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 밀란 쿤데라] 농담(濃淡) 있는 농담(弄談)들로 완성하는 농담(濃談)
내 삶은 진지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타인은 나를 늘 유쾌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고, 나의 인생은 심플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이다. 내 삶에 진지하게 임하는 것은 나로 충분하니까.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유년기 끄트머리에, 엄마와 영화 <어 퓨 굿맨>을 보았던 적이 있다. 초등학생이 보기에 상당히 잔인한 내용이었지만 등장 인물의 사연이나 표정 이면에 놓인 뉘앙스를 엄마가 마치 더빙 입히듯 설명해주셔서 무서움이나 두려움 보다는 슬픔을 느꼈다. 그때까지만해도 세상에는 엄마처럼 사람들의 생각에 깊이 눈 맞추는 사람, 아빠처럼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높이 들어 빙글 빙글 돌려주는 따뜻하고 재미있는 사람, "남생아 놀아라, 쫄래쫄래가 잘 논다." 하는 가사의 즐거운 노래를 가르치는 1학년 담임이셨던 할아버지 선생님, 서예를 가르치며 그 모양이 예쁘지 않더라도 그 안에는 마음이 담기기 마련이니까 다만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셨던 2학년 담임 선생님, 예쁜 얼굴로 나래의 선율에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씀해주시며 독일의 어떤 풍경을 이야기해주시던 피아노, 바이올린 교수님들처럼 관대한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어떤 억울한 일을 당해 누명을 쓰고 생존을 위협 받고, 가치를 절하 당하며, 실존의 의미를 제한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누명을 씌우는 사람, 나와는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존재의 가치를 무참히 짓밟는 사람, 누군가의 이름에 제멋대로 지은 의미를 겹쳐 적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 속에서 나오니 일상에서도 차별과 억울함 같은 날 선 칼날이 서로를, 자기 자신을 베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장래희망이 바뀌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그만두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그러니까 억울해하는 사람이 없고, 타인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응당 벌을 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각오로 책을 읽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고, 성모병원에서 귀 뒤에 난 커다란 종양을 발견하고 제거하면서부터 수험생활을 그만 두게 되었지만, 수술 받은 이듬해 운 좋게 시험에 합격했고, 10년간 들어가고 싶어했던 기관에 들어와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햇수로 8년동안, 주말에도 보고서를 어떻게 작성해야할지, 제도를 어떻게 개선해야 더 효율적일지 고민하는 삶을 살았다. 지난 주말, 나는 나와 내 동료들이 오래 꿈 꾸고, 몸바쳐 지킨 정의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지기들과 다섯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시고 알큰하게 얼굴에 열이 오른 채 K를 만났다. K는 "너 똑똑하고, 뭐든 잘하잖아. 최근에 다른 하고 싶은 일도 생겼잖아. 혹시 정말 니가 걱정하는 것처럼 정의가 무너지고, 세상이 망해도, 너는 안 망할거야. 넌 어디서든 잘 살 걸. 그럼 됐지." 했다. 3년째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고 있는 K가, 내 삶의 목적 중 하나, 내가 짧은 인생 중 반절을 쏟아 부은 가치가 무너지면서 느끼는 상실감과 모멸감,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꽤 큰 충격이었다. 와인을 따르는 K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었다. 끝내 마침 걸려온 따거의 전화를 받고, 말없이 괜찮냐고 묻는 그의 질문 끝에, 대답 대신 엉엉 우는 소리만 한참을 남겼다. 나는 늘 그렇게 진지하고, 깊이 생각하고, 크게 걱정한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흐른다. 누군가가 꿈꾸고,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가치가 희미해져도 시간은 상처가 회복되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잠이 도저히 올 것 같지 않아 쿨쩍이며 소파 위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골랐다. 