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읽었다

[태고의 시간들 - 올가 토가르추크] 영원의 시간이 흐르는 강과 닿지 못한 마음들이 모이는 강 기슭 / 노벨문학상 수상작 북 리뷰, 독서 일기

by 헌책방 2022. 3. 24.

[태고의 시간들 - 올가 토가르추크] 영원의 시간이 흐르는 강과 닿지 못한 마음들이 모이는 강 기슭


그럴 때가 있다. 애써 꾹꾹 눌러 보낸 마음이 전혀 가닿지 않는 때. 말풍선 옆으로 작은 1은 사라졌지만, 내 마음은 영영 가닿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때가. 글씨들이 길게 줄지어 서있는 모양이 완전한 무위로 돌아가버리는 때가. 획이 해독되지 못한 채 공기 중을 뚜뚜- 정처 없이 가르는 때가. 종종 인간은 그런 애달픈 상황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속도 모르고 강은 흐른다. 저도 저의 배 밑에 무엇을 깔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묵묵히 자갈 위를, 부드러운 흙 위를, 하염 없이 걷는다. 강 가운데 깊은 곳에서는 돌을 지붕 삼아 눈 부신 햇살을 피해 새우잠 자는 물고기들이 자란다. 강가에는 수풀이 자라 강에 흐르는 것이 강 밖을, 강 밖에 사는 것들이 강 안쪽을, 서로 해하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쓰며 세찬 물줄기를 견디어 낸다. 강은 묵묵해서 오랜 세월 바위를 부수고, 자갈을 부수어, 곱디 고운 흙을 슬며시 강가로 떠밀어준다. 그 비옥한 땅위로 인간은 씨앗을 뿌리고 묘목은 강의 젖줄기를 입에 물고 쑥쑥 자란다. 그러니 강이 우리를 낳았다. 태고에 이 땅의 주인이 자연이었고, 그리하여 모두가 자연을 어머니라고 불렀을때부터 인간은 강을 닮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시간이 지나 인간이 어머니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게 되면서 조금씩 불행이 싹을 틔웠다. 강은 말없이 우직하게 흐르고 자비롭지만, 천년을 버틴 바위에는 미끄러운 이끼가 잔뜩 끼어있고, 푸르디 푸르른 용소 한가운데에는 하루에도 몇번씩 소용돌이가 친다. 누구를 닮았길래, 한 길 사람 속이 이렇게 복잡할 수 있나. 했더니만, 영락 없이 강을 닮았다. 납작한 조약돌을 들어 강 위에 뜀박질을 시켜도 강은 아무말이 없다. 어두컴컴한 속을 감춘 채 뙤약볕을 물살로 튕겨내며, 달빛만 내리는 깜깜한 밤에도, 그저 흐른다.


올가 토가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은 검은 강과 흰 강이 흐르고 두 강이 만나서 어우러지는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곳이 세상의 배꼽, 중심, 태고다. 검은 강과 흰 강이 만나 흐르는 곳에 위치하고, 아주 먼 옛날 새생명과 문명이 태동하던 시절을 가리키는 이 단어가 지명이 되면서, 흑과 백, 선과 악, 시간과 공간이, 좁은 한 사회에 '융합된 상태'로 배경으로 역할한다. 구분이 어렵고 경계가 모호한 '상태 자체'가 배경이 되는 것이다. 이 배경은 첫번째로, 1990년대 폴란드를 모델로 하는 이 이야기가 다양한 비현실적인 요소를 메타포로 활용하는데에 독자가 느낄 수 있는 거부감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두번째로, 인간은 끝끝내 완벽에 도달하지 못한 신이 만든 창조물이므로 신을 닮아 불완전하고, 결국 신이 태고에 겪었던 시행착오를 인간은 인간대로 겪을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이로써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완전히 균형잡힌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인간의 존재론적 숙명에 대한 고민을 도출하고, 불완전함의 정도에 구애 받지 않는 타인에 대한 이해라는 해답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한다. 

