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 사람들 - 제임스 조이스] 나는 더 이상 얕은 까망이 두렵지 않다.
거실에 누워 번쩍 눈을 떴다. 볼록한 내 배가 보이고, 그 너머로 거실 베란다 창문 멀리 산 꼭대기에 벌써 어둠이 걸리고 있었다. 밤은 위에서부터 온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었던 슈퍼 앞에 달린 샷다문처럼 드르륵하고 위에서부터 어둠이 내려와 세상이 그 속에 잠긴다. 엄마- 불러도 아무도 대답이 없고, 동생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기었다. 부딪히고, 울면서, 소리 지르면서, 사람들이 다니는 길가 쪽에 난 창문으로 기었다. 눈을 뜨면 산 머리에 그득한 어둠처럼 어둠이 위에서부터 나를 집어삼킬까 봐 오들오들 떨었다. 사과 트럭 아저씨가 빌라 앞에 왔는지 확성기에서 사과 팝니다- 사과- 소리가 나고, 겨우 창문에 매달려 엄마. 엄마 살려줘. 엄마 너무 무서워.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옆집 해정이 아줌마가 "아가, 나래야. 들어가. 엄마 오신다. 떨어질라. 눈 뜨고 들어가." 하면 창문 아래 쪼그려 앉아 엄마가 나를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눈을 꼭 감고도 느껴졌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사방을 마취시키며 내려앉는 어둠이. 화선지에 똑 떨어져 번져 가는 얕은 까망이. 물통에 알록달록 색깔이 천천히 퍼지면, 그 사이를 뚫고 순식간에 색깔을 먹어버리는 검음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해실 해실 웃으며, 나를 삼켜버릴 옅은 까망이. 얇은 눈꺼풀을 두드렸다. 내가 왔어. 나는 검정이야. 6살 난 딸아이를 재우고, 더 어린 딸아이를 안기도, 타박타박 걸리기도 하며 장 보러 나갔다가 돌아온 엄마는, 동그랗고 노랗게 방바닥에 번진 공포의 흔적을 지우며 말했다. "엄마야. 다시는 어디 가지 않을게. 나래 혼자 두고 안 갈게. 괜찮아. 아무도 해치지 않아."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은 산 꼭대기부터 물들이며 우르르 내려 달려오는 어둠을 닮았다. 그는 밤을 본따 만든 <더블린 사람들>을 불러 독자들을 폭력과 어둠으로 마취시키고 잠재웠으나, 끝내 그 마비에서 스스로 헤어 나와 아침을 맞도록 했다. 역설적이게도 '깸'은 더 깊은 '잠듦'이나 그에 준하는 상태의 끝에서 성립한다. 1800년대 중반, 영국의 제국주의는 아일랜드와의 정치적 대결에서 승리하고, 패자를 경제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한다. 사회, 정치, 종교, 문화, 어디 한 부분도 빠짐없이 아일랜드는 만성적인 패배의식에 잠식되고, 결핍으로 가득해진 더블린은 대영제국의 제2의 도시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생각은 관성이 세서 어둠에 한번 물들고 패배의식에 젖으면, 진창에서 빠져나오고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반복하게 된다. 국가적 패배는 점차 개개인의 삶에도 스며들고 빠른 속도로 이웃한 개인에게로도 번져나갔다. 사소한 좌절들이 서서히, 착실하게 꿈들을 상실시켜 나갔다. [애러비]에서 친구의 누나를 짝사랑하는 애러비는 그녀에게 바자에 가서 선물을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블린]에서 이블린은 남자 친구를 따라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떠나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작은 구름]의 시인을 꿈꾸던 리틀 챈들러는 학창 시절에 자신보다 훨씬 '못 나가던' 친구 갤러허가 영국에서 성공을 거두고 돌아온 것을 보고 시인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애러비와 이블린, 챈들러는 모두, 바자에 가긴 가지만, 여객선 부두까지 가지만, 갤러허와의 만남이 성사되어 자리에 나가 그를 집에 초대하기까지 하지만, 크고 작은 각자의 꿈을 이루는 것에 '거의' 실패하고 만다. 애러비는 자신의 실제적 보호자인 아저씨의 소심한 반대에 부딪혀 바자가 거의 끝나고 나서야 도착하고, 이블린은 여객선 부두에서 돌연 용기를 잃고 관성에 굴복하여 배에 오르지 않으며, 챈들러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 앞에서 현실에 굴복한 듯 꿈꾸는 것을 멈춘다. <더블린 사람들>은 바야흐로 실패의 시대, 상실의 시대를 살아내는 서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그 어두움이, 실패가, 국경을 넘어 삶의 한가운데, 한 가족의 식탁 중앙까지 침투하기에 이르렀음을 신랄한 방식으로 공표하고, 풍자한다. 작품 전반에 걸쳐 좌절과 실패의 과정은 물론, 폭언, 폭력, 음주, 학대, 가스 라이팅, 무기력, 굴복이 철저하게 폭로된다. 이 처절한 폭로가 제임스 조이스 특유의, 단편 작품이 서로 전혀 관련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환되는 구조와 맞물려, 끔찍한 간접체험의 축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 자극적인 상황들 앞에서 무감각해져버린 독자가 더 이상 상황을 끔찍하게 여기지도 않고, 나지막한 신음과 탄식도 없이 무감각하게 이야기를 대하기에 이른다. 제임스 조이스는 화자의 주관을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철저하게 객관적인 독해 환경을 조성해 독자가 예민하게 상황을 해석하고 고민하도록 유도하고, 부정확한 해석을 스스로 의심하여 회독수를 높여 반복적으로 책을 읽도록 구조를 설계했으며, 각각의 에피소드를 열린 결말로 끝맺어 그 여백이 상상력과 자기 해석에 대한 의심을 자극하게끔 한다. 