마지막 순간까지 "너가 그런 일 겪었다고 잘못 없는 사람들 기분 상하게 한 것 빨리 사과해." 같은 말이나 남기고 헤어진, 집에 가서 발 뻗고 코를 골면서 자고 있을 K가 가장 친한 친구라는게 믿기지 않았다. 좀처럼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내가 "그런 사람도 없고, 내가 그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 했을거야. 그렇게 느꼈더라도 나는 사과 못해!" 해서 동그랗게 놀라버린 K의 두 눈을 떠올리니 조금 통쾌하기까지 했다. K는 매사에 유쾌하고-안타깝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큼 웃기지는 않다-, 삶을 심플하게 대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런 K를 생각하고, 조그만 소리로 상스럽게 욕하며, 읽고 있던 책을 꺼냈다. 와인도 한 병 따서 머그컵에 졸졸 따랐다. 공교롭게도 이 며칠 읽고 있었던 책은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쿤데라 미니 세션이 있어서 고등학교 때 줄줄이 읽고, 줄줄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지나간, 그의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했던 것이다. 읽었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다른 작품들보다 <농담>이 그의 작품관을 관통하는 측면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핑계 삼아 냉큼 민음사 판본을 사놨었다. 해학을 허락하지 않는 신념의 경직성 때문에 축출되는 루드비크의 운명과, 농담보다 우습고도 슬픈 현실 속에서 경직된 신념이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국가를 이루는 줄기에서 축출되는 조직과 구성원의 명운이, 가느다랗고 수줍은 선을 그으며 서로에게 다가가 묘하게 굵은 점을 찍으며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다 울고 나니, 조금씩 덜 울고, 조금 더 나아질 준비가 되었다. 무정하게도 시간은 멈춰주지 않는다. 정장을 차려 입은 토르소 위, 허공에 얼굴 대신 떠 있는 사과의 표정이 울다가, 웃었다. 실존은 무상한 것이다. 찌르르하게 그 문장이 유효한 것임을 느꼈다. 실존은 목적과 이유 없이 무상하게라는 방식으로 이룩 된다. 그리고 그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산다. 나아간다. 우리는 섬광처럼 짧게 존재하고 사라질 것이나, 그 찰나의 순간, 무위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아갈 것이다. 나는 나아가야 했다.
세상은 제각기 다른 농담(濃 짙을 농, 淡 맑을, 엷을 담)으로 쓰여진 농담(弄 놀, 즐길 농, 談 이야기, 말씀 담)들로 이루어져 있다. 삶은 팩트의 나열이 아니라, 사실과 사실에 대한 인정, 또 때로는 보다 고차원적인 이해와 해석이 뒤섞여 교차하는 지점들로 이루어진다. 단순한 진심은 이 담론이 진실임을 근거와 배경을 들어 설명하려는 장황한 방식의 진담에 실려서는 심장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더군다나 의사소통이 완전한 진담으로만 이루어지는 관계는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존재도 스스로에게 완전히 솔직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어떤 존재라도 자기 자신과 자신을 이루는 자아와 마음들을 정확히 알고 타인에게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는 측면에서, 완벽한 솔직함이나 완전한 진담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진담은 얼마간의 농담에 기대 걸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말로 완전히 재현하고, 표현하고, 증명하고, 설명해낼 수 없는 모든 진실은 메타포에 기대어 현현한다. 그러므로, 삶은 거대한 은유다. 생략과 상상력으로 완성하는 긴 소설이다. 우리 삶의 일부는 은유, 유쾌함과 농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해치지 않은 무해함을 전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농담, 모욕당하는 농담은 인간을 외롭게 한다. 때로는 농담이 건설하는 개인의 무상함을, 무위를, 실존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다. 공중에 뜬 사과 얼굴이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K의 유쾌함과 농담을 엮어 서툰 손끝으로 조립한 위로를 내가 조소하고 짓밟은 셈이었다.
