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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었다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엄마에 대하여

by 헌책방 2022. 10. 26.


[한 여자 - 아니 에르노] 엄마에 대하여


엄마에 대하여 쓰는 것은, 나에 대하여 쓰는 것과 비슷하다. 내 글에 유독 엄마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내가 마마걸이어서도-나는 오히려 스스로가 독립적 존재임을 앞세우는 효로 자식에 가깝다-, 주변에 남은 사람이 엄마 뿐-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친구가 아직 30명 가까이 남아있다-이어서도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보면서 나를 본다. 엄마를 맡으면서 내 향기를 감지한다. 엄마를 안으면서 나의 자아와 대화하고 화해한다. 이는 DNA나 피를 타고 상속 되는 기질 같은 생물학적 분석이나 물보다 피가 진하다는 혈육의 정과 같은 보편적 정서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아빠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가족에게 더없이 잔인했던 아빠를 여태 마음 깊이 짝사랑하고 있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기만 하지는 않는다. 엄마는 다르다. 엄마는 내가 갖고 태어난 '다름'을 '특별함'이라고 불러주었고, 딸이 아니라 나의 이름으로 나를 대했으며,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나는 나의 독특한 외모나 성정, 외부와 융합하기 위해 용기 낼 때마다 다름을 확인하고 상처 받는 사고 구조를 유일하게 단 한 사람에게 온전하게 인정 받는다. 엄마.

 


어렸을 때의 나는 속으로 시들어가는 화초 같았다. 이웃들이 애써 이국적이라고 표현해 주는 독특한 외모와 새까만 피부, 선생님들이 손수건을 들어 닦아주려다가 번번이 실패하고는 했던 코 옆에 난 커다란 점, 유달리 마른 몸과 좁은 어깨, 역시 이웃 아주머니들이 허스키하고 매력적이라고 포장해 주는 탁한 목소리 때문에 줄곧 움츠러들었다. 엄마는 일찍이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하여 가르쳐줬고-이미 초등학생 때의 나는, "친구들이 애기는 배꼽으로 낳는 거여!", "아니여, 다리 밑에서 주워 오는 거여!" 하면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나는 엄마가 품어 만들고 애써 세상에 내놓은 내가, 밖에서 예쁘지 않다고 욕 먹는 것이 싫었다. 때문에 집에서는 내가 바깥 세상에서 평가 받고, 그에 대하여 느끼는 것에 대해서 철저히 숨기려고 했다. 엄마는 엄마가 못생긴 딸을 낳았음을 모르게 해주려고 치밀하게 노력하는 나를 그저 가만히 안아주었다. 어쩜 이렇게 예쁘고 고운 나래가 나에게 왔을까. 하며. 뭐든 잘하고 똑똑하다며 엄마는 내 코에 엄마의 몽톡한 코를 비볐다. 코땡. 나는 콧김으로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나날이 스스로를 (예쁘지는 않지만) 아름답다고 믿는 아이로 자랐다.

 

엄마는 내가 아주 달달 외어버린, 내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느 날 미술 학원에 간 딸 아이가 눈물에 녹초가 되어 젖은 찐빵처럼 찐득해져서 돌아왔다. 아이는 대문을 박차고 들어서며 말했다. "엄마 나 미술 학원 그만 둘 거야." 아이가 미술 학원에 다닌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주에는 아이가 김치를 먹이고 낮잠을 억지로 재운다는 이유로 어린이집을 그만둔 터였다. 엄마는 울먹이는 딸을 다독여 스케치북을 펼치게 했다. "무슨 일 있었어? 학원에서?" 아이가 펼쳐든 스케치북에는 온통 빨간 색 얼굴을 한 허수아비가 황금빛 들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엄마. 허수아비 아저씨가 하루 종일 들에 서있어서 얼굴이 빨갛게 탔는데, 선생님이 허수아비 얼굴을 살색으로 칠하라고 했어. 다시 가기 싫어." 엄마는 미술 학원에 전화했다. "나래에게 물어보셨나요? 왜 얼굴을 빨갛게 칠했는지?" 선생님은 어떤 이유로 빨갛게 얼굴을 칠했는지 몰랐다고 대답했다. 끔찍한 상상을 했고, 또 금방 대수롭지 않게 감각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러고 나서는 물어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어머니는 아이를 다시는 미술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미술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그림을 잘 그리고 있다고, 다음에 파랗거나 보라색의 허수아비 얼굴을 만나도 이상하다고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다. 그 색깔들에는 다 이유가 있고, 그대로도 괜찮다고도. 나는 그때의 엄마 덕분에 다른 색깔을 한 허수아비의 얼굴들을 보고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청년으로 자랐다.

 