그렇게 무감각하게 이 이야기를 대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지만, 독해에 전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의심하며 책장을 반복해서 넘기다 보면 어느 날, 돈이 얼마 남지 않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애러비처럼, 남자 친구를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블린처럼, 자신에게는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다는 점을 깨닫는 챈들러처럼, 이 건조한 이야기가 더없이 잔인하다는 감각이 독자를 깨우는 순간이 찾아온다. 추가 멈추는 순간. 이로써 <더블린 사람들>을 읽은 당대의 아일랜드인들 뿐만 아니라 후대의 현대인까지 모두에게, 부정적 의식의 관성 체계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배경에 저항하기 어려운 외부 상황이 존재하였더라도, 일부분이긴 하나 스스로 져야 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제임스 조이스의 단말마가 도달한다. 제임스 조이스 사후 70년, 아일랜드는 어둡고 추운 겨울을 지나 세계에서 가장 쿨하고 살기 좋은 작은 섬나라로 기억되게 됐다. 여전히 영어를 쓰는 인구가 가장 많지만, 아일랜드인들은 자신의 언어가 상실되지 않도록, 고유어를 지킨 사람들이 됐다. 나는 애러비는 자라 아이를 낳고 저녁 시간 바자에 가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이블린은 아버지의 학대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조국에 가정을 꾸리고 행복한 일가를 이루었고, 리틀 챈들러는 아이들의 좋은 아빠이자 훌륭한 시인으로 행복한 작품 활동을 했으리라고, 믿는다. 어느 날 홀연히 양쪽으로 쉼 없이 운동하는 추를 멈추고, 밖으로 나갔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그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의 아일랜드를 만들었다고 굳게 믿는다.
최근 들어 업로드하는 글의 특정 구절이 좋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고 있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나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나의 일부가 칭찬 받는 것이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러나 글은 쓰고 발행하는 순간 나를 떠난다. 조금만 생각하면 깨달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제임스 조이스가, 헤르만 헤세가, 밀란 쿤데라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글을 쓰고 책으로 만든 순간, 그 활자들이 그를 떠나 나에게로 왔듯이. 내가 그의 작품을 어떻게 독해하는지에 대하여 그가 참견할 수 없듯이. 그에게 제 생각이 맞나요? 정답이 뭐지요? 작가의 의도가 뭔가요? 하고, 물어볼 수 없듯이. 마음은 적어 편지로 보내는 순간 나를 떠난다. 나의 일부가 아닌 것이 된다. 생각이,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편지도, 읽는 사람이 이 주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런 이유에서 개인적으로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고, 이야기를 야물딱지게 매듭지지 않고 해석의 여지가 많은 열린 방식으로, 더블린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썼던 것 같다. 마침표를 찍고 원고를 묶으면서 그는 책상을 떠나 세상 밖으로 줄지어 걸어가는 활자들에게, 이 열린 이야기에게,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는 거울이 될 운명을 쥐어줬던 것 같다.
화선지에 떨어진 먹은 빨리 번져 주변을 검게 물들이고, 파레트 위에 놓인 까만 물감이 나란히 놓인 색깔을 야금야금 잡아먹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 멀리에서 다시 바라보면 떨어진 먹 한 방울은 글자를 이루는 획이나 점 하나일 때도, 검정이 존재해야 완성되는 작품도 많다. 까망이 두려워 울던 아이는 그 번짐과 조화로움이 되려 아름답다는 것을 배우게 됐다. 동이 터오는 먼 하늘 어둠을 어깨로 받치고 서서히 일어나는 새벽의 '인상(引上)', 그 조용한 기립을 바라보며, 순식간에 사위를 장악한 어둠이 서서히 꾸준히 터오는 밝음에 묻힌다는 사실을, 그 속도를, 그 모양을, 그 순환을, 꾸준함과 성실함의 승리를, 목도할 수 있음에 행복을 느끼게 됐다. 밤은 낮을 덮어 잠재우고 끝내 깨어지기 위해 땅에 내리는 슬픈 운명을 지닌 자장가다. 나는 더 이상 해가 지는 것이 무섭지 않다. 나는 더 이상 얕은 까망이 두렵지 않다.
범상치 않았던 그녀...
너무 평범하지 않았던 삶....ㅋㅋㅋㅋㅋㅋㅋㅋ저렇게 밝은 아이인데 또 혼자 있을 때는 그렇게 무섭다고 눈 감고 기어다녔다.
지나다 본 살구꽃. 벌써 만개하고, 떨어져 휘날리더군요. 행복한 봄 보내세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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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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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에도 켈리최 회장님 유튜브에서 보내주는 동기부여 모닝콜 영상을 확인하고,
확언 다섯 번 쓰기 챌린지를 실시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고, 저마다의 꿈을 저마다 목표한 속도대로, 꼭 이루시길 바라요.
나는 간단하고 작은 습관으로 큰 목표를 이루고 있습니다.
I achieve big goals by completing simple and small hab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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