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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세이6

[잠 - 유재선] 앎과 받아들임 사이에 [잠 - 유재선] 앎과 받아들임 사이에 과외와 학원 알바로 모진 서울의 생활비를 충당하던 시절. 어린 선생(먼저 선 先, 태어날 생 生)이었던 내가 학생들에게 그나마 가장 많이, 확신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문장 중에 하나는, 아는 부분은 찢어버려. 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대부분의 순간 가족의 눈과 책장에 맺힌 활자를 쫓았지만, 종종 누워 유난히 맑았던 그 시절의 하늘을 눈에 담거나 멍하니 벽지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구름이 토끼나 하트 모양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벽지 속 패턴이 악마나 괴물, 이모가 보여 줬던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 얼굴로 보여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착시를 무의식적인 추론에 의한 인지 과정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즉, 어린 나는 마룻바닥에 .. 2024. 3. 10.
[파이트 클럽 - 데이비드 핀처] 송사리 튀김 [파이트 클럽 - 데이비드 핀처] 송사리 튀김 여기 뭐 해장국 맛집이야? 아니 일단 가봐야 돼. 가봐야 알아. 껍데기 맛집이야. 뭔 소리여 이게. 중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기로 했다. 신촌에서 보기로 했더니 둘 다 삶에 찌들었는지, 만나서 갈만한 식당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신촌 인근의 유일한 술집이자, 익히 아는 맛을 새롭게 내서 사랑에 마지않는 대전 해장국 링크를 보냈다. 운 좋게도 후덥지근함을 뚫고 낮술을 즐기러 온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K와 연애 초기에 여기서 M오빠랑 진탕 술 마시고, 목포까지 KTX 타고 밤을 뚫고 달렸었다. 이 귀찮은 거 싫어하고 끝까지 술 먹기 좋아하는 내가. 참, 여기 K랑 같이 온 적도 있었는데, 걔도 너처럼, 해장국 맛집이야? 아재는 국밥을 사랑.. 2022. 8. 5.
[토르: 러브 앤 썬더] 신은 죽지 않았다. / 쿠키 2개, 영화 리뷰, 후기 [토르: 러브 앤 썬더] 신은 죽지 않았다. 믿음은 순전히 믿음을 행위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믿음(믿을 신 信)은 인편(사람 인 亻)에 맡겨 말씀(말씀 언 言)을 전한다는 뜻으로 편지, 서신을 가리키는 말이었고, 이 편지가 담고 있는 정보(말씀)를 신뢰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게 되면서 믿음에까지 그 의미를 확장하게 되었다. 정보는 독해자의 신뢰를 얻기 위해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쓰여지지만, 텍스트 특성상 실시간으로 변하는 독해자의 생각에 맞춰 대응, 설득할 수는 없고, 따라서 독자는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에 따라 정보가 사실인지 판별하고, 그것을 믿을지 여부를 결정할 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순전히 믿음을 결정한 자의 책임이자,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마치 사랑처럼. 따라서 배신감(背信感)은 신뢰를 준 사람.. 2022. 7. 7.
[헤어질 결심 - 박찬욱] 무너지고 깨어짐의 시작. 그리고 끝. [헤어질 결심 - 박찬욱] 무너지고 깨어짐의 시작. 그리고 끝. 시작하기 전에. 작품에 대한 강력한 스포가 들어있습니다. 감상 후 적은 글의 양이 워낙 많아 정리에 시간도 걸렸고, 여기에 영화 유튜버 영민하다 님과의 네시간여의 대화가 더해져 양이 더 방대해졌습니다. 적다보니 완벽하게 구성, 정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작품의 핵심과 닮았다 싶게도. 미완결인 상태로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았는데, 그것은 다른 포스팅에서 계속 됩니다. ~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는 내용의 DM들에 제 나름대로 생각을 전하고 또 받으면서 했던 생각들은 따로 정리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오래걸릴 것이야 살다보면 최선을 다해도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나는 열정이 .. 2022. 7. 5.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의 의미 [브로커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가족의 의미 '식구'라는 말을 좋아한다. 가족(家族)은 뿌리를 같이하는 친족, 특히 혈연 관계에 있는 이들을 묶어 부를 때 쓰고, 가정(家庭)은 혈연, 혼인으로 성립된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 자체 혹은 그들이 몸 담고 있는 공동체를 부를 때 쓴다. 때문에 내가 속한 가족이나 앞으로 이룰 가정에 속하는 이들은 아닌, 그러나 친밀한 관계를 맺어 집단을 이룬 이들을 지칭할때, 가족과 가정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적확하지 않다는 감각이 있다. 반면 음식을 나눠 먹는 입들이 모인 모임, 그 특별함을 말하는 단어 '식구(食口)'에는 오로지 나의 선택으로 누군가와의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함의 되어 있다. 그럼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작품을 통해 그리기 즐기곤 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활.. 2022. 6. 28.
[전주국제영화제 밀란 쿤데라 세션] [농담 - 야로밀 이레시]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 - 밀로슬라프 슈미드마예르] 나는 누구인가 [전주국제영화제 밀란 쿤데라 세션] 나는 누구인가 [농담 - 야로밀 이레시] [밀란 쿤데라 농담에서 무의미까지 - 밀로슬라프 슈미드마예르] 삶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때였다. 오랫동안 닫아 놓았던 기억의 궁전이 되살아나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나약함과 우유부단함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었고, 부단히도 나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왔던 짧은 인생에 사정 없이 금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듯 이명으로 울렸다. 자려고 누우면 밤이 내리는 소리가 또렷이 들려서 잠들지 못하고, 살아있으려고 앉으면 깨어나야 마땅한 시간이 지나도 눈을 뜨지 못했다. 겨우 밥을 씹어 삼켜도 속절 없이 모두 게워올렸고, 옷에 담겨 다니는 것처럼 보일만큼 몸이 쪼그라들었다. 바람이 불면 살갗을 찢어버릴듯이 털이 곤두섰다. 무.. 2022.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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