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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에세이18

[가꾸는 이의 즐거움 - 이유리] 행운목처럼 [가꾸는 이의 즐거움 - 이유리] 행운목처럼 행운목에 꽃이 피면 좋은 일이 생긴대. 행운이 와서 행운목이라는 거지. 거실 한복판에서 행운목이 하얀 꽃을 여물렸다. 죽은 듯이 가만히 서있던 행운목이, 갈색 줄기 속에서 남몰래 키워 온 펄떡거리는 생명을 세상에 여봐란 듯이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예닐곱 살쯤 됐었던 그 해, 우리 가족에게 찾아왔었을 여러 이야기들 중에 무엇이 행운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저 작은 나무토막 같던 시절부터 몇 년을 공들여 키운 행운목이 드디어 꽃을 피우자 엄마 얼굴도 그 하얀 꽃처럼 화사하게 빛났던 장면만은 어제 일처럼 선연하다. 그때는 엄마가 화분을 들여다보고 그 여린 잎들을 보살피며 식물을 키우고 가꾸는 일은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일과 같다고, 나래와 루나를 키우.. 2022. 8. 6.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 김초엽] 해변 끝의 카프카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 김초엽] 해변 끝의 카프카 야이. 너 이 xx oo 완전 꼰꼰대네. 아 선배님, 저 꼰꼰대는 맞는데요. 후배한테 xx, oo이 뭐예요? 교양 없게. 아니 그리고 그 xx가 남자 선배랑 여자 선배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른 것이 문제지, 내가 선배라고 무조건 대우해달라는 것이 아니라니까? 나보다 나이 많아도 후배니까 무조건 군기 잡겠다. 뭐 그런 마음이 아니라니까요?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내 눈을 빤히 보더니. 많이 세졌네. 막둥이 놈이. 하면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린다. 웃을 문제가 아니라면서 샐쭉이다가 그를 따라 웃었다. 내가 권위 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진정한 꼰대라면, 그에게 대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후배에게는 권위적으로 행동하고 선배에게는 대드는 내로남불형 인간이거나. 후자.. 2022. 7. 20.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천 개의 파랑 - 천선란] 삼천 개의 빗방울 비가 오니까 너도 오는구나. 이별 후에 유독 새벽이 길어졌다. 머리만 대면 잠드는 편인데, 베개에 불면이 숨어 있었는지 박명 사이로 자꾸 뒤척임이 스민다. 지난밤 꿈에는 너의 모습이 말도 없이 제멋대로 찾아와 까만 밤과 새벽 틈 사이에서 눈을 떴다. 투두둑, 발코니 철제 난간에 정신없이 빗방울이 내려 춤추고 있었다. 너와 나란히 앉아 이별을 말할 때 함께 보았던 하늘에 걸린 회색 장막에, 삼천 개의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그날 차마 내리지 못했던 그것들이 빗방울이 되어 펼친 손위로 나렸다. 처마 끝에 매달려 나리는 빗속으로 오목하게 손바닥을 반쯤 쥐고, 목놓아 너의 이름을 불렀다. 너도 너의 맘대로 꿈속에 왔듯이. 내 맘대로. 주책맞게도 빗방울 소리를 손에 담.. 2022. 7. 19.
[칵테일, 러브, 좀비 - 조예은] 빨간약과 파란약 [칵테일, 러브, 좀비 - 조예은] 빨간약과 파란약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갈 당신 앞에 알약 두 알이 놓여 있다. 신이 어리둥절해 하는 당신에게 알약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파란 약을 삼키면 확고부동한 운명을 타고 나서 어떤 행동을 취할지라도 벌어질 일은 벌어지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된다. 빨간 약을 삼키면 행위에 따라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인생을 살게 된다. 신은 늘 친절하지만은 않아서 복잡한 이 선택의 이면에 있을 상황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의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현재 네오의 삶은 노예의 그것과 같으며, 다만 빨간약을 먹으면 진실에 가닿을 수 있다고 이야기할 뿐, 거대한 진실에 대하여 다른 어떤 힌트도 제공하지 않는다. 신도 모피어스처럼 정보 제공에 박하다. 네오는 단숨에 빨간약을 선택하.. 2022. 7. 14.
[파과-구병모] 파과가 아름다운 이유 / 북리뷰, 독서 일기, 책 후기 [파과-구병모] 파과가 아름다운 이유 아빠는 멀리 사는 큰형님, 셋째형님보다 가까이 살고, 첫눈에 봐도 느껴지는 넓은 배포와 아량, 농사 짓는 사람 특유의 애정 어린 보살핌의 몸짓을 갖춘 둘째형님을 많이 따른다. 보수적이고 엄격했던 당신의 아버지 대신 둘째형님에게 많이 기댔다. 당신이 지금 내 나이쯤 되어 가정을 이루고 독립하기 직전까지 둘째형님과 형수님이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는 집에서 함께 살기까지 했으니, 통칭 호치큰아빠로 불리우는 큰 아빠는 아빠에게 형님이 아니라 아버지의 어린 버전에 가까운 의미였을 것이다. 지금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만나기만 하면 각자의 아내에게 들킬까 두려워하면서도 킬킬대며 야금야금 약주를 나눠먹고, 무릎 연골과 고관절 건강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말 섞어 논의하는 친구 비슷한.. 2022. 5. 30.
[아가미 - 구병모] 땅 위에서도 물 속에서처럼 / 북리뷰 feat. 연남방앗간, 파주 지혜의 숲 [아가미 - 구병모] 땅 위에서도 물 속에서처럼. 입 밖으로 생각을 내뱉는 순간, 자기 자신을 포함한 그 발화를 청취한 모든 사람에게 그 발언은 발화자의 공식적 입장이 된다. 오랜만에 친구 B를 만났다. 그와 나 사이에 주된 토픽은 거의 늘 연애였기 때문에, 현재 만나는 연인이 있는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지내는지, 같은 타인과 나누면 실례가 될지도 모르는 질문이 오가는 것이 자유로운 편이다. 심상한 질문에 그는 남자친구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아요. 비슷한 정도. 라고 대답한다. 짧은 대답 이면에서 B의 두려움을 느꼈다. 남자친구가 생겼어요.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정말 B의 공식적인 연인이 되는 셈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말의 힘이 세다는 사실이 종종 뻑쩍지근하게 뼈저리는 일이 쌓이면서, 별 것.. 2022. 5.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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