다음 날, 다시 K와 만났다. K는 귀엽고 동그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도,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국밥을 먹자고 했다. 전 날 세상 모르고 자고 있을 K가 누운 곳을 향해 상욕을 했던게 미안했다. K의 농담을 세차게 손바닥을 쳐버린 것도. 국밥집으로 걸어가며 개미목소리만한 소리로 "어제 미안" 했지만 단순하고 심플하게 농담으로 인생을 쌓아 올린 사람답게 K는 사과의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K는 이 짧고 예의 없는 사과가 어떤 말들의 은유인지, 어떤 농담의 농담인지,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세찬 거절 끝에 내가 어떤 밤을 보냈을지 아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국밥 먹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순대를 건져 먹는 시간보다 눈물 닦는 시간이 더 많을테니까 애써 못 들은척 했을지도 모르고. 진지한 고민과 사유는 늘 아름답지만, 실존은 무상, 무위함과 맞닿아 있다. 못먹는 와인을 꿀떡꿀떡 마신 죄로 쓰린 가슴에 국밥을 채우며, 가끔은 진지한 사유를 무상한 유쾌함으로 전환해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약삭빠르게도, 우리 삶이 무상한 농담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사유라도 진지해야하는 것이 균형을 이룸에 있어서는 탁월한 선택이라고 재빨리 덧붙이며,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엔 농담(濃 짙을 농, 談 이야기 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내 고집도 못 말릴 일이다 싶으면서도, 농담(弄談)으로 농담(濃淡)을 조정하며 가끔 진지하지 않은 순간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내 삶이 무상히 나아가는데에 성공하는 셈이니 괜찮다. 나는 그렇게 농담 있는 농담들로 나만의 농담을 완성해간다.
요즘 문학동네->민음사로 마음이 대이동 중이다. 인덱스는 툴러(Tooler)의 제품으로 무지막지하게 좋다.
겁나 부지런하게도 전주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저 셀카들 다 오후 세시에서 찍은 사진임..! 테라스 맛집
근데 더 핵소름인건 북캠핑도 했다.
나래미온느의 24시간이 모자라...'ㅁ'
따로 포스팅하겠지만 책 좋아하는 분들은 가면 재밌게 놀다 오실듯해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드백과 질문은 댓글로 or 인스타그램 seol_vely로 부탁드립니다.
발전에 귀하게 쓰겠습니다.
www.instagram.com/seol_vely
댓글로 신명나게 이야기 나누는 중이에요.
여러분께서도 독서 후에 남은 감상을 다른 사람의 감상으로 새롭게 느끼고 다듬고 채우는 과정을 함께하세요!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독서는 발전합니다>_<
+
더불어 책, 영화, 드라마, 전시, 음악 등 각종 문화생활을 더 풍부하게 즐기고 싶은 힙한 현대인 당신을 위한 큐레이션을
카카오뷰 채널 헌책방이 무료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http://pf.kakao.com/_UIvSb
채널 추가 해주시면 문화생활도 트렌디하지만 깊게 즐기는 데에 도움 되는 인사이트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책읽었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토너 - 존 윌리엄스] 나는 무엇을 원했나. 원하는가. / 북리뷰, 책 추천, 북캉스, 책캉스 추천 도서 (0) | 2022.05.17 |
---|---|
[아무튼, 술 - 김혼비] 어쨌든, 술 (술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feat. 현대카드 쿠킹라이브러리 / 북리뷰 맞습니다. (0) | 2022.05.03 |
[모든 사람은 혼자다 - 시몬 드 보부아르] 나의 눈은 엄마를 닮았다. (0) | 2022.04.25 |
[패싱 - 넬라 라슨] 무위의 번영, 닿지 못한 영화를 꿈꾸다. feat. 책캉스, 북캉스 in 롯데 호텔 제주 (0) | 2022.04.20 |
[시여, 침을 뱉어라 - 김수영, @ 서촌 체부동잔치집 별관] 그대가 시라면, 침을 뱉어라. / 북리뷰, 독서 일기 (0) | 2022.04.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