작가는 신화(특히 그리스로마신화)를 비롯한 여러가지 신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차용하여 작품을 구성했다. 작품은 신화 속의 신들과 신에 가까운 영웅들이 늘 평탄한 삶을 살아내는 것은 아니며, 찬탄 속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살지만 끝끝내는 고독에 몸부림치는 삶의 이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조명하여, 인간의 내재적 고독이나 삶의 곡선이 출렁 대는 것이 능력 부족에서 기인하거나 뛰어난 능력으로 극복 가능하는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또, 신과 영웅들 또한 절대적인 악도 아니고 절대적인 선도 아닌 중간자적 존재들이며, 따라서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 못하고, 누군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경계상의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이로써, 이 땅 위의 완벽에 가까운 어떤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설령 신이라도, 경계 위에 있지 않은 자가 없다는 소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작품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신을 비롯한 우주 만물을 통틀어서 절대적으로 '어떻다'고 정확히 정의 내려질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으며, 또한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어떻다'고 명명할 수 있는 존재 또한 세상에 없다는 점에서, '모든 타인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 존재가 설사 신적 존재더라도. 나보다 더 완벽해 보이는 존재라할지라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감명 깊게 읽은 독자라면, <태고의 시간들>도 잘 맞으리라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다. 인간이 갖는 존재론적 숙명에 대하여 마르케스가 조금 솔직하고 거칠게, 그리고 부계사회에 초점을 맞춰 가부장적으로 써내려갔다면 올가는 시적으로, 맨부커 수상자답게 서정적으로, 상대적으로 유하게, 세밀하게, 그리고 모계사회에 초점을 맞춰 써내려간다. 올가의 포스트페미니즘적인 성향이 이야기의 얼개 뿐 아니라 표현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출발점을 잘 잡아서였는지, 태고에서 시작된 이야기라서, 혹은 신화를 닮은 이야기라서 그런것이었는지, 올가는 부커상에 이어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태고의 시간들>은 또다른 신화가 되었다.

같은 말을 달리 적어보고, 포기했다가 마음 바꿔 한참을 애써보기도 하다가 생각했다. 이 마음이 완전한 무위 사이에 덮여 어느 쓸쓸한 태고의 강기슭에 묻혀도 어쩌면 괜찮을 것도 같다고. 태고의 시간에 에워 싸인채로 강바닥에 가라앉아, 다른 시간들 사이로 흐르는 해독되지 못한 마음들과 묵묵히 흐르는 세월 속에서, 차츰 부수어져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종종 인간과 인간의 마음은 그런 애달픈 순간을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 2021. 2. 22. 에 쓰고, 2022. 3. 23. 에 고쳐 쓰다.

* 불과 1년 사이에 뭐가 그렇게 변했는지 맘에 안드는 부분도 많지만, 완전히 바꿔쓰기는 아쉬워서 아주 조금 내용을 덧붙이고, 손 보는 정도로 고쳤다. 매일 밤 예전에 쓴 일기 하나씩 꺼내보는 습관이 있다(주로 몇 년 전 오늘). 일기 중에서도 독서 일기를 다시 꺼내볼 때, 생각이 많이 바뀌어 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

1. 포엣룸 다락방에서.

 

2. 맛있었던 커피.

 

3. 이 사진을 보면서 <태고의 시간들>을 다시 읽고 글을 꺼내 고쳐 써야지 생각했는데, 다음에 다시 읽을 때는 영 다른 글을 쓰고 싶다.

 

4. 파랑을 통과하고,

 

5. 하얀 해변을 거쳐,

 

6. 안식처로-

 

7. 들어오는 듯한 구조. 이런 생각을 반복하는 것 보면 지쳐있는 것도 같고, 그럼에도 다시 문을 밀고 나가는 것을 생각해보면 파랑을 즐기는 것도 같다.

 

8. 바람이 시를 다 쓸어갈까봐 문진 대신 무심히 책장 위에 올려 놓은 조약돌이 예쁘다. 

 

9. 탄수화물은 나의 힘!

 

 

[포엣룸 poet room] 창 밖은 시들이 물결 치고 지붕 위는 계절이 지나가는, 거센 파랑(波浪) 끄트머

[포엣룸 poet room] 창 밖은 시들이 물결 치고 지붕 위는 계절이 지나가는, 거센 파랑(波浪) 끄트머리, 하얀 해변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골목을 떠나는 겨울이 미련이 가득 담긴 발걸음

festivalsisters.tistory.com

포엣룸에 대한 리뷰

위치!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
더불어 책, 영화, 드라마, 전시, 음악 등 각종 문화생활을 더 풍부하게 즐기고 싶은 힙한 현대인 당신을 위한 큐레이션을
카카오뷰 채널 헌책방이 무료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헌책방

오늘, 당신에게 추천할 책과, 문화생활 이야기

pf.kakao.com


채널 추가 해주시면 문화생활도 트렌디하지만 깊게 즐기는 데에 도움 되는 인사이트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오늘 새벽에도 켈리최 회장님 유튜브에서 보내주는 동기부여 모닝콜 영상을 확인하고,
확언 다섯번 쓰기 챌린지를 실시했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하시고, 저마다의 꿈을 저마다 목표한 속도대로, 꼭 이루시길 바라요.

나는 나의 따뜻함과 유능함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사람들을 빛나게 합니다.
I prime others with my perfect blend of warmth and competence.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