지는 것을 싫어하고, 누군가에게 지면 하루 종일 씩씩대는 아이에게 엄마는 이야기했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때리는 것이라고. 타고난 승부욕 때문에 곧잘 그 말씀을 까먹고는 했고 지금도 자주 까먹지만, 대부분의 순간 누군가를 때리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누군가를 이기기보다 그저 스스로 탁월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열 살 무렵부터는 엄마의 해설 아래 박경리, 박완서, 조정래, 박태원, 헤르만 헤세,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앤 K 롤링, 시편과 잠언, 반야심경, 논어를 읽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웠고, 기계적으로 연주하기 보다 나를 어떻게 표현하고, 다시 그 표현을 어떻게 스스로 사랑해 줄지에 대하여 배웠다. 조용필의 <허공>,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클래식이 아니어도 괜찮아. 그리고 보헤미안 랩소디에 나왔던 아이처럼, 너는 엄마에게 모든 것을 들려주렴. 엄마는 나래와 다른 사람이라, 나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니까. 나래가 마음을 말해주어야 엄마는 알 수 있어. 엄마는 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나침반은 그녀가 만들어주었고, 나는 그녀의 일부를 헤치고 그것을 몸에 묻히고 태어났으며, 그녀의 마음을 이루는 중요한 고리들을 물려 받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어디가 사랑스러운지에 대하여 설명하라고 하면 백가지도 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를 왜 사랑하는지에 대하여는 설명할 수 없다. 사랑은 이유 없이 마음이 쏟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엄마를 통해서 그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인정하고 사랑한다. 엄마가 아빠와 이룬 지독한 사랑까지도. 코땡을 해오던 날렵하던 엄마의 코가 점점 커지는 것까지도. 피아노로 울려퍼지는 <허공> MR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발라당 누워 짧은 다리를 까딱이는 모습까지도. 김정은 패션까지도. 보라색 뽀글 머리까지도.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는 글로 종종 엄마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에 대하여 확신과 위안을 주었다. 한림원의 노벨문학상 선정에 도박사들의 입김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때문에 그 공정성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의 이유에는 늘 납득할 수 밖에 없게 되고 만다. 한림원은 아니 에르노를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사적인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억압을 용기와 임상적 예리함을 통해 탐구한 작가'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인생에 대하여 묘사한 본작 역시 선정 이유에 정확히 부합한다. 아니 에르노는 어머니를 둘러싼 사회적, 역사적 배경을 마치 의사가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 촉진하듯이 진단하고, 날카로운 메스로 해부하듯이 파헤쳐 분석한다. 어머니가 전형적인 피지배 계급에서 태어나, 그곳으로부터 탈피하고자 늘 애썼으나, 전쟁, 가난, 결혼, 출산, 생업 등의 허들에 번번이 가로막힐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현실적인 글쓰기로 선연하게 글로 현화한다. 그녀는 어머니의 인생에 대하여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며, 자신 역시 '어머니의 열망대로,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로 옮겨 오게 되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했다'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가 자신이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라고 묘사한다.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하여 그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평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누군가의 인생은 다른 그대로 고유할 뿐 판단의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다. 그저 본작의 어머니가 그러하였듯, 이 세계의 모든 어머니들이 한 우주를 낳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 주면서 그 우주를 품어 키우고,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는 듯이 미련과 집착 없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자란 우주를 홀연히 떠나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경의를 표할 뿐이다. 우주의 어머니들의 죽음 앞에 추모할 뿐이다. 본작의 주인공인 어머니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죽기 일주일 전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시대에 같은 땅을 살았던 두 사람이, 무척이나 다른 삶을 살고, 또 무척이나 닮은 유산을 남겼다는 것이 나지막한 위로로 남는다. 작가의 어머니는 독일 점령기 당시 끈끈했던 한 공동체와의 인연이 끊기자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건 다 지나간 일이고, 이제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시몬은 이야기한다. 인간은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존재하고, 이 행위 그 다음은? 이 목적 그 너머는? 에 대하여 돌아와 쉬지, 하는 대답이야말로, 목적과 이유 없이 무상하게라는 방식이야말로,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우리는 모두 혼자지만,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명멸이라는 한 지점을 향해 가면서도, 각자의 오늘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녀도, 방구석에서 글을 쓰는 지금의 나도, 같은 무게로 따뜻하고 느슨한 연대에 고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주에 사는 엄마들이, 한 여자들이, 헤겔의 말처럼 생명체의 고통 속에 실존하는 모순 앞에서, 농담 같은 삶을 충실히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묘비석 앞에 꿇어 앉은 모든 딸들이, 어머니처럼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다짐한다는 사실이. 따뜻한 응원이 된다.

 

나의 눈은 엄마를 닮았다. 그 다음에는? 그리고 나서 아무것도 없더라도, 무상하게 세상을 사랑하는 엄마. 내일 생일! 참 좋은 계절이다. 연녹색의 새순이 물결을 이루고. 봄꽃이 만발하고. 생일 축하해. 하고 어여쁜 이모티콘 세 개를 붙이는 어머니. 엄마. 부조리 속에서, 폭력 속에서, 아픔 속에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모든 것에 자신이 정한 본질의 이름표를 다는 배우자 옆에서, 그녀는 꿋꿋했다. 아들과 어린 딸들을 아꼈지만, 태몽이 용꿈이었는데도 고추를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엄마를 미워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끝내 미워하지 못했다. 엄마는 다만 조용히 미움과 원망의 고리를 잘라, 어느 밤 하늘 아래 쥐불놀이용 통에 모아 넣고 빙빙 돌리다 논으로 던졌다. 다 큰 딸의 머리를 빗겨주며 우리 나래, 애기 때랑 똑같이 예쁘다. 하는 사람. 생각이 많아 터질 것 같은 딸의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그저 사는 거야. 그 대신 나래가 정하면서. 그저 너는 너의 삶을 사는 거야. 그 뒤에는 뜻이 따를 거야. 하는 사람. 61세. 청각장애인 지원센터를 다니는 직장인. 수화통역사에 도전하며 흰머리와 무슨 색깔로 염색한 건지 보라색 머리칼이 가득한 머리로 환히 웃으며, 떨어질 것 같아. 그런데 또 보는 거지. 괜찮아. 안되어도 하는 거지. 재미있다! 밥 먹으러 가자. 하는 사람. 나의 눈은 엄마를 닮았다. 어쩌면 닮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됐을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녀처럼 오늘을 산다. 그녀를 쓴다.

 

* 이번 작품은 밀리의 서재에서 전자 책으로 읽었기 때문에 엄마 사진을 대량으로 첨부해봅니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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