를 하게 되었고, 백정이 천대 받던 시대는 지났으며, 부모에게 학대 받은 아이들은 기관의 감독 하에 가족을 떠날 수 있는 절차를 밟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래된 감각은 떠나고 영원한 생각만이 남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잠자던 사유가 존재가 떠나고 비어버린 공간을 아득히 채운다. 삶은 우리가 진정한 자아와 만나 서로를 인정하고, 화해하고, 합일에 이르는 긴 과정이다. 사유를 낳는 이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할만큼 신은 비정하지 않다. 그리하여 유한한 우리 존재는 오래된 감각과 내일이면 사라질 영원한 사유로 오늘을 산다. 비록 보이지 않더라도, 내 안에 오래 남지 못하더라도, 이 거닐음(蹓, 나는 늘 사유의 유가 거닐 유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이 모여 기록이 되고, 목소리가 되고, 행동이 되고, 피 토하는 외침이 되고, 내일 거닐을 오늘을 만들기 때문이다. 오래된 사유는 없지만 영원한 사유는 있다.
지극히 한국적인 음식 앞에서 종종 미셸 자우너의 작품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우연히 간 곳인데 ㄹㅇ 찐맛집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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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에도 켈리최 회장님 유튜브에서 보내주는 동기부여 모닝콜 영상을 확인하고,
확언 다섯번 쓰기 챌린지를 실시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고, 저마다의 꿈을 저마다 목표한 속도대로, 꼭 이루시길 바라요.
나는 자신과 타인을 모두 이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I am someone who benefits both myself and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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